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는 1586년 음력 7월, 자신의 원수 니칸 와일란이 기거하고 있다는 올혼으로 군대를 몰고가 그 곳을 함락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그 곳을 샅샅이 수색했음에도 니칸 와일란의 그림자조차도 발견치 못했다.
분노한 누르하치는 자신의 분을 풀기 위해 올혼성 전투를 통해 자신이 사로잡은 한족 포로 19명을 처형하고, 나머지 6명에게는 상해를 입힌 뒤 그들에게 "자신의 앞에 니칸 와일란을 데려오라고 명나라에 전하라."고 통고하고서는 그들을 명나라로 보냈다.1
석방된 포로들은 명나라 변경 수비대에 해당 소식을 전했다. 명측은 해당 소식을 듣고서는 누르하치에게 '니칸 와일란은 내주지 못한다'고 전하였으며 대신 누르하치가 니칸 와일란을 죽이는 것을 사실상 방조하겠다는 연락을 보내어 그가 니칸 와일란을 죽이게끔 하였다.2
여진-청사학자 김선민은 해당 기록이 청태조고황제실록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청의 사관들에 의해 다소 미화되었다고 추정하였다. 그는 청태조무황제실록3 한문본의 해당 사료 기사 중 올혼성의 한족 19명을 죽였다는 부분[城內所有漢人十九人]에 '所有'라는 구절이 존재하지만, 무황제실록보다 후대에 편찬된 태조고황제실록 한문본의 같은 날짜 기사의 같은 부분에는 해당 구절이 빠진 것을 주목했다.4
김선민은 '所有'를 '모두'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태조무황제실록에는 '所有'가 있고 고황제실록에는 '所有'이 없는 것을 근거로 하여 태조무황제실록에는 누르하치가 성안의 한족들을 모두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비해 태조고황제실록에는 '모두'가 빠지고 단지 한족 19명을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이는 태조고황제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이 누르하치의 기록을 미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해당 주장은 진첩선의 논문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고황제실록이 미화의 성격이 강한 사료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미화를 하지 않은 것 같다.
한문사료가 아닌 만문사료를 보자면 사실 올혼성에는 25명의 한족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그 중 19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6명은 신체적 상해를 가했으되 명나라 변경 수비대에 자신의 요구를 전하라는 지시를 내리고선 풀어주었다.5즉 누르하치는 원래부터 올혼의 한족들을 모두 죽인 것이 아니었으며, 총 25명의 한족이 있던 올혼성에서 19명의 한족을 죽이고 6명을 풀어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모두'라는 표현이 사라졌다고 하여 그것을 미화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사료들을 참조하여 단적으로 비교해보자.
A.태조무황제실록을 기반으로 만ㅡ한 사료를 살펴보자면 누르하치의 한족 포로 살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누르하치는 올혼성에 가서 19명의 한족 포로를 모두 죽였다.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한족) 포로 6명에게는 그 화살촉을 상처에 깊게 박는 형벌을 내린 뒤 명나라에 가서 니칸 와일란을 데려오라는 자신의 요구를 전하게 했다.]
B.태조고황제실록을 기반으로 만ㅡ한 사료를 살펴보자면 누르하치의 한족 포로 살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누르하치는 올혼성에 가서 19명의 한족 포로를 죽였다.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한족) 포로 6명에게는 그 화살촉을 상처에 깊게 박는 형벌을 내린 뒤 명나라에 가서 니칸 와일란을 데려오라는 자신의 요구를 전하게 했다.]
모두 라는 말이 빠졌으나 내용상 차이는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누르하치가 올혼을 공격할 당시 올혼에 있던 한족들이 19명에 불과했고, 누르하치가 그 포로들을 모조리 죽였다면 '모두'라는 말이 빠지고 19명을 죽였다는 서술로 개변된 것이 '미화'로 인식될 수 있겠으나 뒤에 언급되는 6명의 석방 포로들이 한족이므로 누르하치는 처음부터 올혼에 있던 한족포로들을 모두 죽인 것이 아니게 된다. 즉, 태조고황제실록의 해당 부분 서술은 미화보다는 내용의 요약 혹은 문장 다듬기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다만 누르하치의 올혼성 포로 살해와 관련한 부분의 미화가능성 및 이의제기와는 별개로, 태조고황제실록이 누르하치의 언행등을 미화하고 윤색한 것은 사실이다.
1.이로 미루어 볼 때에 누르하치는 포로들을 통해 니칸 와일란이 또 다시 명나라로 도피했음을 파악한 듯 하다.
2.청태조고황제실록 1586년 음력 7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 청태조무황제실록 동년 동월
3.청태조 누르하치에 대한 최초 실록
4.城內所有漢人十九人이라는 내용은 현재 인터넷에 존재하는 태조무황제실록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무황제실록 역시 몇 번의 개수를 거쳤기 때문에 각 판본마다 내용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당 문장 기술은 진첩선의 滿文清實錄硏究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무황제실록 개수본은 [城內有漢人十九名,亦殺之/성안에 있던 한족 열아홉명을 모두 죽였다]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개수되기 전과 내용상 차이는 크게 없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무황제실록 사료는 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839200 참조
5.무황제실록 한문본을 비롯한 한문사료들에는 해당 6명이 한족이라는 내용이 보이지 않으나(무황제실록 : 鵝兒渾城內有漢人十九名,亦殺之. 又捉中箭傷者六人. 고황제실록 : 斬城內漢人十九人。又執被箭者六人으로서 19명의 한인 뒤의 6명은 한인이라는 직접적인 서술이 보이지 않는다.)무황제실록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데에 주력한 만주실록의 '만문본'을 살펴보자면 그들 6명이 한족임이 명시되어 있다. 한문본과 만문본 중 어느쪽이 더 원본에 가까운지를 생각해보자면 만문본의 서술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
오류지적 환영.

(IP보기클릭)221.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