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598년 음력 3월, 정유재란이 한참 진행중이던 와중 조선 조정에 회령 인근의 번호들이 적호(賊胡)에게 공략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조선 조정은 이 문제를 크게 염려하였으며, 비변사서는 훗날 후회될 일이 발생치 않도록 본도의 수령과 변장들을 속히 가려뽑아 보내길 청하였다.
그런데 음력 3월중에 조선 조정에 전해진 '회령 인근 번호를 공격한 주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크게 두 개의 주장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도르기 비라의 여진족 추장 로툰이 공격의 주체였다는 견해이며 또 하나는 누르하치 세력이 공격의 주체였다는 견해이다.
전자의 경우 서병국이 1970년 본인의 저서에서 최초로 주장한 이후 큰 이견이 존재하지 않았다.2박정민은 해당 공격에 대하여 기록상 주체가 확실치는 않다고 하였으나 서병국의 논지를 본인의 논저에 언급하고 따로 반박치 않으면서 사실상 이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3
그러나 후자의 의견을 제시한 장정수는 2016년 이전 선행연구에서 다루어진 이러한 '로툰 주체설'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했다. 그는 1598년 음력 3월에 조선 조정에 전해진 '적호의 회령 인근 번호 공격 사건'이 1598년 음력 1월에 발생한 누르하치의 장남 추영과 막내동생 바야라의 안출라쿠(회령 인근 지역에 대한 여진식 지칭)공격을 지칭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해당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 조정이 공격의 주체를 누르하치와 그의 세력으로 정확하게 파악했고, 그에 따라 음력 4월 중 이 문제를 명나라 군문에 타진하여 그들이 누르하치를 선유토록 요청하고자 합의했다고 보았다.4 조선 조정에서 의논한 선유 요청 조치는 실질적으로 이행되어, 음력 5월 중에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명나라에 의한 누르하치 선유가 진행되었다.5
두 개의 견해중 무엇이 더 타당할까? 전자의 '로툰 주체설'의 경우 음력 3월 12일의 '적호의 회령 인근 번호 공격 사실'과 음력 4월의 조선 조정내에서 이루어졌던 '명나라 군문에 대한 누르하치 선유 요청 결정', 그리고 음력 5월에 있었던 실질적인 선유 요청과 명나라의 선유를 개별적으로 판단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후자의 '누르하치 주체설'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위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로 맞물려 이루어졌다고 분석했으며, 실제로 후자의 경우가 더 타당하다.
음력 4월 29일의 '누르하치 선유 요청 결정' 이전 3개월여간 타 여진 세력의 번호에 대한 공격과 관련된 사안은 음력 3월 12일의 '적호의 회령 인근 번호 공격' 사안이 유일한데, 그렇다면 음력 3월 12일의 사안은 당연히 음력 4월 29일의 선유 요청 결정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장정수의 해당 주장 제기 이전의 선행연구는 이 점을 간과하여 해당 선유 요청 결정 사안과 그 후속조치를 연계분석치 않았고, 그로서 음력 3월 12일에 보고된 '회령 번호 침탈 사안'과 음력 4월~5월의 조선 조정의 명나라에 대한 누르하치 선유 요청과 명나라의 선유 이행을 분리시켰다
장정수는 이 문제를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3~5월의 기사간 연계를 통해 해결하여, 음력 3월 12일에 전해진 '회령 인근 번호 공격 소식'에 대해 조선 조정이 누르하치가 공격 주체라고 파악했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의 견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해당 공격이 음력 1월에 있었던 누르하치 세력의 안출라쿠 공격을 지칭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전자의 견해보다 상당히 자연스러운 견해로서, 필자 역시 이에 동의한다.
한편 장정수의 이견이 제시된 이후, 한성주 역시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한성주는 비록 본인의 논저에서 음력 3월에 조선 조정에 올라온 '적호의 회령 번호 공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장정수가 음력 3월의 회령 번호 공격 사실과 연계되었다고 판단한 음력 5월의 이덕형의 양호에 대한 선유 요청 사료를 거론했다. 그리고 해당 선유에서 언급된 공격이 누르하치에 의해 진행된 공격이긴 하되, '누르하치의 직접 공격'이 아니라 '누르하치의 지시를 받은 로툰의 공격'으로 파악했다.6
한성주는 기존의 '로툰 주체설'을 여전히 기본 골자로 하되, 장정수의 이견을 일부 수용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한성주는 음력 5월 명나라의 선유 대상이 된 '적호의 회령 번호 공격'이 음력 1월에 있었던 추영과 바야라의 안출라쿠 공격과는 다르며, 해당 공격 이후 누르하치의 지시를 받은 로툰에 의해 진행된 공격이라고 보았다.
한성주의 의견은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다. 해당 의견은 음력 5월 2일 우의정 이덕형이 경리 양호를 만나 '누르하치가 강변의 번호 3백여호를 무찔르고 수백명을 나포했으며, 경작을 금하는 삼수군 일대에 와서 경작을 짓고 있다'고 말한 것을 주요 근거로 활용한다.7이 때 삼수군 일대에 들어와서 경작을 짓고 있던 것은 누르하치의 직할 세력이 아니라 로툰이었으므로 공격의 주체 역시 누르하치의 본세력이 아니라 누르하치의 지시를 받은 로툰이라는 것이 한성주의 논지이다.
그러나 이 시기 로툰은 누르하치의 영향권에서 다소 벗어난 상황으로 추론되므로 한성주의 논지(요컨대 로툰이 누르하치의 지시를 받아 번호를 공격했다는 것)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
필자가 판단키로는, 장정수의 견해대로 음력 3월 12일 조선 조정에 전해진 '적호의 회령 인근 번호 공격 소식'은 추영과 바야라의 안출라쿠 원정에 관한 소식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러나 삼수에 들어와 경작을 한 여진인들은 한성주의 견해대로 로툰 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누르하치의 안출라쿠 공략으로 인해 안출라쿠의 부락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기록상 20여개의 부락이 공격을 당함으로서 안출라쿠 세거 부락들의 힘은 크게 미약해졌고, 그들 대부분은 누르하치에게 재복속되었다. 필자는 로툰이 이 '틈새 시기'를 이용하여 삼수군으로 침투하여 경작을 시도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즉, 이덕형이 양호에게 행한 발언에서 '3백여호의 호인들을 무찌르고 수백여명을 포로로 끌고간' 주체는 누르하치의 장남 추영과 동생 바야라이며, 이후 '삼수군 지방에 들어와 경작을 하고 있는' 주체는 그들의 안출라쿠 공략 이후 틈을 노린 로툰 세력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조선은 여진 세력들의 구분에 다소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조선은 울라(홀온)와 건주의 군대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여 외교적 오판을 하기도 했다.8 이 경우에도 조선이 누르하치 세력의 군사적 행동과 그에 이어 곧바로 행해진 로툰의 삼수군 경작 시도를 조사하면서 착오를 일으켜 누르하치 세력이 회령 인근의 번호들을 공격하고 삼수군에 경작까지 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음력 3월 12일 조선 조정에 전해진 '회령 인근 번호들을 침략한 적호'를 누르하치 세력으로 판단한다. 다만 이후 삼수군에 침투하여 경작을 행한 세력은 로툰 세력으로 판단한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3월 12일
2.서병국, 宣祖時代女直交涉史硏究, 1970, p.61. 박정민, 임진왜란과 여진인 ‘來朝’의 종언, 만주연구 18, 만주학회, 2014에서 재인용
3.박정민, 임진왜란과 여진인 ‘來朝’의 종언, 만주연구 18, 만주학회, 2014, p.23
4.장정수, 선조대 말 여진 번호 로툰(老土)의 건주여진 귀부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 78, 조선시대사학회, 2016, pp.26~27. 음력 4월 29일의 선유 요청 결정에 대한 바는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4월 29일.
5.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5월 23일
6.한성주, 누르하치의 두만강 유역 번호 침탈과 조선의 대응 고찰, 만주연구 22, 만주학회, 2016, p.133
7.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5월 2일
8.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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