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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치열하던 11월 6일은 '서태후'의 환갑이었습니다. 포탄을 살 돈이 없어 북양함대가 빈군함으로 니혼군을 맞고 있을 때 '서태후'는 7백만 량의 거금을 들여 생일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대련이, 2주 후에 여순이 함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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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자세한 이야기는
http://clouds.or.kr/book01-list.php?board_title=동북아%20전쟁사&table=board4_8&im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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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전에서 패한 청군은 해전에서도 패했는데 이는 '서태후'의 군비전용으로 1888년 이후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까지 한 척의 배도 더 갖추지 못했고 탄약과 포탄이 부족해 거함 정원과 진원이 제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니혼은 해군력 강화에 전력을 다하여 최신예함을 9척이나 갖췄는데 이 군함들은 최신 중포와 속사포로 무장하고 충분한 탄약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북양함대는 몇 년 동안 본격적인 훈련도 하지 못한 상태였고 니혼군은 해상전투 훈련을 충분히 받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해전이 시작된 지 30분만에 기함 정원의 신호-마스트가 니혼의 포탄을 맞아 부러지는 불운이 뒤따랐습니다. 이때의 해전은 군함끼리 서로 연락할 수 있는 통신 체계가 없었으므로 기함에 내걸린 신호기를 보고 작전을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부러짐으로써 각 군함은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전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5시간에 걸친 사투로 북양함대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 북양함대의 자랑이던 정원과 진원 두 거함은 몇 해 전 친선방문차 니혼의 부두에 닿았을 때 니혼 해군은 분노에 가까운 질투심을 느끼고 해군력 강화에 열을 올려왔습니다. 이제 정원은 니혼의 포격을 맞아 거대한 고철덩이로 변해 바다에 떠있을 뿐이었습니다. 청군은 눈물을 머금고 청나라 해군력의 상징이던 이 정원호를 폭파하여 수장시켰습니다. 또한 진원호는 니혼에 나포되어 니혼의 해군에 편입되었습니다. 니혼 해군이 이 자랑스러운 전리품을 이끌고 니혼 본토에 다다랐을 때 니혼인들은 혼연일체가 되는 열광적 민족애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니혼은 계속되는 연전연승으로 자제를 못할 만큼 흥분하고 있었고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해 당장이라도 뻬이징으로 진격할 기세였습니다. 이것은 니혼의 수뇌부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치나를 식민지로 삼을 만큼 강력한 국력을 가진 나라는 없었습니다. 노쇠하고 비둔한 청을 뜯어먹는 것이 목적 인만큼 청나라가 망해버리면 수많은 희생을 치른 전쟁에서 얻을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설혹 니혼이 치나를 점령한다고 해도 청을 뜯어먹던 열강들이 가만 두고 보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뻬이징에서 한 발짝 거리까지 니혼이 달려들자 청나라도 위기감을 느꼈지만 니혼도 사태의 위급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여 1894년 7월말에 시작된 전쟁의 마무리로 다음해 3월에 시모노세키에서 강화회담이 열려 4월에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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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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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한다. (청나라는 조선에서 손떼라, 우리가 먹겠다라는 얘기죠)
2, 청나라는 니혼에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열도를 할양한다.
3, 청나라는 전쟁 배상금 2억량(일화 3억엔)을 지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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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니혼이 승리의 기쁨과 전리품에 환호하고 있을 때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눈독 들이고 있는 요동반도를 니혼에게 빼앗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도이치란트를 끌어들여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라면서 3국이 니혼에 강력 항의하였습니다. 니혼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이기긴 했지만 전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3국을 대적할 수는 없었습니다.
니혼은 우호적인 브리튼과 유엣에이에 협력을 구했지만 "국외중립의 범위 안에서 협력하겠다"는 애매한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청나라도 애초에 요동반도만은 줄 수 없다고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니혼은 '리 홍장'을 협박하여 조약을 강제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리 홍장'은 은밀히 조약의 사항을 러시아에 알린 것입니다. 러시아는 니혼에 청이 맥없이 꺾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남하정책의 가능성에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다만 니혼이 이번에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고 해군력으로 니혼을 누르면 아시아는 자기들 수중에 있게 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번 전쟁을 중재하던 때의 미온적인 태도를 버리고 강력하게 달려드니 니혼은 입에 물었던 요동을 삼키지 못해 숨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질식사를 피하기 위해 물었던 요동반도를 다시 뱉어놓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과 대만에 대한 조약은 열국의 동의 아래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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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청일전쟁의 전초전으로 왕궁을 점령당한 국내 정세를 살펴보겠습니다. 2000명의 니혼군이 불과 30분만에 왕궁을 점령하고 왕의 신변을 확보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대로 입니다. 1년 후 일어날 끔찍한 을미사변의 연습게임인 셈이었죠. 아무리 허약한 왕조라 할지라도 국가의 최고 권부가 이렇게 쉽게 뚫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라는 민란만큼은 군대로 막아낼 수 있는 군사력이 있을 때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맨주먹인 동학군을 겨우 끌어 모은 3천명의 관군으로 막아내지 못할 정도의 조선은 이미 국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죠. 맨손의 농군도 못 막는 군대가 최신무기를 갖춘 니혼 정예군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청나라에 청병한 것은 화를 불러들인 일이지만 외부의 도움 없이는 왕조를 지탱할 수 없는 것 또한 조선의 현실이었으니 진퇴양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선왕조의 행태를 보면 지금의 북조선과 오롯한 쌍둥이 꼴입니다. 내치의 실패로 누적된 모순을 과감하게 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꾀를 부린다는 것이 타이밍을 놓치고 죽을 길만 찾아 들어서는 격이죠. 내정의 실패를, 청나라에 사대하고 니혼에 앵벌이하고 러시아에 추파를 던져 모면해 보려는 창녀짓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뺨 맞고 얻어터지고 결국은 발가벗겨져 얼음물에 던져지는 죽음의 길이었던 셈입니다.
2000명의 군인을 앞세우고 들어온 니혼공사 '오오토리'는 백지장이 되어 떨고 있는 고종 내외 앞에 칼을 빼어들고 일갈했습니다. "대원군을 모셔오라, 오늘의 사태는 대원군이 아니고는 수습할 수 없다. 국왕전하가 대원군을 모셔오라고 칙령을 내리셨으니 어서 모셔오라."
'민비'로서는 불구대천지 웬수인 대원군이요, 생전에 다시 대면하고 싶지 않은 대원군이련만 '오오토리'는 부르지도 않은 대원군을 왕의 칙령이라며 불러낸 것입니다. '오오토리'로서는 '민비' 세력을 축출하고 민심을 위무하기 위해선 대원군이 꼭 필요한 존재였고 대원군으로선 왕실을 망치는 몹쓸 계집을 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오토리'는 변란 전에 미리 대원군과 끈을 엮어 놓았고 대원군은 왕의 칙령만 가져온다면 출사하겠다는 언약을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하여 니혼군의 침입과 함께 이 나라의 갑오경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원군이 맨 먼저 한일은 궁궐에서 무당들을 깨끗하게 내쫓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동안 내정을 어지럽혔던 민씨 친족을 모두 축출하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대원군으로서는 바깥 웬수인 니혼을 이용해 국내의 웬수 '민비'를 잡고 숙원인 왕권확립과 부국강병을 꾀한 후 열강의 힘을 이용해 니혼을 축출해보자는 심산이었지만 늘상하는 얘기지만 실력의 뒷바침 없는 이이제이는 성공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공한다 해도 그 때뿐 곧 실패하고 마는 것은 청나라가 러시아를 이용해 요동반도를 지켰지만 곧 다시 빼앗기고 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갑오경장의 27개 개혁안은 조선에 반드시 필요한 개혁이었고 반드시 실행되어야 할 사항이었지만 그 실시의 주체가 니혼이었고 엮여있는 인물들은 제각기 딴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제대로 출산하기 전에 사산될 운명이었습니다. 조선이 이 개혁안을 제대로 따르기만 했다면 구사일생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조선은 모든 면에서 니혼이 제시한 획기적인 개혁안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고루하고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왕실은 세계정세에 깜깜한 채 자신의 권한을 조금이라도 내어놓을 생각이 없었고 일반 백성은 낡은 전통을 문명적 우월로 녀겨 타파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대원군도 '민비'도 일반 백성도 일시적으로 니혼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청나라가 니혼을 물리쳐 이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청나라를 따르는 것이 우리 문화에 부합되는 길이라고 믿어 니혼의 개혁안은 그저 잠시 따르는 흉내만 낼 뿐이었기에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니혼에 대한 반발심은 극심하여 우리 스스로를 위한 개혁조차 외면하고 니혼의 강압이라고만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니혼은 이러한 민심의 동향을 무시한 채 일방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더욱 큰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니혼은 우선 군국기무처를 신설하여 왕권신장이라는 흘러간 꿈을 꾸고 있는 대원군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군국기무처의 총리대신으로 온건 중도파인 '김 홍집'을 앉혔습니다. '김 홍집'은 국가 근대화의 핵심 사항들인 세금제도를 물납제도에서 금납제도로 바꾸는 일, 은본위의 화폐장정, 도량형기를 통일하는 일 같은 중요한 개혁을 발표하였으나 이러한 개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니혼의 지시로 잇따른 법령만 발표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개혁을 뒷받침할 재정적 능력도 없었고 백성에 대한 계몽도 없었고 진정으로 실행할 의지도 없었으니 법령만 공표하고 실행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니혼의 꼭두각시로 이용 당한 대원군은 그러나 허수아비 노릇만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내무대신 '민 영달'('민 영달'은 민씨 친족 중에 유일하게 청병을 반대하였고 니혼에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었으나 민씨 일파가 된서리를 맞게 되니 자리를 지키고 있기가 불편해진 것입니다) 이 사표를 내자 자신의 출중한 손자 '이 준용'을 그 자리에 앉히는 수완을 보였습니다. 이리하여 개화파로 구성된 군국기무처와 대원군파 사이에는 미묘한 알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뒷방에 연금된 채 수족이 잘려 힘을 못쓰던 '민비'는 이러한 움직임에 주목하고 한줄기 빛을 발견했으니 이들을 이간질해 권력을 되찾는다는 계책이었습니다. 바깥에서는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을 때, 궁궐 안에서는 바야흐로 물고 물리는 암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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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재빨리 움직여 손자 '이 준용'을 내무대신 자리에 앉혔으나 '민비'의 입김으로 그동안 내무대신에게 있었던 지방 관원 임명권이 박탈되었습니다. 이에 힘을 못쓰는 허수아비가 된 '이 준용'은 내무대신 자리를 사임하였지만 어영사 벼슬은 그대로 유지했으니 이것은 경복궁의 수비대를 관장하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수도 방위 사령관의 직책이었죠. 조선 조정의 끈질긴 요구로 왜병은 궁성 밖으로 몇 발짝 옮기고 궐내는 다시 우리 어영병사로 채워졌습니다.
문제는 조선 군사가 무장해제 당한 상태로 아직 무기를 돌려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이 준용'은 무기를 돌려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민비'는 '이 준용'이 힘을 못쓰게 하기 위해서 어떡해서든지 무기를 돌려받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오토리'로서도 더이상 무장해제 상태를 유지시키기에는 대내외적으로 뚜렷한 명분이 없었습니다.
결국 '오오토리'는 '민비'의 책략을 따라 무기는 반환하되 탄약을 지급하지 않는 술수를 씁니다. 애당초 니혼이 내세운 것이 대원군이고 니혼이 제거하려던 것이 '민비'인데 대가 센 대원군은 사사건건 니혼과 부딪쳤고 니혼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은 오히려 니혼을 제압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유엣에이와 러시아에 넌지시 추파를 보내고 청나라의 승리를 기대하며 은밀히 청나라와 내통하고 있으니 '오오토리'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틈을 '민비'가 비집고 들어온 것입니다. 불과 한 달도 안된 기간 동안에 기류는 묘하게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조정은 친일 개화파와 고종과 '민비'의 친위 계열, 그리고 대원군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민비'의 친족들은 대원군에게 철퇴를 당하였다고는 하나 멀리 귀양을 보낸 것뿐으로 '민비'가 재기하는 날 언제든지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민비'는 다시 권력을 찾기 위해선 친일파에 협력하는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친일 개화파에 은근함을 보였습니다. 대원군은 복귀했다고 하나 지난 20년간 권부에서 물러나 있었던 관계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힘을 쓰기 어려운 데다가 니혼과의 대립으로 어려운 입장이었습니다.
니혼으로선 오히려 자기들이 이용하려던 뻣뻣한 대원군파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니혼은 지지부진한 조선의 개혁에 새 바람을 넣고 자기들의 사람을 심자는 목적으로 니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박 영효'를 불러들입니다. '미비'는 '김 옥균'과 '박 영효'가 니혼에 망명생활 하는 동안 이들의 송환을 끈질기게 요구하였고 여의치 않자 자객을 수차례 보냈습니다. 결국 '김 옥균'은 자객에게 암살 당한 뒤 거열형(찢어 죽임)을 당해 주검마저 갈갈이 찢긴 것은 말씀 드린 바와 같습니다. 갑신정변의 동지로서 '박 영효'는 '민비'에 대한 원한이 사무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민비'의 걱정은 앞으로 니혼을 업고 활약할 '박 영효'와의 관계를 회복해야만 대원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이었습니다. '민비'는 10년만의 망명생활에서 돌아오는 '박 영효'를 맞이할 특사를 인천항에 내보내며 '박 영효'가 입을 대례복을 지어 보냅니다. '박 영효' 또한 니혼의 뒷받침으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아직도 대역죄인으로 가문이 닫친 자신의 처지는 '민비'의 입김이 없이는 풀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민비'와 협력하게 됩니다. 어제의 웬수가 오늘의 친구로,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으로... 끝을 모르는 술수와 암투는 니혼의 억압 아래서도 뜨겁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급박한 국내외 사정으로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나 있던 동학군은 니혼군에 국왕이 사로잡히는 참담한 지경이 되자 다시 봉기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나라건설이라는 비전이 없었고 봉기가 성공하면 대원군으로 하여금 민씨를 벌하고 국왕을 보좌하게 한다는 어설픈 계획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면초가가 된 대원군은 이들의 힘을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은밀히 끈을 넣어 동학군을 봉기시켜 평양에서 일전을 겨룰 준비를 하는 청나라를 도와 앞뒤로 니혼군을 협공하자는 구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을 구체화시킬 겨를도 없이 허망하게 청군은 평양에서 패하고 맙니다. 청나라의 승리를 점치고 있던 대원군과 '민비'는 아연실색하였고 친일 개화파는 기세등등하게 되었습니다.
청군은 연이어 패배하여서 더 이상 동학군과 청군의 연계가 불가능하였지만 동학군은 추수 때를 기다려 '전 봉준'의 남접이 일제히 봉기하였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에 대한 충의를 내세워 비폭력을 주장해오던 북접은 접주 '손 병희'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남접과 힘을 합하기로 하여 동학군은 25만 대군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개혁은 백에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고 이렇게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니혼은 '오오토리'를 소환하고 '이노우에'를 후임으로 내어 보내니 '이노우에'는 니혼에서 거물 중의 거물로 꼽히는 정객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외무대신과 총리대신 서리까지 역임한 인물로 이렇듯 얽히고 설킨, 조선 조정에 자청하여 부임한 것입니다.
부임한 그는 '민비'에게 사주받은 개화파에게서 수구파, 특히 대원군이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얘기를 확인하고 이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대원군과 동학군과의 내통한 것을 약점으로 삼아 대원군의 자발적인 사퇴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청나라와 내통한 것, 고종을 폐하고 '이 준용'을 세우고자 했다는 역모혐의까지 씌워 무시무시한 옥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협박하니 대원군은 '이 준용'과 함께 불과 4개월간의 허수아비 생활을 청산하고 실각하여 다시 운현궁으로 칩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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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은 조선 말의 재야인사였던 '황 현'(1855~1910)의 ID입니다. 그의 집안은 '황 희'정승의 방계이지만 몰락한 양반이었는데 '황 현'의 아버지는 그무렵 가장 천하게 생각했던 상업을 하여 꽤 많은 재산을 모았고 그 덕분에 '황 현'은 1천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평생 야인으로서 학문을 가까이하며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날카롭고도 객관적인 안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34세가 되어 겨우 생원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곧 궁궐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에 염증을 느껴 고향인 구례로 내려오자 그의 친구가 서울서 입신할 생각을 않고 귀향한 그를 꾸짖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대는 나를 보고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 속으로 들어가 함께 도깨비 미치광이 짓을 하란 말인가? "
너무나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던 매천은 미치광이들과 도저히 함께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1910년 나라가 망하자 ■■하였는데 갑오경장의 개혁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살피건대 여러 조항들을 보면 반드시 우리를 진정으로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겠으나 대증요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힘써 시행했더라면 어찌 오늘날과 같이 나라가 망했겠는가? 경전에 이르기를 '국가는 필시 스스로 자기를 해친 연후에 남이 치고 들어온다'고 하였으니 아, 슬프다!"
그는 또한 자신이 죽는 것은 임금에 대한 충의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자가 1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한 일이 아닌가! 나는 위로 하늘의 병이의 아름다움과 아래로 평소 읽은 책의 의미를 저버릴 수 없다. 눈을 감고 잠들면 참으로 쾌할 것이다"
그가 대원군이나 고종, '민비'에 대하여 쓴 이야기들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궁궐에 있던 측근들에게서 들은 얘기라고 소스를 밝히고 있습니다.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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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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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국정을 맡아보던 갑자년(1864년)에서 계유년(1873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나라 안이 무서워서 떨었으며 서로 조심하여 감히 조정의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저승사자가 문 앞에 와 있는 것같이 녀겼이다. 옛 제도에 교령을 내릴 때 반드시 '왕께서 가로되(王若曰)'로 첫머리를 삼았는데 그 10년 동안은 단지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자로 내외에 온통 행해졌다. 갑술년에 친정을 하게 되자 다시 옛제도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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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위분부와 민씨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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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국정을 맡은 10년 동안 위엄이 중앙과 지방에 두루 행해졌다. '대원위분부 大院位分付' 다섯자가 삼천리를 바람처럼 통행하니 벼락이나 끓는 물처럼 아전과 백성들이 벌벌 떨며 늘상 법망에 걸릴까 두려워 하였다. 밤낮없이 와언(訛言)이 함부로 나돌고 서울에 올라온 시골 사람들이 붙잡히면 바로 죽음을 당했다. 궁벽한 산골이나 바닷가까지 불안감에 휩싸여 즐겨 살아갈 마음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모두 기뻐하며 반기어, 어떤 이는 대원군이 물러나지 않았으면 며칠 못 가서 나라가 망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백성들은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하여 종종 한숨을 쉬며 도리어 대원군의 정치를 그리워 하였다. 이는 정히 한나라 때 민심이 흉흉하여 다시 왕망의 조정을 생각한다는 것과 비슷하나 대원군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끼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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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십년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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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임금의 아버지로서 총재의 일을 행사했으니 남면만 안 했을 뿐이지(왕좌에 앉는 것을 말함) 엄연히 섭정을 한 것이다. 그 십년 동안은 국가가 무사했으니 정히 1천년에 두번 다시 없는 기회로 크게 일을 할 수 있는 때였다. 만일 그가 정말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좋은 법을 강구하며 나라의 쓰임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여 어여삐 녀기고 진실한 뜻이 법조문 밖에서 무르녹아 드러나도록 하는 정치를 송나라의 '사마광'이 원우 연간에 했던 것처럼 했다 해도 기화의 추세가 이상적인 정치를 금방 회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상서를 내려 인재들이 배출되고 백성을 잘살게 하고 불어나게 하며 가르치기를 10년간 했다면 천하에 또한 못할 일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대원군이라는 사람은 안동 김씨의 부귀를 부러워하다가 하루아침에 뜻을 얻자 사치와 교만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었던 것이 안동 김씨 보다도 더했다. 그리하여 원기를 훼손하고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으며 한갓 토목공사에 매달리고 색목에 편들기로 10년 사업을 삼았으니 오호라 이는 시운이었던가? 천년 후에 또한 반드시 이 일에 탄식하고 통한할 자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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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친정과 '민비'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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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년 초에 임금이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되었는데 안에서는 '민비'가 주관하고 밖에서는 민승호가 힘을 썼다. '민비'는 총명하고 책략이 많아 항상 임금 곁에 있으면서 임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좌했다. 처음에는 임금에 기대어 자기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표출했지만 이윽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날로 심해서 임금이 도리어 제재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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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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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친정한 이래 날마다 유흥을 일삼아 매일 밤 연회를 열고 질탕하게 놀아, 광?무당과 악공들이 어울려 노래하고 연주하느라 궁정 뜰에 등촉이 대낮과 같았다. 새벽에 이르도록 쉬지 않고 놀다가 새벽녘이나 아침에서야 비로소 휘장을 쳐서 창을 가려 어둡게 하고 잠자리에 들어 곯아떨어졌다 해가 기울어서야 일어나니 이런 일이 일상사가 되어 세자는 어릴 때부터 익숙히 보아 일상으로 생각했다. 매일 아침 햇살이 창가를 비추면 양전의 옷을 잡아다니면서 "마마, 주무시러 가십시요"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정사를 맡은 자들이 해이해졌다.
임금이 친히 임하여 선비를 뽑을 때에도 매번 황혼 무렵에 궁궐에서 나갔다가 잠시 후 어가를 돌려서 들어가 버리므로 응시생들이 바쁘게 촛불을 켜고 시권을 써야 했다. 임금은 잔치를 좋아할 뿐 아니라 과거도 유희의 한가지로 생각해 어느 달이고 과거를 안 치를 때가 없었고, 어떤 때는 한 달에 두 번 실시하기도 하였다. 혹 수심이 들거나 무료하면 곧 과령을 내렸다. 서울 선비들은 서로 만나면 서먹서먹한 사이인 경우 으레 먼저 "오늘은 과령 없습니까? " 하고 물을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와 노니는 선비들이 오로지 관광을 하느라 해를 넘겨 쌀을 구하는 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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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매매의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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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시를 매매하던 당초에는 그 가격이 200냥, 혹은 300냥으로 일정치 않았으며 500냥에 이르면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갑오년 직전의 몇 차례 식년시험에서는 1,000냥씩 하여도 사람들이 놀라지 않았고, 회시에 있어서는 대충 1만여냥씩 하였다. 돈이 점차 많아질수록 그 값어치가 천해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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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당색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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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노론으로 자처하였으며, 신하들을 대할 때 세가지 당색으로 구별하여, 대우하고 배척함에 있어서 차등을 두었다. 예컨대 참화관에서 출륙을 하기까지 극히 청화한 자리로 노론은 대교, 소론은 한림, 남인과 북인은 주서를 주어 이것으로 높낮이를 두었으며 다른 관직도 마찬가지였다. 매양 대과 합격자의 여창을 보고받을 경우 노론이면 "친구"라하고 소론이면 "저쪽"이라하고 남인이나 북인이면 "그놈"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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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고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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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가 태어난 후 궁중에서는 끝도 없이 기복하는 일을 하여 팔도의 명산에 두루 미쳤으며, 임금 또한 연회를 멋대로 열어 지불하는 돈이 헤아릴 수 없어 양전이 하루에 천금을 쓰니, 내수사 경비로는 지탱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공공연히 호조와 선혜청에서 끌어 쓰는데도 재정을 담당한 신하는 한 사람도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일년이 지나지 않아 대원군(대원군)이 10년 동안 저축해 놓은 것이 탕진 되었다. 벼슬 자리를 팔고 과거를 파는 폐정이 이어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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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의 세자를 위한 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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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 사찰에 두루 기도를 드렸는데, 세자의 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이에 뭇 고사(소경과 무당)들이 군읍에 횡행하여 이들을 맞이하고 전별하는 일이 이어졌다. 금강산은 세상에서 1만 2천 봉우리라 하는데, 봉우리마다 바치는 제물이 돈으로 1만 꿰미에 이르렀다. 중들이 이를 따라서 출입하게 되어 그들이 거처하는 절집으로서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는 곳은 원당을 세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를 축리라고 일컬었다. 시골 사람 가운데 중의 무리를 잘못 건드려서 형을 받고 집안이 망한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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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의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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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피 중에 서북 지방에서 나는 것을 속칭 돈피라고 한다. 그 겨드랑이 아래의 좋은 털을 자얼이라 일컫는데 특히 따스하고 진귀해서 가격이 비단보다 몇 배나 비쌌다. 대내에서 일찍이 모전에 명하여 자얼모장 열벌을 급히 들이라고 하였다. 서울의 돈피구 모자를 가진 자는 열 배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만들어 올리자 '민비'가 펼치도록 명하고 구경하는 즈음에 촛불 심지가 떨어져서 순식간에 모두 타버렸다.
팔도의 진귀한 토산물로 복정에 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어 산처럼 쌓여있었다. 매번 궁중의 곡연에서 흥이 오르면 양전은 비스듬히 기둥에 기대어 접부채와 곡삼을 비오듯 땅에 떨어뜨렸다. 무격이나 광대로 창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하룻밤을 지낸 다음 말미를 청하여 세모시와 부채, 칼등속을 으레 한 짐 짊어지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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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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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 '이 최승'은 월사 '이 정귀'의 후손으로 오래도록 가주서로 궐내에서 당직을 하였다. 그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 주었다. 한번은 밤이 깊었는데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 악례를 따라 소리를 찾아가 한 전각에 이르고 보니 휘황하기가 대낮처럼 밝은데 양전이 편복으로 산만하게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섬돌 아래로는 머리띠를 하고 팔뚝을 드러낸 채 노래하고 북 치는 자들이 수십 명인데 잡된 소리로 노래하는 것이었다. "오늘 길 가는 길에 만난 정 그리워라, 죽으면 죽었지 헤어지기 어렵더라" 음란하고 비속해서 듣는 자들이 모두 얼굴을 가렸으나 '민비'는 넓적다리를 치면서 "좋지, 좋아" 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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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성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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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음위의 질환이 있었다. 혹은 타고난 고자라 하고 혹은 어릴 적에 궁녀가 그 양경을 빨아 한번 나온 후 수습이 되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나이가 좀 들자 음경이 오이처럼 드리워져 발기가 될 때가 없었고 소변이 저절로 흘러 항상 자리를 적셨으며 하루에 한번 요를 갈았으며 바지를 두 번 갈아 입혀야 했다. 혼례를 치르고 해가 지나도록 남자 구실을 하지 못했다. '민비'는 한탄하며 몹시 조급해했다. 한번은 궁비를 시켜 세자에게 남녀가 교접하는 형상을 짓도록 하고 문 밖에서 큰 소리로 "되느냐, 안 되느냐? " 물으니, "안 됩니다" 하였다. '민비'는 여러 번 한숨을 쉬고 가슴을 치며 일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완화군을 살해한 응보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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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군 '이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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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이미 남자 구실을 못한 나머지 고질이 되고 말았다. '민비'는 세자에게서 후계자를 바랄 수 없음을 탄식하여 왕자 '이 강'이 아들 낳기를 기다렸다가 그 아들로 세자의 계통을 잇게 하려 하였다. 그래서 '이 강'을 대하는 것이 점차 박절하게 하지 않으니 완화군을 대할 때와는 현격하게 달랐다. 신묘년(1891년) 겨울에 이르러 임금에게 '이 강'을 의화군으로 봉하도록 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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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 구원병를 요청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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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의 전라도 관할의 태인군과 고부군 두 고을은 백성의 습속이 사나워 원래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근래에 동학에 붙은 동비들 1만여명이 무리를 이루어 공격하여 함락된 고을이 10여 곳이나 되며 지금 또다시 북진하여 전주성을 함락하였습니다. 전에 선발한 연군이 가서 진정시키려 하였으나 그 동비들이 끝끝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연군이 패전하기에 이르러 잃어버린 병기도 많았습니다.
이 흉악한 무리들이 오래도록 소요하면 매우 염려스러울 뿐 아니라 더구나 한성과의 거리가 4백 수십리에 불과하니 그들이 다시 북진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경기지방이 동요할 것이니 손상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 조련한 각군의 현재 숫자가 겨우 도회를 포위할만한 정도인데다 싸움을 경험하지 못하여 적을 진멸하는 데 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흉악한 무리들을 오래도록 번창하게 둔다면 치나에까지 우려를 끼치는 바가 더욱 많을 것입니다. 임오년과 갑신년에 일어난 본국의 두 차례의 내란을 보면 모두 치나의 군사가 와서 평정해 준 데에 힘입었습니다. 이에 원군 문제로 귀 총리를 번거롭게 하니 신속하게 북양대신에게 전보를 쳐서 몇 개 부대를 파견하여 속히 와서 토벌하도록 해 주십시오.
아울러 본국의 각군으로 하여금 따라가서 함께 군무를 익히게 하여 앞으로의 방위계책을 삼겠습니다. 흉악한 무리가 꺾여지기를 기다려서 즉시 회군하기를 요청하고 감히 계속 머물러 있어 대군이 밖에서 오래 머물러있는 수고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아울러 귀 총리에게 청하오니 속히 계획을 세워 이 급박함을 구제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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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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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영준'은 임금이 난리를 키운 것으로 죄를 내릴까 두려워하여 신료들에게 지방의 사태를 말하지 못하도록 금지했고 전보도 비밀로 하여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호남지방에 이 같은 난리가 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기밀에 참예하지 못한 하급관리들도 또한 정황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다. 하루는 '조 동윤'이 들어와 알현하자, 임금이 "도성의 인심이 어떠한가?" 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방으로 피난을 나갔습니다" 하였다.
잠시 후 '민 영준'이 들어오자, 임금이 또 "도성의 인심이 어떠한가? " 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과 같이 평소처럼 동요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 동윤'은 사방으로 피난 갔다고 했는데, 그대는 전혀 동요가 없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 하자, '민 영준'은 "'조 동윤'은 작은 신하라, 어지럽게 말하여 성상의 총명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민 영준'이 나오는 것을 '조 동윤'이 가로막고 거친 소리로 말하기를 "전주는 벌써 함락되었고 서울 도성이 텅 비었는데 공은 백성들이 모두 동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니, 누가 어지럽게 말하는 것이고 누가 총명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까?" 라고 하니 '민 영준'은 대답을 못하고 눈을 부라리고 나갔다.
'민 영준'은 근심과 두려움에 어찌할 줄 모르고 날마다 자기 집의 은을 저장한 창고에 들어가 은덩이를 어루만지면서 서쪽 창고의 은을 동쪽 창고로 옮겼다가는, 잠시 후 또 동쪽 창고의 은을 서쪽 창고에 옮기며 부산을 떨다가 길게 한숨을 쉬며 나오고는 하였다. 높은 벼슬아치들이 찾아와 바깥 사랑에 가득하였지만 그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민 두호'는 '민 영준'과 재산을 따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전곡과 여러 가지 진기한 보물 등 엄청나게 많은 양을 따로 쌓아 놓고서 이 때에 이르러 종들을 불러놓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집을 위하여 일을 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수고에 대해 보답하지 못했다. 지금 이것을 가지고 떠나거라" 하며 한 사람 앞에 5두의 쌀과 당오전 100문을 지급하였다. 집종들은 모두 마지못해 웃으며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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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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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임금이 낮잠을 자다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임금은 크게 불길하게 여겨 이해 2월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즉시 동궁을 보수했다. 이때 남도의 난리가 날로 급박해 졌음에도 토목공사는 더욱 공교함을 다투었다. 임금은 날마다 전등을 켜놓고 광대들을 불러 '신성의 염곡'을 연주하게 했는데 '아리랑 타령'이라 일컫는 것이었다. '민 영주'는 원임 각신으로서 뭇 광대를 거느리고 아리랑 타령 부르는 것을 전담하여 광대들의 실력을 평가해 상방궁에서 금은을 내어 상으로 주도록 했다. 이 일은 '오오토리'가 대궐을 침범할 때에 이르러서야 중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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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군의 궁궐 침탈과 대원군의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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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서에서 이에 대한 답변을 지연하자 '오오토리'는 다시 청나라의 속국인지 여부를 질문했는데 그의 말이 매우 긴박하였다. '심 순택' 등은 교정청에 이름을 걸고 있었으나 아무런 대책도 세운 바가 없고 속으로 은밀히 청군의 구원을 믿고 관망하며 날을 보냈다. '오오토리'는 이날 새벽 병사를 지휘하여 경복궁에 접근, 문을 부수고 뛰어들어 별전에 이르니 호위하는 병사와 시종하는 신하들은 모두 도망치고 오직 양전만 남아있었다.
시퍼런 칼날이 에워싸자 양전은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들에게 영문을 물어보려고 했으나 곁에 통역할만한 자도 없었다. 이때 마침 '안 경수'가 들어왔는데 그는 니혼말에 능했다. 임금은 반가워하며 그를 시켜 통역하도록 하였다. '오오토리'는 칼을 빼들고 고함치기를 "대원군이 아니면 오늘의 일을 주관할 사람이 없다. 대원군을 모셔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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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와 '오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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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난입이 일어난 당초에, 대원군이 강요를 받아 입궐하였을 때 '조 희연', '안 경수'들이 맞이하여 말하길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여러 민씨의 죄이니 마땅히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대감의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냉소하며 말하기를, "내가 유폐되어 지낸 지 20년이다. 민씨 일가의 공과 과에 대해 관여하지 않겠으니, 지금 죽이고 살리는 논의는 그대들에게 달려있다. 내 어찌 거기에 입을 올리겠는가?" 라고 하였다. 민비가 이 말을 멀리서 듣고 안도하며 말하기를, "후덕하시다. 대감이여! 대감이 우리 집안을 이처럼 용서할 줄 몰랐다" 하니 듣는 이가 속으로 비웃었다.
신법이 제정되자 '오오토리'는 공법에 각국의 황후는 각국의 공사를 상면하게 되어있다 하고서 민비에게 알현하기를 청하였는데, 민비은 드디어 성장을 하고 만나보았다. 알현하는 예식을 마치자, '오오토리'는 임금에게 말하기를 "무릇 민간의 살림살이도 현처의 도움이 필요하거늘, 왕가에 있어서는 더욱 내조가 요청됩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흥망이 거울에 비추듯 분명하니, 대왕께서는 이점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요즘의 일은 한 집안 일 같기에 감히 분에 넘치는 생각을 말씀 드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우리 집안 또한 내조가 없다고 할 수 없지요" 라고 하니 좌우에 듣던 이들이 모두 입을 가렸다. 대개 '오오토리'가 임금을 희롱하며 모욕한 것인데, 임금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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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초기에 조선의 백성은 청나라 군대를 기꺼운 마음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이 청군을 환영한 것은 청나라가 좋아서가 아니라 니혼이 미워서였습니다. 그러나 태반이 부랑아로 구성 되어있던 청군의 군기는 말이 아니어서 이러한 조선민의 호의를 무시하고 부녀자를 ㅁㅁ하고 약탈하자 민심이 모두 떠나게 되어 청군만 나타나면 모두 도망가 숨고 협력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중 '좌 보귀'군만은 다소 질서가 잡혀있었지만 '섭 지초'군은 아산에서부터 패전하여 온 패잔병들이라 기율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위 여귀'의 군인들이 약탈이 가장 심했는데 '위 여귀'라는 장수 자신이 군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전당포를 차린 무뢰한으로서 군사들의 급료를 떼어먹으니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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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에 기록된 청일전쟁에서 청군과 니혼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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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군의 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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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에서 왜인은 모든 군수물자를 다 자기나라에서 수송해 왔는데 땔감까지도 그러하였다. 저들은 이르는 곳마다 물을 사서 마셨고 군령이 매우 엄하여 우리 백성들이 군대가 와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모두들 기꺼이 그들을 위해서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청군은 음행과 약탈을 자행하고 날마다 징발하기를 일삼아 관민이 모두 곤란을 당하여 그들을 웬수 보듯 하였다. 평양이 포위되었을 때 문을 열고 왜군을 안내한 자도 있었고 청군이 패하여 도망가 숨어 있으면 성안의 백성들이 그 숨은 곳을 가리켜 주어 벗어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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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의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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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여귀'는 은자 8만 냥을 착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니 군졸들의 마음이 위반되기에 이르렀으며, 게다가 그는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먼저 도주해 버렸다. 청나라 정부에서는 그를 파직하고 붙잡아 조사하여 12월 22일 참수하고 '섭 지초'를 조사하였으며, '좌 보귀'에 대해서는 사당을 세워주고 '용렬(勇烈)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청군이 퇴각하고 나서야 '김 만식'은 비로소 평양에 들어갔는데, 평양은 참혹한 병화를 겪은 후라 성안 가득 잿더미와 기왓장이 널려 있었으며 선화당 대청마루 밑에 주검이 가득 쌓여있었는데, 대개 숨어있는 청군을 왜군이 뒤에서 덮쳐 총포를 쏘아댔기 때문이다. 이 주검들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불태웠는데 열흘이 지나도 일을 마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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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아직도 장기전으로 가면 청나라가 이기리라고 믿고 있던 조선의 '김 홍집'과 대원군은 양다리 걸치기를 하여 니혼 몰래 청나라 진지로 정보를 넣어주고 있었고 '민비'는 니혼의 눈을 피하여 '서태후'의 회갑 축하사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청일전쟁이 니혼의 승리로 굳어가자 니혼인들은 지배자로 행세하기 시작했고 특히 조선에 이민 왔던 하층민의 행패가 심해졌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잠시 물러나있던 동학군은 이번에는 왜군과 무능한 조정에 대항하여 일제히 봉기했습니다. 이번엔 남접과 북접이 힘을 합하여 2대 교주 '최 시형'의 교령을 받아 북접은 '손 병희'가, 남접은 '전 봉준'이 이끌고 곡식을 대기 쉬운 중간지점인 논산에서 양접이 합세하기로 하였습니다.
'손 병희'가 관군의 약간의 저항을 쉽사리 무찌르고 논산에 당도하자 '전 봉준'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의형제를 맺어 '전 봉준'이 형이 되고 '손 병희'는 아우가 되어 총대장은 '전 봉준'이 맡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나라 조정에서는 이제 동학군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최신무기로 무장한 니혼 정예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칠 때마저도 웬수에게 의지하는 이 나라 조정이었습니다.
이 수십만의 동학군에 대항할 니혼군은 7~8천에 불과한 소수병력으로서 야전 지휘관은 '미나미' 소좌라는 일개 하급 지휘관이었습니다. 전투는 먼저 목천 세성산에서 3천명의 동학군과, 관군을 앞세운 '미나미' 소좌의 2개 소대 사이에 벌어졌는데 우수한 무기와 훈련을 받은 소수의 니혼군에게 3천명의 동학군이 무수한 전상자를 내고 전패하고 말았습니다.
목천에서 크게 이긴 니혼군과 관군은 공주에서 합세하였는데 거의 1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동학군의 선제공격으로 선봉군인 관군의 전사자가 120명과 3백명의 부상자가 났습니다. 동학군은 우세한 숫자로 공주를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왔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미나미' 소좌가 니혼군을 전선에 배치시키니 전세가 달라지게 되었고 청주에서 '시라끼' 부대가 측면 지원하였습니다.
이리하여 10여일 동안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동학군은 '전 봉준'의 직접 지휘아래 공주읍의 남쪽 웅치 방면으로 총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니혼이 대포를 위시하여 우세한 화력으로 맹사격을 퍼붓자 양방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승부를 가리기 어려운 혼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일단 퇴각한 동학군은 전주를 수비하고 있던 '김 개남'이 오천의 병력을 이끌고 합세하자 마지막 대공세를 취합니다. 이번에는 공주성 서쪽 [우금치]였습니다. 이곳에는 니혼이군 1개 대대 즉 '미나미'소좌 부대가 있었고 다른 부대는 3면의 관군을 적절히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10만의 동학군이 이들을 포위하여 총공격을 하였고 이들은 모두 종교적 신념으로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정규 훈련을 거치고 신 무기로 무장한 니혼 정예군은 침착하고 정확했습니다.
동학군은 용감히 분전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희생자의 주검이 산을 이루고 그 피가 강을 이루었으며 그나마 타격을 입힌 것은 니혼군이 아니라 같은 동족인 관군이었습니다. '전 봉준'은 분노를 삼키며 동지들의 주검을 뒤로한 채 나머지 패잔병을 모아 다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봉기했던 동학군도 죄다 니혼군에게 토벌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학군의 본대인 '전 봉준'에게는 아직도 수만의 동학군이 있었는데 남쪽으로 숨가쁘게 쫓기다가 11월말(음력) 최후의 전투를 하게 되지만 이미 형세는 기울어 모든 병장기와 물건을 버리고 단신으로 몇 사람의 동지와 함께 순창으로 피신합니다.
'전 봉준'의 목에는 1천냥의 상금이 걸려있었는데 다리에 총상을 입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그를 그의 부하였던 '김 경천'의 일러바쳐 부근에 사는 '한 신현', '김 영철', '정 창욱'등이 일어서지 못하는 '전 봉준'을 포박하였습니다. 그들은 1천냥의 상금을 나눠 가졌습니다. 동학군 제일의 맹장이라고 일컬어지던 '김 개남'도 끝까지 전투를 벌이다 생포되었습니다. '김 개남'은 다음날로 전주 감영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그의 목은 다시 서울로 보내져 역시 서울에서 참수당한 '성 재식', '안 교선' 등과 함께 열흘 동안 장대에 달려 효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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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 대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기록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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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임금과의 충성관계를 공손하게 끊고 그와 다른 주권을 약속했던 동학은 1월 초 전멸하여 교주의 머리가 충성스런 관리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나는 그것을 가장 부산한 거리인 서소문 밖의 어느 시장 거리에서 보았다.
마치 야영장에서 쓰는 주전자 대처럼 나무기둥 3개로 얼기설기 받쳐놓은 구조물에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가 그 아래로 늘어뜨려져 매달려있었다. 그 두 얼굴 모두 고요하고 엄숙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같은 구조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이 무게를 지탱할 수가 없어 무너지게 되면 먼지 수북한 길바닥에 그냥 나뒹굴도록 내버려져 개들이 몰려와 물어뜯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이날 서울에 효수된 사람은 지도자 '김 개남'과 성재식)
그곳에 고장난 회중시계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그것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개에게 물어뜯긴 주검의 입 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사흘 후 조선의 고요한 새해 아침을 맞아 나는 서울의 동쪽문과 남쪽 문 밖, 소나무가 울창한 둥그런 야산들 사이의 평평한 밭길로 통하는 호젓한 길을 따라 친구와 함께 마차를 타고 달렸다. 흰 눈은 천지를 뒤덮고 있었는데 어둑한 하늘이 임박한 폭풍의 조짐을 알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추운 날씨에 면으로 된 여름 홑옷을 입은 채로 길가에서 자고 있는 3명의 인부들이 이상하다 싶어 가까이 가보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들은 영원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의 자세는 마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 하였지만 실은 머리가 없는 몸뚱어리뿐인 주검이었던 것이다.
그길 한복판에는 얼어붙은 선홍색의 피자국이 선명하였다. 그곳은 바로 동학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반역죄에 대해 마지막 사죄를 구했던 곳으로 마치 옛 예루살렘에서의 '출구 없는 환란'과도 비슷한 형국이었다. 며칠이 지나서 참수형과 능지처참형을 폐지하고 그대신 민간인에겐 교살형을, 군사적 범죄엔 총살형만을 허용한다는 보도가 관보에 실렸다. 이 명령은 실제로 생명과 죽음에 대한 군주적 특권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낡은 질서는 니혼인 고문관의 압력아래 매일매일 바뀌어갔고, 대체로 그 변화는 더 개선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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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 봉준' 만은 산채로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명색이 근대식 재판을 받게 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대원군과의 밀계를 실토 받으려는 '이노우에'의 계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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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노우에'가 대원군을 사퇴시키고 그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전 봉준'을 산채로 압송하자 와신상담하던 '민비'와 그 일족은 입이 귀에 걸렸습니다. 민씨 일족은 대부분 멀리 귀양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으나 흐지부지 되어, 가는 사람, 안 가는 사람이 있더니 어느 틈엔가 다시 돌아와 정권을 차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한편 '민비'는 갑신정변의 웬수 '박 영효'와 '서 광범'을 복작시켜주어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고 '이노우에'를 충분히 구워삶았다고 녀겨 대원군파의 숙청으로 공석이된 4개의 협판자리에 민씨척족을 임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트집이 되어 '이노우에'의 노여움을 사 파란을 일으킵니다. 섯불리 '이노우에'의 심중을 시험해 보려던 '민비'는 움추러들고 '이노우에'는 고종에게서 왕비 불참정의 서약을 받아냅니다.
'이노우에'는 '박 영효'를 '김 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으로 임명해 내정개혁을 단행합니다. 이때에 고종에게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독립서고문과 홍범 14조를 선포하라고 종용하니 이는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끊고 조선의 독립을 만방에 알리라는 압박이었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청나라로부터의 조선왕조의 독립이 아니라 니혼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마지못해 억지춘향으로 이 예식을 마치고 왕에서 황제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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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식을 목격한 '비숍'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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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 8일(양력) 나는 어떤 특별한 예식을 목격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선의 오래 누적된 역사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라는 선물을 제시한 니혼은 왕에게 공식적으로 치나의 종주권을 폐기하는 동시에 불쾌하기 짝이없는 조공을 일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조선 국왕이 엄숙하게 종묘사직 앞에 나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개혁을 단행할 것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왕은 사소한 병환을 핑계로 발걸음을 주저하였고 심지어 이 제의가 있기 전날 꿈에는, 조상의 영령이 고래의 법도에서 이탈하지 않겠노라 맹세하라 호령하면서 나타난 탓에 이미 주어진 이 서약을 받아들이는 것이 저으기 무서웠다고 한다.
이 서약은 북한산 그늘이 드리워진 짙은 소나무 숲에서 조선에서 가장 신성한 제단 앞에 조정의 대신들과 고관대작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단히 엄숙하게 행해졌다. 군중들은 한점 미소도 한마디 말도 없었다. 하늘은 어둡고 흐렸으며 차가운 겨울바람이 마치 조선의 미래에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듯이 불고 있었다.
문앞에서 오랫동안 지체하면서 왕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 외세의 억압에 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심사숙고했으나 결국 행렬은 궁궐문을 나섰다. 삼지창을 꽂은 거대한 깃발들, 보라색 뭉치들이 높이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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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전지작업의 일환으로 강압적으로 등떠밀려 얻은 황제, 황후라는 이름을 신주 모시듯 하며 고종을 고종, '민비'를 '민비'라고 부르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비'는 황후의 타이틀을 얻은지 열달만에 살해당함으로서 뮤지컬에 '민비'라는 타이틀대신 명성황후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어수선한 갑오년이 지나고 세모가 다가왔지만 갑오경장이라는 대개혁을 공표한 이 나라의 상하 관리들은 세달치의 봉급이 밀려있었고 조정에는 땡전 한푼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니혼의 제일은행 인천지점은 조선정부의 탁지아문에 13만원의 차관을 빌려줍니다. 이 돈으로 이 나라 관원들은 한달치 봉급을 받아 간신히 과세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조선 최초로 근대식 재판을 받게된 '전 봉준'은 명색만 근대식이었지 갖은 악형을 겪고 있었으나 끝까지 대원군과의 연계를 부인하고 불굴의 정신력으로 오히려 재판관 '서 광범'을 나무랍니다. 결국 대원군을 엮는데 실패하고 '전 봉준'에게 사형선고를 내린후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그동안 반역죄인은 삼족을 멸하고 거열형을 처하던 것에 비하면 관대한 처분을 받은 셈인데 이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웬수인 니혼 덕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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