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598년 음력 8월 1일, 북병사 이일의 보고가 조정에 올라왔다. 이일은 여진족 수장 로툰이 진고하기를 '올아적(兀阿赤)이 자신을 들어오도록 초치하였으나 자신은 조선을 2백년간 섬겨온 번호라면서 올아적의 초치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로툰이 성을 쌓고 올아적의 공격에 대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1
여기서 말하는 올아적이 누구인지에 관하여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울라의 부잔타이라는 견해이며 또 하나는 건주의 누르하치라는 견해이다.
우선 부잔타이라는 견해는 한성주에 의해 제기된 주장이다. 한성주는 올아적의 '올아'에 집중하여, 올아라는 단어가 '울라'를 지칭한다고 판단했다. 즉,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올아적은 '울라의 수장'을 가리키며 그것은 당시 울라의 버일러였던 부잔타이를 뜻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해당 진고가 올라오기 약 1년여 전부터 부잔타이가 여허와의 연대를 꾀하는 동시에 번호들이 존재하는 두만강 유역에 대해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서 부잔타이가 도르기 비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재차 확보하기 위해 로툰을 초치했다고 판단했다.
당시 부잔타이는 1598년에 누르하치가 안출라쿠를 공격한 이후로 안출라쿠와 도르기 비라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회수했으나, 한성주는 '올아적'이 부잔타이를 뜻한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안출라쿠 공략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번호들을 복속시키려 했다고 보았다.2
다음으로 올아적이 누르하치를 뜻하다고 보는 견해를 살펴보자면, 이는 박정민과 장정수등 다수의 견해이다. 이들은 올아적의 '아적'에 집중하여, 아적이 누르하치를 지칭하는 음역명 '노을가적' 혹은 '노아합적'의 '가적' 혹은 '합적'과 대응되는 단어라고 판단했다.
박정민은 이를 기반으로 로툰이 누르하치에게 이미 직접적으로 복속되었으나 조선을 상대로 기만책을 펼쳤다고 판단했으며,3 장정수는 당시 로툰이 누르하치와 부잔타이, 그리고 조선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에 누르하치가 자신을 복속시키려 한다는 진고를 올려 도움을 요청, 독립성을 유지코자 했다고 보았다.4
두 주장(올아적=부잔타이, 올아적=누르하치)중에서 무엇이 더 가능성이 높느냐면, 후자인 누르하치설이 부잔타이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첫째로, 당시 누르하치 세력은 조선에서 '올호'라고도 칭해졌으며 울라 세력과 확실히 구분되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9월 3일 기사를 살펴보자면 '홀온과 싸워 그들을 익히 아는데, 이제 적을 보면 장갑을 입고 대검을 들고 철기를 타고 달리면서 기휘에 따라 진퇴하는 정상이 홀온과 크게 달라 구황을 살해한 적과 비슷하니, 아마도 올호의 군사가 섞여서 온 듯하다.'라는 문구가 존재한다.5 여기서 말하는 홀온이란 부잔타이의 울라 세력을 일컫는데, 홀온이라는 단어 자체는 울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훌룬'의 조선식 음역어였다.
해당 기사를 살펴보면 홀온(울라)와 올호가 명백히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지칭된 올호란 누르하치의 세력을 일컫는다. '구황을 살해한 적'이라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구황은 1600년 당시 '마적합'이라는 여진 세력을 공격하려던 누르하치군과 로툰군에게 공격을 가했다가 역습을 당하여 전사한 인물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올호란 누르하치의 세력을 일컫는다고 판단할 수 있다.
올호라는 말은 '올아적'과 '올가적'에서 따온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명나라에서 노아합적, 그리고 자국에서는 노을가적이라고 지칭되던 누르하치의 앞글자를 따 그의 세력 혹은 누르하치 본인을 '노호'(奴胡) 또는'노호'(老胡)라고 호칭한 것과 일맥상통한 호칭법이다.
선조수정실록의 선조 36년 음력 8월 1일 기사에도 '아질이가 올호와는 혼인의 친분이 있으니, 반드시 그 군대가 서로 연합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존재한다.6 여기서 언급된 아질이는 '부잔타이'를 지칭한다. 조선에서는 당시 부잔타이의 여진식 호칭중 하나인 '하스후 버일러'에서 명칭을 따와 그를 하질이 혹은 아질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부잔타이는 '올호'와 혼인관계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올호', 그리고 그 기원인 '올아적'은 확실히 부잔타이와 구별된다. 그리고 올호가 지칭하는 대상은 바로 당시 조카딸을 부잔타이에게 시집보낸 상황이었던 누르하치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의 사료에도 위와 같은 근거가 존재한다. 선조 39년 음력 2월 6일 승문원의 관원이 이전의 장계를 언급하며 ‘심처의 휘호 고회가 전하기를 「올추가 모든 추장에게 지시하기를, 조선에서 직첩 1백여 장을 홀온(울라)에게 내어줄 것이라고 하였으니, 내어주었는지의 여부를 상세히 파악하여 전달하라」고 하였다.'는 장계 내용을 이야기하였다. 이어서 올추를 노추(누르하치)와 동일시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로 미루어 보건대 올추(올호, 올아적)=노추(누르하치)로 볼 수 있다.
둘째로, 당시 상황상 부잔타이보다는 누르하치가 로툰을 초치했을 개연성이 훨씬 크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부잔타이는 1597년 말까지 안출라쿠와 도르기 비라(로툰의 세거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으나, 1598년 음력 1월에 있었던 누르하치 세력의 안출라쿠 공략으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안출라쿠 및 그에 인접한 도르기 비라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철회하고 한 발짝 물러났다.
부잔타이가 물러난 것과는 반대로 누르하치는 안출라쿠와 도르기 비라에 대한 영향력을 막 회복하려던 상황이었다. 그런 배경적 상황속에서 '올아적'은 로툰에게 초치를 요구했는데, 그렇다면 '올아적'이란 부잔타이가 아니라 누르하치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런 근거들을 바탕으로 볼 때 '올아적'이란 부잔타이보다 누르하치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본다. 즉, 누르하치는 부잔타이의 침입으로 자신의 영향력이 철거되었던 도르기 비라 지역에 다시 본인의 영향력을 침투시키고 나아가 직접적인 지배까지 노리기 위해 로툰을 초치했으나 로툰은 그에 대해 당장은 응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각주
1.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8월 1일
2.이상 한성주, 조선 선조대 후반 忽剌溫 부잔타이[布占泰]의 침입 양상,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 경계 100, 2016, p.278
3.박정민,임진왜란과 여진인 ‘來朝’의 종언, 만주연구 18, 만주학회, 2014, p.23
4.장정수, 선조대 말 여진 번호 로툰(老土)의 건주여진 귀부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 78, 조선시대사학회, 2016, pp.22~23.
5.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3일
6.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 36년 음력 8월 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