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가를 택한 혜경궁 홍씨 (2002.04.23)
홍씨 소녀는 불과 아홉 살 때 세자빈에 간택됐지만 자기 임무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이 언니의 혼수를 헐면서까지 간택에 임하게 한 것은 낙과(落科)를 거듭한 인생의 전환을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과연 간택 다음해 홍봉한은 별시에 합격해 국왕의 사돈이 된 혜택을 만끽했다.
장인의 합격사실을 알려주며 기뻐할 때만 해도, 사도세자는 장인이 정적으로 등장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혜경궁 홍씨(1735∼1815)는 세자가 대리청정한 지 3년째인 1752년(영조 27)에 정조를 낳아 지위를 튼튼히 했고, 홍봉한은 고속승진을 계속했다.
혜경궁은 부친을 따라 노론 당인이 되었는데, 세자빈이란 위치는 당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자가 점차 반노론, 친소론의 정치성향을 갖게 되면서 행복한 날은 끝났다.
영조 31년 나주 벽서사건은 소론 온건파의 제거와 탕평책의 붕괴를 뜻했고, 소론을 지지하는 세자는 고립되어갔다. 급기야 노론은 세자 제거를 당론으로 확정했다.
노론 영수 홍봉한은 세자빈에게 당론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세자 대신 세손(정조)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세자 제거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녀는 세자에게 가는 정보를 통제하고, 세자에 대한 정보를 노론에 제공했다.
‘한중록’에서 그녀는 영조의 연설(筵說:경연 중에 한 말)이 사도세자에게 들어가기 전에 특정한 부분을 고치거나 “(자신이)내관에게 친히 말해 빼버리게 하고 이 사연을 선친께 기별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혜경궁에게 세자는 정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냉혹하게 수행했다.
안팎으로 고립된 세자가 후견자로 택한 인물이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였던 점은 세자 부부의 비극적 관계를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조재호는 형수 효장세자 빈의 오빠였던 것이다.
홍봉한·홍계희 등 노론영수들은 노론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羅景彦)을 매수해 세자를 역모로 고변하는 승부수를 던진다.
고변을 들은 영조는 “오늘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부당(父黨:영조의 당)·자당(子黨:세자의 당)이 됐다”고 한탄한다.
사도세자 사건의 본질을 말해주는 사례다.
세자는 장인뿐만 아니라 아내인 혜경궁까지 자신을 제거하는데 가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자가 학질을 핑계로 죽음에서 벗어나려 세손의 휘항(揮項:방한모)을 요구하자 혜경궁은 세손 것은 작다며 당신 것을 쓰라고 대답했다.
이에 세자는 “자네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세손 휘항을 안 씌우려는 심술을 알겠네”라고 말한다.
영조에게 ‘뒤주’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인물은 홍봉한이었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신음하는 여드레 동안 혜경궁은 세자를 구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급해진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조재호를 부른 사실을 홍봉한에게 알렸다.
“한쪽 사람들(노론)이 모두 세자에게 불충했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게 만든 것이다.
혜경궁은 자신의 아들인 세손에게 위협이 몰리자 당과도 맞섰다.
뒤주에서 죽은 세자의 아들에게 대권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한 노론은 세손 제거를 당론으로 정했다.
크게 반발한 혜경궁은 세손 제거 작업을 주도하는 숙부 홍인한에게 편지를 보내 중지를 요구했고, 당내에 상당한 지분이 있는 혜경궁의 반발은 노론의 일사분란한 당론 집행을 어렵게 했다.
혜경궁의 의도대로 1776년 정조는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친과는 다른 정견을 갖고 있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즉위 일성과 함께 정조는 부친 비극의 단죄에 나섰는데 이는 곧 외가에 대한 공격을 뜻했다.
정조 즉위 직후 동부승지 정이환(鄭履煥)이 홍봉한과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홍봉한의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군신 상하가 편히 먹고 잘 수 없다”고 가세했다.
홍인한과 정후겸 등은 사형 당하고 김귀주 등은 유배가는 등 과거사 청산작업이 수행되었다.
혜경궁은 이런 청산작업 속에서 부친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자궁(慈宮)께서 요즘 수라를 드시지 않고 침수(寢睡·잠자리)가 편치 못하다”는 정조의 말대로 그녀는 아들을 상대로 단식투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혜경궁의 친정은 완벽하게 몰락했고, 재위 24년 만에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하자 비로소 친정 재건에 나섰다.
그녀는 사도세자 사건을 자신과 가문의 자리에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중록’을 저술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정조가 자기 칠순(갑자년) 때 친정을 복권 시키기로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조의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달리 아무도 없었다.
갑자년에 친정을 신원하려는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은 정신병자인 세자와 정신병자에 가까운 이상성격자 영조 사이의 충돌의 결과이지 자신의 친정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한중록’의 메시지는 후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역사에 던진 그녀의 마지막 승부수는 성공한 셈이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정조가 뒤주에서 죽음을 맞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의 융릉.
~~혜경궁 홍씨(惠慶富 洪氏, 1735∼1815)~~~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비(妃).
영풍부원군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임.
9세 때인 1744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자 혜빈(惠嬪)에 추서됨.
후에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 남편이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敬聽王后)로 추존.
1795년,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한중록이라는 자서전적인 수필로 남겼음.
홍씨 소녀는 불과 아홉 살 때 세자빈에 간택됐지만 자기 임무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이 언니의 혼수를 헐면서까지 간택에 임하게 한 것은 낙과(落科)를 거듭한 인생의 전환을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과연 간택 다음해 홍봉한은 별시에 합격해 국왕의 사돈이 된 혜택을 만끽했다.
장인의 합격사실을 알려주며 기뻐할 때만 해도, 사도세자는 장인이 정적으로 등장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혜경궁 홍씨(1735∼1815)는 세자가 대리청정한 지 3년째인 1752년(영조 27)에 정조를 낳아 지위를 튼튼히 했고, 홍봉한은 고속승진을 계속했다.
혜경궁은 부친을 따라 노론 당인이 되었는데, 세자빈이란 위치는 당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자가 점차 반노론, 친소론의 정치성향을 갖게 되면서 행복한 날은 끝났다.
영조 31년 나주 벽서사건은 소론 온건파의 제거와 탕평책의 붕괴를 뜻했고, 소론을 지지하는 세자는 고립되어갔다. 급기야 노론은 세자 제거를 당론으로 확정했다.
노론 영수 홍봉한은 세자빈에게 당론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세자 대신 세손(정조)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세자 제거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녀는 세자에게 가는 정보를 통제하고, 세자에 대한 정보를 노론에 제공했다.
‘한중록’에서 그녀는 영조의 연설(筵說:경연 중에 한 말)이 사도세자에게 들어가기 전에 특정한 부분을 고치거나 “(자신이)내관에게 친히 말해 빼버리게 하고 이 사연을 선친께 기별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혜경궁에게 세자는 정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냉혹하게 수행했다.
안팎으로 고립된 세자가 후견자로 택한 인물이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였던 점은 세자 부부의 비극적 관계를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조재호는 형수 효장세자 빈의 오빠였던 것이다.
홍봉한·홍계희 등 노론영수들은 노론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羅景彦)을 매수해 세자를 역모로 고변하는 승부수를 던진다.
고변을 들은 영조는 “오늘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부당(父黨:영조의 당)·자당(子黨:세자의 당)이 됐다”고 한탄한다.
사도세자 사건의 본질을 말해주는 사례다.
세자는 장인뿐만 아니라 아내인 혜경궁까지 자신을 제거하는데 가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자가 학질을 핑계로 죽음에서 벗어나려 세손의 휘항(揮項:방한모)을 요구하자 혜경궁은 세손 것은 작다며 당신 것을 쓰라고 대답했다.
이에 세자는 “자네가 참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세손 휘항을 안 씌우려는 심술을 알겠네”라고 말한다.
영조에게 ‘뒤주’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인물은 홍봉한이었다.
세자가 뒤주에 갇혀 신음하는 여드레 동안 혜경궁은 세자를 구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급해진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조재호를 부른 사실을 홍봉한에게 알렸다.
“한쪽 사람들(노론)이 모두 세자에게 불충했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게 만든 것이다.
혜경궁은 자신의 아들인 세손에게 위협이 몰리자 당과도 맞섰다.
뒤주에서 죽은 세자의 아들에게 대권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한 노론은 세손 제거를 당론으로 정했다.
크게 반발한 혜경궁은 세손 제거 작업을 주도하는 숙부 홍인한에게 편지를 보내 중지를 요구했고, 당내에 상당한 지분이 있는 혜경궁의 반발은 노론의 일사분란한 당론 집행을 어렵게 했다.
혜경궁의 의도대로 1776년 정조는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모친과는 다른 정견을 갖고 있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즉위 일성과 함께 정조는 부친 비극의 단죄에 나섰는데 이는 곧 외가에 대한 공격을 뜻했다.
정조 즉위 직후 동부승지 정이환(鄭履煥)이 홍봉한과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홍봉한의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군신 상하가 편히 먹고 잘 수 없다”고 가세했다.
홍인한과 정후겸 등은 사형 당하고 김귀주 등은 유배가는 등 과거사 청산작업이 수행되었다.
혜경궁은 이런 청산작업 속에서 부친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쏟았다.
“자궁(慈宮)께서 요즘 수라를 드시지 않고 침수(寢睡·잠자리)가 편치 못하다”는 정조의 말대로 그녀는 아들을 상대로 단식투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혜경궁의 친정은 완벽하게 몰락했고, 재위 24년 만에 정조가 죽고 손자 순조가 즉위하자 비로소 친정 재건에 나섰다.
그녀는 사도세자 사건을 자신과 가문의 자리에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중록’을 저술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정조가 자기 칠순(갑자년) 때 친정을 복권 시키기로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조의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달리 아무도 없었다.
갑자년에 친정을 신원하려는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비극은 정신병자인 세자와 정신병자에 가까운 이상성격자 영조 사이의 충돌의 결과이지 자신의 친정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한중록’의 메시지는 후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역사에 던진 그녀의 마지막 승부수는 성공한 셈이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정조가 뒤주에서 죽음을 맞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의 융릉.
~~혜경궁 홍씨(惠慶富 洪氏, 1735∼1815)~~~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비(妃).
영풍부원군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임.
9세 때인 1744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자 혜빈(惠嬪)에 추서됨.
후에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 남편이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敬聽王后)로 추존.
1795년,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한중록이라는 자서전적인 수필로 남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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