삽화 출처 : 칼부림
1599년 음력 9월 누르하치는 해서 여진 세력으로서 한때는 여진 최강이라고 불리던 하다의 본성을 함락했다. 누르하치는 하다를 병합하려 시도했으나 머지 않아 계획을 변경하여 멍거불루에게 자신의 딸 망구지를 시집보내고 그를 하다의 땅으로 돌려 보내어 하다를 회복시키게 하려 했다. 일종의 괴뢰국화의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누르하치가 그런 번거로운 수를 쓴 이유는 명나라의 개입과 당시 여진 지역에 몰아닥친 기근 때문으로 판단된다. 한 순간에 집어삼키기 보다는 일단은 괴뢰국화를 하고 천천히 병합을 시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멍거불루와 연루된 일단의 음모로 인해 누르하치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멍거불루와 연루자들을 처형했다. 이 때 누르하치의 심복중 한 명이었던 가가이마저도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해당 사태는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누르하치는 하다를 완전히 병합하기로 하고 복부계획을 철회했다.
한편 이 무렵인 1600년, 도르기 비라의 거대 세력 암반, 로툰이 누르하치에게 직접적으로 귀부하였다.
이 이전까지 로툰은 누르하치의 간접적인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세력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누르하치, 부잔타이, 조선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부잔타이의 두만강 인근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격퇴한데다가, 로툰 본인이 조선과의 충돌로 인해 근거지를 상실하게 됨으로서(1600년 노토부락 정토) 그는 결국 확실하게 향배를 정해야 했다.1
로툰이 선택한 것은 결국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는 로툰이 귀부해오자 그를 크게 환대하며 받아들였다. 로툰은 도르기 비라에서 유독 강성한 암반이었기에 누르하치로서는 그의 직접적인 귀부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로툰과 완전무구한 우호관계를 구축한 누르하치는 로툰을 매개체로 하여 두만강 유역, 요컨대 안출라쿠와 도르기 비라의 번호들을 본인의 세력하에 복속시키려 했다. 로툰은 해당 지역의 지리와 번호 생리를 잘 아는 인물로서, 해당 지역에서의 작전에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가 누르하치를 대행하여 번호 철거의 선봉에 선다면 누르하치로서는 자신의 부담을 다소나마 덜 수 있었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로툰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줌으로서 상대적으로 쉽게 두만강 유역을 속하로 끌어들이려 했다.
다만 누르하치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요소가 하나 있었다. 바로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이 조선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번호들에 대한 철거는 로툰을 앞세운다고 하더라도 작전에 위험부담이 컸다. 자칫 잘못하면 조선군과의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누르하치는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선의 변경에 자신의 부대 이동 계획을 통지하고 해당 군사작전이 조선군과 충돌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적합2을 토벌하기 위함이며 조선을 절대 공격치 않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3
로툰을 매개로 한 누르하치의 번호 공략 작전은 음력 6월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의 노토부락 정토가 있은지 약 2달여만의 일이었다. 로툰의 번호 공략은 얼마간 계속되었다가 뜻밖의 변수와 접한다. 바로 본인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전한 조선군의 보을하진 첨사 구황과 그 부대와 교전을 벌인 것이다. 회령 인근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구황은 건주-로툰군과 교전하다가 전사했다. 그가 대동한 조선군 역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4
누르하치가 회령에 '조선과 충돌치 않겠다'는 서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보을하진 첨사 구황이 출진하여 건주-로툰군을 공격한 것은 구황의 상관인 북병사 이수일이 누르하치가 보내온 서신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차에 구황이 자체적으로 방어 규례에 따른 바였다.
마적합은 조선에 우호적인 번호로서 조선 영내에 세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르하치의 지원을 받는 로툰이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강을 건너오자 구황이 '경계를 넘어온 적대 세력은 출전하여 방어한다'는 규례, 그리고 '조선에 우호적인 번호가 공격받으면 출진하여 구원한다'는 규례에 따라 자위적으로 출진하여 건주-로툰군을 공격했다가 도리어 전력의 압도적 열세 상황에 맞부딪혀 궤멸된 것이다.5
위의 필자의 견해와 상반되게도, 장정수는 이 사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7월 17일의 기록상에서 비변사가 '구황이 용맹을 믿고 경솔히 진격했다'고 판단한 것, 그리고 청측 사료상에서 구황과 건주군간 교전 지역이 국경밖인 것을 교차적으로 검증하여 구황이 경계를 넘어온 건주-로툰군을 요격하려 한 것이 아니라 건주-로툰군이 아직 경계를 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선제요격에 나섰다고 보았다. 그로서 구황이 '전례를 어겼다'고 판단했다.6
그러나 상동 실록의 기록에 '지금 적병이 이미 운두령 밑에 들어와' 라는 언급, 그리고 '(마적합이) 노토(로툰)에게 미움을 사 침략을 받고 서로 싸워 그 부락이 소실되고 자신이 도륙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라는 언급이 존재하는 것을 보아 건주-로툰군은 확실하게 조선 영내로 들어와서 마적합을 제거했다. 즉, 건주-로툰군은 조선 영내에 확실하게 들어왔고 이로 인해 구황이 전례에 따라 출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비변사에서 '구황이 용맹을 믿고 경솔히 진격했다'고 판단한 것은 앞뒤문맥을 볼 때에 구황이 전례를 어긴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 병력으로 상대의 수효를 판단치 않고 요격에 나섰다가 살해당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필자 역시 교전지 자체는 조선 경내 밖이었다는 견해에는 동의한다. 구황이 출전한 것은 건주-로툰군이 경계를 넘어서 운두령에 진입한 시점이었으나, 이후 건주-로툰군이 마적합 공격을 끝내고 복귀하던 시점에 구황이 그들을 경계를 넘어서까지 추격하여 교전하였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7
조선군과 건주군간의 충돌은 조선과 건주 양측 모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해당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게 한 뒤, 평안병사 이기빈에게 만포에 들어오는 여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묻는다면 '모범 답안'적인 답변을 하게 했다. '이번에 움직인 여진 군대의 주체가 로툰인줄로만 알았으며, 누르하치 일 줄은 몰랐다는 것', '만포를 통해 이번의 일에 대해 알렸으면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사건의 잘못은 귀측에 있으니 사과의 뜻을 밝힐 것', '로툰과 그 아들을 잡아 송환하면 이 일을 불문에 붙일 뿐더러 우의를 여전히 돈독히 할 것'이 그 모범 답안의 핵심적 내용이었다.
한편 건주측이 이번 사안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경우에 대해서도 '귀측이 보낸 서신을 받지 못했다', '만약 문서를 보낸 적이 있다면 마땅히 미리 사람을 보내 은밀히 전하였어야 하지만 이번에 귀측은 그러지 않았다.' , '설사 보냈다 한들 혼란한 와중에 누가 보내고 받았단 말인가? 상고할 수도 없고 그 내용을 알 수도 없다'고 '요렁껏 말을 돌려'대응하며 건주측의 조선군 살해에 대한 책임을 성토하기로 했다.
이 문제에는 분명 조선측에도 잘못이 있었지만, 당시 조선은 건주를 상대로 본인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저자세를 취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건주의 이의 제기 소지에 대해 맞대응을 하기로 한 것이다.8또한 구황에 대해서도 비록 무리하게 출진했다가 전사했고,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공을 추켜 세우기로 했다.9
조선이 누르하치의 이의제기에 철저히 대비를 한 것과는 대비적으로 누르하치는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조선에 자신이 미리 서신을 보내어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군에 공격을 당한 경우인지라 자신이 이의를 제기할 명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조선 역시 반박의 명분(국경의 침범, 구황의 전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외교적 논쟁으로 발전할 시 조선에 비해 외교적 역량이 낮은 본인측이 밀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앞서 언급했다시피 누르하치의 세력이 기근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고 있었던 것 역시 원인일 것이다. 기근으로 인해 세력이 피해를 보고 있던 상황에서, 누르하치로서는 조선과 외교적 문제로 다투기 보다는 최소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나아가서는 교역을 행하여 식량난을 해결하거나 물자 지원을 받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1601년에 누르하치가 조선에 직첩을 요구하여 지원을 얻고자 했음을 볼 때에 이러한 분석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10
1.노토 부락 정토에 대해서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3822663 참조
2.번호 추장중 한 명. 친조선 성향이 강했다.
3.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7월 17일.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 때 서신이 도착한 곳은 회령이라고 한다. 장정수, 선조대 말 여진 번호 로툰(老土)의 건주여진 귀부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 78, 조선시대사학회, 2016, p.33.
4.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7월 14일
5.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7월 17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7월 28일
6.장정수, 앞의 논문 2016, pp.33~34.
7.청태종실록 천총 1년 음력 1월 28일, 청태종실록 천총 1년 음력 4월 8일, 만문노당 음력 4월 中 음력 1월 28일에 후금군이 조선측에 보낸 서한 참조
8.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7월 17일
9.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7월 28일
10.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음력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