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남한산성 짤)
노토 부락 정토란 1600년 음력 4월 무렵 조선 조정의 지시를 받은 주장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수일 휘하 조선군이 조선과 몇 차례고 충돌했던 도르기 비라의 여진 세력, '노토 부락'을 공격하여 정토한 사건을 이른다.
노토 부락이란 도르기 비라의 거대 암반중 한 명이었던 타타라 씨족의 로툰이 통치하던 중심 부락과 그 주변 부락 연맹을 일컫는데, 여진어 이름 로툰을 조선에서 음역하여 '노토'로 표기한 것이다. 로툰은 조선의 번호로서 조선 조정으로부터 정 2품 정헌대부의 직첩을 받기까지 한 인물로서 스스로 공언하길 본인의 조상대부터 2백여년간 조선의 번호로 세거했던 인물이었다.1
그런 로툰이 조선의 정토를 받게 된 상황이 조성된 데에는 외부 여진 세력의 급진적인 성장과 그로 인한 자가세력 위축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번호 바깥의 여진 세력들, 요컨대 누르하치의 건주 세력과 해서 여진의 울라등의 세력은 급진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의 경쟁적 성장은 그들이 거의 동시에 두만강 인근에 적극적으로 진출코자 하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두만강 인근에 세거하던 로툰은 본인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여진 군주인 누르하치, 부잔타이2, 그리고 본인과 연이 있던 조선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본인의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한 로툰의 세력 유지 의지는 곧 외교적인 행보로 드러났다. 로툰은 누르하치에게 입공하기도 하고3, 부잔타이와 연계하기도 했으며4, 조선에 본인의 상황을 진고하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5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로툰의 생존 의지는 물리적으로도 나타나게 되었다. 건주, 울라등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조급함을 느낀 로툰이 세력권을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넓히려 하면서 조선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로툰 휘하 여진 추장 명간로(明看老)와 조선군간의 충돌이었는데, 당시 북병사 이일이 로툰 세력이 점차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는 것과 명간로가 국경을 침범한 것을 문제로 여기고 강억필, 강억수외 30여명을 보내어 그들을 회유, 철수케 하려 했으나 명간로가 그들의 의도를 의심하고 공격, 전투가 벌어져 궤멸된 사건이었다.6
이 일은 우발적 성격이 강한 교전이었으나, 조선 조정으로서는 안그래도 로툰의 진의와 향후 누르하치와의 연계 가능성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던 와중에 로툰 산하 세력과 충돌까지 벌어지고 그로 인해 수십명의 조선 병사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로툰에 대한 정토를 최초로 논의하게 된다.
명간로와의 충돌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의정 이덕형은 로툰과의 충돌과 향후 대처에 대해 '기회를 보아 한 두 부락을 궤멸시켜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하고 복종케 해야 한다.'는 강경한 발언을 하면서 정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7선조는 이덕형의 의견에 동조하여 로툰 정토를 준비하기 위해 윤승훈을 함경도 관찰사로 내려보냈다. 윤승훈은 관찰사로 부임한 거의 즉시 로툰 정벌에 대한 준비를 관찰사 차원에서 진행하기 시작했다.
윤승훈이 관찰사로 내려가고 정토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정토는 그 뒤로 약 1년여동안 진행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 조정내에서 정토에 대해 신중론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적극적으로 정토를 주장했던 이덕형 역시도 섣부른 정토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내비쳤으며 정토의 연기와 충분한 준비를 주장했다.8또한 나름대로 노련한 숙장으로 잔뼈가 굵었던 이일 역시도 이에 대해 신중론과 철저한 준비를 제시했으며 정토를 당초보다 조금 연기할 것을 건의했다.9이정구 역시도 정토를 재논의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연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10
이로 말미암아 본래 당해에 진행될 계획이었던 정토는 연기되었고, 보다 철저한 준비 아래에서 진행되게 되었다.
연기된 로툰 정토는 대략 1600년 음력 3월 보름쯤에 실행하기로 했다.11그러나 약정기일이 다 되었음에도 조금 더 연기 되었다. 그런데 조선의 정토가 있기 전 여진쪽이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음력 3월 무렵인 정토 시작 직전, 회령과 종성의 번호 세력들이 조선군과 조선 영토를 공격했으며12이 상황에서 부령부사 이간이 교전중 부상당하고 장교급 대여섯명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13이 전투 이후 조선은 로툰에 대한 정토를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단행할 것을 결정했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이 공격은 로툰이 주도한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조선 조정은 로툰에 대한 정토를 결정했다.14 다만 장정수는 여기에 대해 사소한 이견을 제시했는데, 로툰 정토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여진세력이 자행한 공격을 로툰의 소행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조실록에는 공격의 주체가 로툰이라고 명기되지 않고, 오직 선조수정실록에만 로툰이 공격 주체로 언급되었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15필자는 이에 대해서 다소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다만 필자는 이 공격이 실제로 로툰의 소행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본다. 필자가 보기엔 로툰 역시 사방에 정보망이 있었으므로 조선이 자신에 대한 정토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 선수를 쳐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로툰의 공격 이전 이일이 경제적 대가를 포상으로 하여 로툰과 명간로에 대한 추포령을 여진 번호들에 설파할 계략을 올린 적이 있는데 이 계획이 실행되었는지는 파악할 수 없으나 만약 실행되었다면 로툰이 이로 말미암아 본인에 대한 정토가 예정되었음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16
실제로 이간과 교전한 여진 세력이 어떤 세력이건간에, 앞서 언급했듯이 부령부사 이간의 교전은 로툰 정토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유로 작용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더 이상 정토를 미루다가는 로툰 혹은 그에 영향을 받는 번호들에 의해 어떤 추가적 피해가 발생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더 이상 정토를 미루기보단 확실히 시행하여 북변을 안정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음력 4월 북병사 이수일을 주장으로 하는 조선군 3천여명이 로툰 정토에 나섰다. 이수일은 정토군을 좌, 중, 우위 세 진으로 나누어 각각 어유간로, 무산로, 풍산로로 진군시켰다. 그리고 음력 4월 15일경 좌위병은 로툰의 퇴로를 차단하고 중위, 우위병은 로툰의 세력에 대해 전면 공세를 하는 작전을 골자로 하여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제대로 된 공세를 시행하기도 전에 로툰군의 매복병력에 걸려 당일 공격 정보를 간파당했다. 결국 그 탓에 로툰의 세력은 조선군의 공격 사실을 파악하고 대부분 본인들의 세거 부락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조선군은 로툰군이 본인들의 부락을 버리고 철수하자 다만 빈 부락만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수많은 부락들이 조선군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윤승훈의 보고에 의하면 약 1천여 가옥이 조선군에 의해 불탔다. 그 작전에는 꼬박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4월 15일 저녁 무렵 조선군은 퇴각한 로툰의 군대가 본인들을 야습할 것을 우려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풍산 방면으로 철수했는데, 그 와중에 로툰군의 기병 소수가 후미를 공격해와 몇 차례 교전이 일어났다. 해당 교전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고, 로툰군 역시도 체계적인 작전을 펼친 것이 아니었기에 양측간 피해는 다소 적었다. 다만 그 탓에 행군 속도가 느려져 16일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酉時)에야 풍산에 도착했다.
함경감사 윤승훈이 올린 보고에 의하면, 15일부터 16일까지 이어진 교전에서 총 7명의 조선군(출신 3명, 포수 4명) 전사했다. 적과의 전면전 자체가 없었고 이후 이어진 교전 역시도 소규모의 로툰군과 몇 차례 소규모 교전을 벌인 것 정도였던데다가, 해당 전투들 모두 조선군이 압도적인 숫적, 화력 우위로 로툰군의 접근을 애초에 차단하였기에 큰 피해가 없었다.17반면 로툰측의 피해는 확실하게 파악된 전사자만 115명이었고 1명이 조선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해당 115명이 모두 병사였던 것은 아닌 것 같으며, 민간인 역시도 섞여 있었을 것으로 유추된다.18
결과적으로, 로툰 정토는 해당 사건 당건만을 살펴보자면 큰 성공이었다. 로툰군과의 큰 교전 없이 로툰의 부락들을 불태워 큰 피해를 입혔고, 그 승리를 기반으로 일시적으로 번호 통제력을 다소나마 회복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건주, 울라 사이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할 수 있던 로툰 세력이 본거점을 잃었다는 것은 곧 그들이 건주와 울라중 하나로 귀부할 수 밖에 없게 되었음을 뜻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세력 증발로 인해 건주와 울라가 조선의 번호 생리에 보다 쉽게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로툰은 이 이후 누르하치의 건주에 완전히 귀부했으며, 건주와 울라 세력 모두 조선 인근 번호 장악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선으로서는 이득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5년 음력 7월 6일, 조선왕조실록 선조31년 음력 8월 1일
2.울라의 버일러
3.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1월 30일
4.만주실록 정유년조 기사
5.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8월 1일
6.이 부분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과 장양공전서의 기록이 다소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서는 30여명을 파견했다가 전멸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장양공전서에는 21명을 보냈다가 그 중 4분의 3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필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따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2년 음력 3월 28일.
7.조선왕조실록 선조 32년 음력 4월 21일
8.조선왕조실록 선조 32년 음력 7월 29일
9.조선왕조실록 선조 32년 음력 7월 26일, 27일
10.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8월 4일
11.조선왕조실록 선조 32년 음력 12월 28일
12.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4월 7일
13.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음력 4월 8일
14.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 33년 음력 4월 1일
15.장정수, 선조대 말 여진 번호 로툰(老土)의 건주여진 귀부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 78, 조선시대사학회, 2016, p.29
16.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1월 26일
17.다만 이는 전사자일 뿐이므로 부상자 및 낙오자, 행불자등을 합치면 피해는 보다 클 것으로 사료된다.
18.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5월 8일. 다만 다른 기록에는 50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북로관지 권지3, 故實 邊胡 老土部落. 또한 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6월 14일 기록에는 호인 동평고(피양구)가 1만에 달하는 로툰 산하 부락민이 죽었다고 말한 바가 있으나 이는 확실하게 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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