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文武王 陵碑文에 신라 金氏王族은 匈奴族인
소호김천씨 투후 休屠王의 태자 金日(김일제)의
7대손으로부터 유래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여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며, 김일의 7대손이
김알지라고 보는 견해와 미추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는 위의 기록이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일의 생존연대는 기원전 134-86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로부터 7대이후라면, 한세대를 25년으로 보고
김일이 2,30대에 자녀를 출산했다고 가정할 때,
기원후 61-71년이 되어 김알지의 탄생년도,
기원후 65년(탈해왕 재위시대)와 일치한다.
이로 보아 김일의 7대 후손은 김알지로 추정된다.
그런데, 김알지의 탄생설화에 금성 서쪽숲, 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 탈해왕이 호공을 보내 알아보고,
김알지를 얻어 키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이 始林이 경주지역내가 아니라 대구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닭이 우는 소리라는 표현은 대구의 옛이름,
달구벌의 달구와 닭의 달구를 연계,
김알지의 대구로 부터의 도래를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대구지역은 고조선 또는 예국의 후예로 보여지는
徐씨들이 기원전 2-3세기에 고조선 강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이동, 여주, 이천지역을 거쳐
土城을 남기면서 일찍이 기착한 지역이다.
이들 은 달성을 쌓았으며, 대구의 옛이름
달구벌(달+기+벌= 山+城+벌)도 이 土城에 서 기인한다.
일부의 서씨들은 경주지역으로도 이동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徐羅伐이라는 경주의 옛이름에서
`나`는 나라, `벌`은 마을 또는 땅으로 풀어보면, `
서씨의 나라`로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漢武帝가 흉노를 격파하고 사로잡은 흉노족의 태자,
김일이 한무제의 총애를 받고, 김씨성을 하사받아
그 일족이 권세를 유지하다, 王莽의 득세후
반대파로서 대거 축출될 때, 그 한 一族이 동해안을 거쳐
徐씨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대구지방에 정착한 후,
김알지때에 경주지방으로 진출해 서서히
권력을 잡은 뒤, 味鄒때에 이르러
왕권을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제와 김알지의 이름도 매우 유사하여
어떠한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제가 김씨성을 하사받기 전의 성은
모(募또는牟)씨로 추정되는데,
이는 법흥왕이 김씨로 기록되기전,
관련자료에 모씨로 기록된 점과
흉노의 위대한 영웅,
冒頓(`모도루`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보임)의
이름에서 추정 가능하며,
신라의 김씨왕족은 당시 이러한 유래들을
잘 알고 있어서 기록에 모씨로 남아있고,
김일(김일제)의 후손이라고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보아, 법흥왕이전까지는
한반도로 이주해 온 김일의 후손들이
다시 모씨성을 사용하다가 법흥왕때부터
중국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다시 김씨성을 사용한것으로 추정된다.
소호김천씨 투후 休屠王의 태자 金日(김일제)의
7대손으로부터 유래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여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며, 김일의 7대손이
김알지라고 보는 견해와 미추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는 위의 기록이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일의 생존연대는 기원전 134-86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로부터 7대이후라면, 한세대를 25년으로 보고
김일이 2,30대에 자녀를 출산했다고 가정할 때,
기원후 61-71년이 되어 김알지의 탄생년도,
기원후 65년(탈해왕 재위시대)와 일치한다.
이로 보아 김일의 7대 후손은 김알지로 추정된다.
그런데, 김알지의 탄생설화에 금성 서쪽숲, 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 탈해왕이 호공을 보내 알아보고,
김알지를 얻어 키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이 始林이 경주지역내가 아니라 대구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닭이 우는 소리라는 표현은 대구의 옛이름,
달구벌의 달구와 닭의 달구를 연계,
김알지의 대구로 부터의 도래를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대구지역은 고조선 또는 예국의 후예로 보여지는
徐씨들이 기원전 2-3세기에 고조선 강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이동, 여주, 이천지역을 거쳐
土城을 남기면서 일찍이 기착한 지역이다.
이들 은 달성을 쌓았으며, 대구의 옛이름
달구벌(달+기+벌= 山+城+벌)도 이 土城에 서 기인한다.
일부의 서씨들은 경주지역으로도 이동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徐羅伐이라는 경주의 옛이름에서
`나`는 나라, `벌`은 마을 또는 땅으로 풀어보면, `
서씨의 나라`로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漢武帝가 흉노를 격파하고 사로잡은 흉노족의 태자,
김일이 한무제의 총애를 받고, 김씨성을 하사받아
그 일족이 권세를 유지하다, 王莽의 득세후
반대파로서 대거 축출될 때, 그 한 一族이 동해안을 거쳐
徐씨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대구지방에 정착한 후,
김알지때에 경주지방으로 진출해 서서히
권력을 잡은 뒤, 味鄒때에 이르러
왕권을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제와 김알지의 이름도 매우 유사하여
어떠한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일제가 김씨성을 하사받기 전의 성은
모(募또는牟)씨로 추정되는데,
이는 법흥왕이 김씨로 기록되기전,
관련자료에 모씨로 기록된 점과
흉노의 위대한 영웅,
冒頓(`모도루`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보임)의
이름에서 추정 가능하며,
신라의 김씨왕족은 당시 이러한 유래들을
잘 알고 있어서 기록에 모씨로 남아있고,
김일(김일제)의 후손이라고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보아, 법흥왕이전까지는
한반도로 이주해 온 김일의 후손들이
다시 모씨성을 사용하다가 법흥왕때부터
중국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다시 김씨성을 사용한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