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툰은 16세기 말 도르기 비라의 여진 번호세력의 암반이다. 도르기 비라는 조선의 두만간 인근 동량북 지역을 지칭하는데 로툰의 집안은 그 곳에서 오래토록 세거해 왔으면서 16세기 말 무렵에는 상당히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과 소규모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되어 있다.1
그러나 로툰대에 이르러, 로툰 세력은 본인의 세력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하는 강력한 여진 세력들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자신의 세거 지역에 접근해 오는 상황을 맞닥뜨렸다. 해당세력들은 크게 두 세력으로 정리되는데, 하나는 울라의 부잔타이 세력이었으며 또 하나는 건주의 누르하치 세력이었다.
1590년대 초중엽부터 두 세력은 도르기 비라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로툰은 그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며 본인의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로툰은 누르하치의 여진 통합 정책에 따라 16세기 말에서 17세기 극초기에 건주 세력에 내속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떠했고 언제쯤 직접적으로 복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분석에 따라 그 의견이 다르다. 필자는 여기서 로툰이 언제쯤 건주와 울라의 도르기 비라를 두고 벌어진 알력다툼에 휩쓸렸는지, 그리고 로툰이 언제쯤 두 세력 사이에서의 향배를 확고히 정했는지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로툰에게 먼저 손을 뻗친 것은 누르하치였다. 누르하치는 1589~1594년 사이 샹기얀 알린 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혹은 점령 이후에 안출라쿠와 도르기 비라 지역에도 영향력을 뻗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때 도르기 비라에 세거하던 로툰 역시도 1596년 이전에 누르하치의 간접 지배권 하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외교임무를 통해 건주에 방문한 조선의 차관 신충일은 1595년~1596년 당시 퍼 알라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퍼 알라에 들어온 조공자들 중에서 로툰을 확인했으며, 동시에 로툰이 1595년 음력 12월 무렵 누르하치에게 본격적으로 귀부해왔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퍼 알라의 누르하치 막하 인물들로부터 얻은 증언을 기반으로 한 정보였다.
장정수는 이 기록만으로는 당시 로툰이 누르하치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왔다는 것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당시가 새해 시기이며, 그 탓에 몽골과 여진의 부족장들이 상당한 영향력의 군주로 성장한 누르하치에게 새해 선물을 보내기 위해 사절을 보냈고 로툰 역시 그에 해당할 뿐이라고 해석했다. 즉, 그는 로툰이 이 시기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지 않았으며 그저 단순히 '강력한 군주'와의 외교 관계 유지를 위해 선물을 보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2
하지만 장정수는 건주기정도기 뿐 아니라 후금의 무황제실록과 만주실록상에서 로툰이 1597년 무렵 이미 누르하치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부분을 간과했다. 신충일의 기록뿐 아니라 청측의 사료에서도 로툰이 이 시기 건주의 영향권안에 들어와 있다고 기록된 것이다.
다만 로툰이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신속되진 않았다는 견해는 타당하다. 이 무렵 로툰은 누르하치에게 직접 지배당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후대인 1598년 무렵 북병사 이일이 조정에 올린 보고를 살펴보면 로툰은 1598년 '올아적'의 초치 요구를 거부했다.3 이 초치 요구란 완전히 지배권에 들어오라는 요구였는데, 여기서 로툰에게 그러한 요구를 전달한 '올아적'은 누르하치를 지칭한다.4
박정민은 이 진고에 대해 로툰은 이미 당시에 누르하치의 직접적인 지배권에 들어갔으며, 로툰측이 조선에게 이러한 정보를 전한 것은 조선측에 혼선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판단했으나5 이러한 '혼선 유도' 주장에는 큰 근거는 없다. 그보다는 실제로 로툰이 건주 세력에 완전히 복속되진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로툰은 다른 외부 여진 세력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쌓고 있었다. 그것은 누르하치와 부잔타이등이 자신을 영향력 아래에 두려 하는 것을 경계하여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조선에 현재 본인의 상황을 알리면서 본인의 독립성을 지키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술하겠지만 해당 진고가 안출라쿠 공략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있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로툰은 누르하치의 군대가 도르기 비라 인근에 위치한 안출라쿠를 공격하고 이후 도르기 비라에 세거한 자신에게 퍼 알라에 들어오도록 요구하자, 이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히고 조선에 사실을 밝힘으로서 조선의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로툰은 누르하치와 '직접적인' 상하복종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든 독립을 지키는데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어쨌건, 1596년 시점까지 로툰은 누르하치의 간접적 영향권안에 들어와 있던 상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다가 1597년에 이변이 생기는데. 그 이변이란 부잔타이가 울라의 버일러로 즉위한 이후 도르기 비라와 안출라쿠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점점 접근해 오는 것이었다.
이 때 부잔타이는 도르기 비라의 로툰에게도 역시 손을 뻗었다. 부잔타이는 로툰을 여허와 연결시켜 그들이 여허측에 사절을 보내게 하고 여허의 사신 역시 불러들였다. 그것은 부잔타이가 여허와 연합하기 위해 취한 연계전략의 일환이었다.6 다만 이 시기의 부잔타이 역시 로툰을 직접적으로 복속시켰다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복속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로툰은 위에 서술했다시피 이 무렵에는 본인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했는데, 부잔타이가 본인을 완전히 복속시키려 했다면 필시 충돌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충돌의 정황은 포착되지 않는다.
로툰이 1597년 부잔타이의 영향권에 들어간 이후, 누르하치는 부잔타이가 도르기 비라와 안출라쿠를 향해 자신의 영향력을 침투시키는 것을 좌시하지 않고 자신의 장남 추영과 동생 바야라에게 1천의 군대를 주어 안출라쿠를 공격하게 했다.(1598)7 안출라쿠 공략전 이후 부잔타이의 영향력은 일시적으로 두만강 일대에서 철퇴되었다.
그러나 로툰은 이번에도 역시 누르하치에게 군사적으로 강제로 복속되지 않았다. 이 시기 추영과 바야라가 공격한 대상은 안출라쿠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로툰이 세거하는 도르기 비라 지역은 그들에게 공격당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안출라쿠를 공략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앞서 언급했다시피 로툰에게 '초치'를 시행했다.8 부잔타이가 영향력을 침투시킨 두 지역중 한 곳인 안출라쿠에는 군사적인 공격을 진행했으면서도 다른 한 곳인 도르기 비라의 로툰에게는 초치를 시행한 까닭은 로툰이 그만큼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또한 조선의 요청을 받은 명나라로부터 '조선의 변경 호인들을 공격치 말라'는 선유를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후자의 영향이 더욱 컸을 것이라고 본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조선의 요청을 받은 명나라가 자신의 번호에 대한 행보에 선유를 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또 다시 군사적 행동을 하는 것은 누르하치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다.9
즉, 로툰은 안출라쿠 공략을 통하여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로툰이 누르하치에게 확실하게 복속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은 1600년 조선의 노토부락정토 이후이다. 여기서 '노토부락'이란 로툰의 부락을 의미한다. 1599년 로툰의 산하 암반이던 '명간로'가 조선군과 충돌한 것은 조선이 로툰을 정벌할 명분이 되었다.10 이후 조선 조정은 로툰에 대한 정토를 계획했다. 해당 정토는 1600년서야 시행되었는데, 조선 조정내에서 신중론이 오갔기 때문에 정토의 실행이 연기되다가 1600년 로툰 세력으로 추정되는 세력과 조선군의 부령부사 이간이 재차 충돌을 함으로서 정토가 당위성을 얻고 그대로 실행된 것이다.11
노토부락 정토는 지금껏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로툰이 향배를 확실하게 정하게 했다. 그는 세 세력이 모두 자신에 대해 견제하거나 혹은 흡수코자 하는 상황에서 결국 이 이상으로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파악하고, 당시 본인에게 가장 가까웠던 누르하치에게 신속키로 결정했다. 누르하치는 로툰의 결정을 환영하고 그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그것으로 로툰의 세력은 누르하치의 협조를 받게 되었으며, 누르하치 역시 로툰의 귀부를 통하여 두만강에 대한 본인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반을 마련했다. 로툰의 누르하치에 대한 합류는 로툰으로서는 옳은 선택이었다.
이후 로툰은 누르하치에게 합류했다가 다시 조선 변경으로 돌아오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나 그것이 누르하치와의 연대를 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툰은 1600년 이후로 완전히 누르하치의 산하 세력으로서 행동했고, 후금이 건국된 뒤에도 그의 가문은 후금에 내속되어 고위 팔기 가문으로 자리잡았다. 로툰은 후대에는 '오대신'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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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 선조 25년 음력 7월 1일
2.장정수, 선조대 말 여진 번호 로툰(老土)의 건주여진 귀부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 78, 조선시대사학회, 2016, p.23
3.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8월 1일
4.한성주는 올아적에 관하여 부잔타이라는 견해를 내비쳤다. 한성주, 조선 선조대 후반 忽剌溫 부잔타이[布占泰]의 침입 양상, 역사와경계 100, 부산경남사학회, 2016, p.278.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올아적은 누르하치를 지칭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5.박정민, 임진왜란과 여진인 ‘來朝’의 종언, 만주연구 18, 만주학회, 2014, p.23
6.만주실록 1597년 기사
7.만주실록 1598년 음력 1월
8.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음력 8월 1일
9.해당 선유에 대해서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3511660를 참고해도 좋다.
10.조선왕조실록 선조 32년 3월 28일
11.조선왕조실록 선조 33년 4월 8일. 선조수정실록에는 부령부사 이간과 충돌한 적호가 확실하게 로툰으로 서술되나, 장정수는 이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했다.
12.오대신은 흔히 누르하치의 다섯 공신들, 후르한, 어이두, 안피양구, 호호리, 피옹돈 다섯명으로 정립되나 이들 외에도 오대신으로 지칭되는 이들이 존재한다. 명목상 다섯명이지만 누르하치의 의향에 따라 추가 인원이 배정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