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누르하치는 1589년 건주 내부에 존재하던 저항 세력들을 완전히 일소시킨 뒤 명실상부히 건주를 통일했다. 이후 누르하치는 세력의 확장을 위해 새로운 공략 대상을 찾았다. 머지 않아 누르하치는 그 대상을 찾아냈다. 누르하치가 꼽은 공략 대상은 당시 자잘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던 샹기얀 알린 부(šanggiyan alin aiman, 백두산부)였다. 샹기얀 알린 부에 소속된 세 개의 '골로' 중에서 누르하치의 첫 번째 공략 대상이 된 것은 가장 자잘하게 나뉘어져 있던 얄루강 골로(온하위)였다.
1589년부터 시작된 누르하치의 얄루강 골로에 대한 공략은 1591년에 표면적으로 마무리 되었다.1 그러나 1591년에 얄루강 골로가 누르하치의 세력 영향권 안에 편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얄루강 골로가 그 시기서부터 누르하치 세력에 완전히 흡수된 것은 아니었다. 즉, 1591년에 얄루강 골로의 부락들이 누르하치에 의해 복속되고 그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긴 하나 그들은 여전히 누르하치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지 않았으며 얼마간 반독립적인 상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1591년 무렵의 얄루강 골로는 일종의 간접적 지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얄루강 골로의 암반(영주, 추장)들은 누르하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선군과 충돌하기도 했으며, 덩달아 부락민들의 경우 누르하치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월경을 시도하여 조선의 영역 내로 들어가 몰래 채삼을 하기도 했다. 1594년 얄루강 골로의 추장 김왜두가 일으킨 자작보, 구비도, 가을파지보, 감파보 습격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2 이는 누르하치의 의도와는 대치된 것이었기에 누르하치로서는 1595년 김왜두가 약탈한 조선인들을 '사들여' 조선에 쇄환하는 한 편으로, 조선측에 당시 양측간 빈번히 존재하던 월경 문제에 대한 해결 협의와 통교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누르하치가 얄루강 골로를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그 통제가 실효를 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필자가 이전에 올렸던 글중 하나인 '1594년 음력 3~4월 여진 세력의 함경남도 습격과 그 주체'에서 간접적으로 다루었듯, 필자는 1594년서부터 누르하치의 얄루강 골로 직접 통제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후 1595년에서 96년 사이에 그 통제가 전방위적으로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판단한다.
1593년 음력 9월 이전 시점까지, 누르하치는 여허를 중심으로 한 반(反) 건주 연합군과 위태로운 대치 상황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얄루강 골로 쪽에 대하여 큰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얄루강 골로는 같은 '샹기얀 알린 부'에 속한 주셔리 골로와 너연 골로에 인접하고 있었다. 주셔리와 너연은 모두 여허와 연대하고 있으면서 누르하치를 적대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본거지인 건주 본토를 지키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고 덕택에 적지에 둘러쌓이다시피한 얄루강 골로는 상대적으로 뒷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누르하치는 당해 9월 코르친과 시버, 구왈차까지 가세하여 총 9개 세력으로 구성된 자신에 대한 9부 연합군을 구러산에서 대패시키고 세력구도를 안정시킨다. 이후 누르하치는 당해 10월 자신을 적대하던 주셔리 세력을 항복시켰고 이듬해 음력 1~2월에는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너연 역시도 병합한다.3
너연 병합을 마지막으로 샹기얀 알린 부에 소속된 모든 골로가 누르하치의 세력권 안에 들어왔다. 누르하치는 너연을 병합한 직후에 자신이 그 동안 신경쓰지 못하고 얼마간 '간접적 지배'하에 두고 있던 얄루강 골로에 대해서 직접적인 통제를 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샹기얀 알린 부가 모두 지배권 안에 들어와 얄루강 골로 흡수에 대한 변수가 사라진데다가, 여허, 울라등의 적대 세력들이 구러산에서 대패한 통에 한동안 자신에게 절대 공세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 없었기에 얄루강 골로를 흡수할 시간을 벌었기 때문으로 유추된다.
누르하치가 조선에 보낸 서신에 대한 회답차, 그리고 그에 겸하여 누르하치의 정확한 거취를 파악코자 퍼 알라에 파견되었었던 신충일이 작성한 건주기정도기를 살펴보면, 1596년 음력 1월 5일 무렵 신충일은 '지난 해 김왜두가 남변을 습격한 때가 도독(누르하치)이 단속한 처음'이라고 발언했다. 신충일의 해당 발언은 비록 1596년 초에 있었으나 여기서 말하는 '지난 해'란 1595년이 아니라 1594년이라고 보아야 한다. 김왜두가 남변, 즉슨 함경남도를 습격한 것은 1594년이며 1595년에는 김왜두의 남변 습격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
김왜두는 얄루강 골로에 속하는 추장중 한 명이었는데, 김왜두에 대한 통제가 처음으로 시작된 때가 바로 1594년이라는 것을 통해서 누르하치가 얄루강 골로에 대한 통제를 1594년부터 시작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1594년부터 얄루강 골로에 대해 직접적인 통제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초창기의 통제 정도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던 김왜두의 함경남도 습격 사건 자체가 누르하치의 얄루강 골로 통제가 직접적으로 시작된 이후에 누르하치의 통제가 무시된 채 발생한 일이었다.
하지만 감파보 습격이 발생한 이후 더 이상 얄루강 골로가 조선군을 습격하지 않은 정황을 보건대 해당 사건이 벌어진 뒤 누르하치는 얄루강 골로의 암반(영주, 추장)들이 무단으로 조선군과 교전치 않도록 강하게 단속한 것으로 판단된다.5이는 누르하치가 얄루강 골로의 '암반', 즉슨 '지배층'에 대한 통제를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얄루강 골로 소속의 피지배층, 백성들의 소규모 무단행동들은 여전히 빈번히 발생했다. 특히 1595년 음력 7월에는 얄루강 골로 세거자들로 추정되는 여진인들이 월경하여 위원에서 인삼을 채집하다가 수십명이 살상당하는 '위원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누르하치에게 얄루강 골로에 대한 전체적인 통제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확실한 전방위 통제 의지가 존재했다. 1595년 당시 누르하치가 조선에 지속적으로 '양측 인민의 범월 문제에 대한 협의' 서신을 보낸 것이 그 근거이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얄루강 골로의 인민들은 본인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 조선 영내로 들어가는 행태를 당분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국 공격'과 같은 '지배층에 의한 무단행동'과는 달리 수명~수십명 단위의 밀월경과 같은 '피지배층, 인민의 무단행동'은 당시 건주의 역량으로 모두 단속하기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컨대 누르하치의 얄루강 골로에 대한 통제는 1595년 중엽까지는 지배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누르하치가 조선에 월경자들을 죽이지 말고 체포후 돌려보내달라는 요청을 한 이유중 하나이기도 했다. 본인 차원에서의 전방위 단속이 어렵기에 조선과의 협정을 통해 최소한 범월적발자들을 돌려받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1595년에 터진 위원 사건은 결정적인 변화의 중심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수십명의 자세력 인민들이 살해당한 대형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외교적 파장을 직접 체감함으로서 얄루강 골로 통제를 보다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 이 시기를 전후해 누르하치는 얄루강 골로에 대한 통제를 급하게 점검하고 또 실제적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위원 사건 이후에 퍼 알라를 방문한 신충일은 퍼 알라의 외교실무자인 마신과의 대화에서 '국경에 성을 쌓아 여진인 범월자들을 직접 관리토록 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다.7 누르하치의 회첩에도 역시 그와 비슷한 제안이 쓰여 있었다. 이 이후 누르하치는 실제로 혜산 건너편에 성을 쌓아 조선 국경에 몰래 들어가려는 여진인들을 감독코자 했다.8
또한 이 이후 조선에 귀순한 여진인들이 말하기를 누르하치가 조선의 금단지역에 들어가서 채삼을 하는 이들은 사형하겠다고 포고했다는 사실 역시 조선에 전해졌다.9이는 누르하치의 얄루강 골로에 대한 통제가 강해졌음을 시사한다.
한편 얄루강 골로내의 피지배층, 주션들에 대한 통제와는 별개로 얄루강 골로의 암반들은 1595년 중엽에 이미 누르하치의 명령을 상당히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신충일은 1595년 음력 12월 말에서 음력 1월초 사이, 얄루강 골로 소속의 장수와 병사들이 누르하치의 명령을 완벽히 따르고 있는 사실을 파악했다. 예컨대 신충일은 얄루강 골로의 암반 강구리의 손자 보하하(甫下下)가 누르하치의 명령에 의해 퍼 알라에 본인의 군대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가 자신이 도착하기 직전쯤 떠났다는 사실, 같은 얄루강 골로 소속의 동타부(童打夫)도 함께 와서 약 7개월여간 주둔하다 철수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신충일의 퍼 알라 방문으로부터 7개월 전이라 함은 위원사건보다 이전으로서, 이미 위원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누르하치가 얄루강 골로의 '암반', 즉슨 지배층에 대해 강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이다.10
결론적으로, 누르하치는 얄루강 골로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1594년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1595년 까지 그 통제는 '지배층'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1595년 위원 사건을 계기로 얄루강 골로에 대한 통제가 전방위적으로 강화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1595년 말~1596년 이후에는 누르하치의 광범위한 얄루강 골로 통제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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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조선왕조실록 선조 22년 7월 12일, 만주실록 1591년 기사
2.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음력 4월 4일
3.만주실록 1593년 음력 10월, 1593년 음력 윤 11월 기사
4.신충일이 김왜두의 습격을 '지난 해'라고 말한 것은 당시가 해가 넘어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에신충일이 시기를 착오한 것으로 보인다.
5.조선의 남병사 최호가 가을파지 인근에 개시를 연 것 역시 얄루강 골로의 습격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이유이나, 누르하치의 통제 역시 이유중 하나이다.
6.1595년 누르하치의 서신은 공식적으로 음력 4월과 음력 7월에 발송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4월 14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7월 25일.
7.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1월 30일
8.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3월 25일
9.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8월 14일
10.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1월 30일. 신충일, 건주기정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