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칼부림 中, 용호장군검을 들고 있는 누르하치)
용호장군(龍虎將軍)이란 명나라 관제상 2품관직에 해당하는 명나라 무관직이다. 해당 직위는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하사되기도 했으나, 몽골이나 여진 세력의 수장들 중 명나라에 협조하거나 혹은 명나라와 협약을 맺고 일정 범주 내에서 통제되던 수장들에게 조정 차원에서 하사되기도 한 직위이다. 해당 직책의 수여를 통해 명나라는 수여대상들에 대한 통제력을 보다 강화할 수 있었고 수여대상자들은 명나라의 직첩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요컨대 해당 직위의 하사를 통해 명나라와 여진, 몽골 수장들은 모두 이득을 보았다.
16세기 여진족중에서는 하다의 완 한과 누르하치가 대표적인 수여대상이었다. 그런데 누르하치가 최초로 용호장군의 직함을 수여받은 시기는 도독첨사를 수여받은 시기와는 달리 확실치 않다. 도독첨사의 직함을 받은 시기는 신종실록에 1589년으로 확실하게 명기되고 청사고 태조본기에도 1589년에 기록된 반면 누르하치가 용호장군에 최초로 임명된 시기는 사료마다 그 시기가 다를 뿐더러 가장 중요한 명실록 역시 여러 판본중 이에 관한 기사를 수록한 판본이 제한되어 있어서 개인 연구자로서는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번 글에서는 누르하치가 용호장군의 직함을 언제 받았는지 사료나 연구자들간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많은 사료들 중에서, 누르하치가 용호장군 직함을 수여받은 시기를 가장 이르게 서술한 것은 조선의 산성일기라고 할 만하다. 해당 사료에서는 만력 17년에 누르하치가 용호장군에 봉해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해당 사료의 서술은 서술자의 착오로 인한 명백한 오류이다. 만력 17년(1589년)은 누르하치가 도독첨사 직위를 수여받은 시기로서 이 때에 용호장군 직함을 함께 받을 수는 없었다. 서술자는 도독첨사의 수여 시기와 용호장군의 수여 시기를 착오하여 해당 서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이른 사료는 청의 누르하치 관련 실록들, 즉슨 무황제실록, 고황제실록, 만주실록 삼실록(三實錄)이다. 해당 사료들은 모두 만력 19년(1591년)에 이미 누르하치가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의 관직을 받은 상태라는 것을 누르하치의 툴더이와 니카리를 향한 발언을 기반으로 삼아 간접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최소자는 이를 근거로 누르하치가 1591년에 용호장군의 직함을 받았다고 추정했다.1
청측 사료들의 서술, 즉슨 1591년 이전 혹은 1591년에 누르하치가 이미 용호장군의 직함을 받았다는 서술은 일견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누르하치에 관하여 그 어떤 국가 사료보다도 정확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해당 사료가 구조적 함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누르하치가 1591년, 혹은 그 이전부터 용호장군이었다는 청태조실록의 서술은 무척이나 교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해당 부분은 사실의 객관적 기록이 아니라 그저 누르하치의 발언 기록이다. 사료상의 개인의 발언이란 진실일수도 거짓일수도 있다. 그런데 실록은 해당 발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서술치 않고 그저 누르하치가 여허의 사신들에게 이러한 발언을 했다는 것만을 기록함으로서 사료의 독자가 누르하치가 이 때에 이미 용호장군이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실제로 해당 사료에서 누르하치가 용호장군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다. 누르하치는 당시 여허로부터 외교적 압박을 받고 있었고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에게 파견된 여허의 사신들에게 자신과 명나라의 관계를 강하게 강조하였다. 그 강조에서 자신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과장하기 위해 자신이 명으로부터 받은 관직을 과장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즉, 청측 실록에 존재하는 1591년의 누르하치의 발언, '명으로부터 용호장군의 직함을 받았다'는 발언은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몇몇 사학자들은 청측의 사료보다 조금 더 늦은 1593, 1594년을 특정하기도 한다. 박정민은 본인의 논고에서 누르하치의 용호장군 직함 수여 시기를 1593년으로 비정했으며2 신청사학파 청사학자인 로스키, 그리고 원로 사학자 염숭년은 1594년을 비정했다.3 이 두 추정시기는 아마도 1595~96년 퍼 알라에 다녀온 조선의 관원 신충일이 본인의 보고서에 용호장군의 임기가 10년이라고 서술한 것, 그리고 누르하치가 1604년에 재차 용호장군의 직함을 받은 것4을 근거로 삼은 추정인 듯 하다. 그러나 이런 계산은 확실하다고 볼 수 없다.
(누르하치가 용호장군에 봉해지면서 명나라로부터 수여받은 검이다. 한국에서도 한 차례 전시전을 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들 수 있다. 누르하치에게 직함을 내린 명나라의 실록을 살펴보면 이 시기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것이야말로 정론이다. 그러나 명의 실록에서도 해당 부분을 찾는 것은 무척 힘들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했듯 명실록의 판본들은 여러가지인데 그 판본들중에서 누르하치의 용호장군 수여 기록을 찾을 수 있는 판본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41년에 최초로 현대적으로 영인된 명실록인 강소국학도서관영인(江蘇國學圖書館影印) 속칭 양홍지영인본(梁鴻志影印本)에서는 누르하치가 용호장군 직함을 수여받았다는 직접적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 보관중인 내각문고본에서는 해당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내각문고본 명신종실록은 1595년, 즉슨 만력 23년을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 직함이 수여된 시기로 특정하고 있다.5 해당 시기는 조선의 파견관원 신충일이 당시 누르하치의 거점 퍼 알라에 다녀온 뒤(1596) 본인의 보고서한 및 건주기정도기에 누르하치가 용호장군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고 서술한 것과 상충되지 않는 최대 한계선 시기이기도 하다.
대만 타이페이의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가 1966년 간행한 명신종실록에서도 1595년 누르하치가 용호장군을 받았다는 내용이 확인된다고 한다.6복수의 판본에서 이러한 용호장군 언급이 나온다면 아마도 누르하치는 1595년에 용호장군에 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로 말미암아 현대에는 누르하치가 용호장군의 직함을 받은 시기를 1595년으로 추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요컨대 '대세설'이라고 볼 수 있다. 누르하치가 용호장군 직함을 수여받은 시기를 확실히 명기한 현대 학술서적들 대부분은 1595년을 표기하고 있는데, 위의 사료들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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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최소자, 명청시대 중한관계사 연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1997, p.297.
2.박정민, 임진왜란과 여진인 내조의 종언, 만주학회, 만주연구 18, 2014, p.8.
3.Evelyn S. Rawski, Early Modern China and Northeast Asia, 2015, p.65.
4.청사고 본기1 태조본기
5.歷史教育論集 18, 慶北大學校師範大學歴史科,1993, p.149.
6.陳捷先, 滿清之晨: 探看皇朝興起前後, 2019, p.153. 다만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의 경우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와 MOU 계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서비스하는 명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는 누르하치의 용호장군 임명 시기에 관한 정확한 기록을 발견하기 힘들다. 이는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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