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령(正道令)
도(道)안에 덕(德)이 있음이요 도(道)가 반드시 덕(德)은 아니다. 덕(德)안에 예(禮)가 있음이요 덕(德)이 반드시 예(禮)는 아니다. 도(道)는 반드시 광명(光明)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많으나 덕(德)은 광명(光明)하여 세상을 밝게 비추며 예(禮)는 겉포장에 불과하다. 도(道)는 공(空)의 마음으로 시(始)하나 덕(德)은 말과 행동으로 시(始)한다. 예(禮)는 말과 행동을 보기 좋게 다듬고 꾸미는데 있다. 도(道)는 공(空)으로부터 시(始)하고 공(空)은 만유(萬有)의 어미요 일사일물(一事一物)도 여기에서 시(始)하지 않음이 없으니 무릇 모든 종교(宗敎)와 철학(哲學)과 과학(科學)도 여기로부터 시(始)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모래로써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정(正)한 것이 못된다. 예(禮)를 말할 것 같으면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이 배려이다. 공자(孔子)가 이르되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 하였으니 예(禮)에 관한 한 그 어떠한 예(例)라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덕(德)을 말할 것 같으면 말과 행동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유익(有益)함을 주는 것이며 도(道)를 말할 것 같으면 모르겠다. 도덕경(道德經)에 이르되 세간(世間)에서 흔히 말하는 도(道)는 도(道)가 아니며 도(道)를 말할 것 같으면 세간(世間)사람들이 비웃게 되니 사람들이 비웃지 않는 도(道)는 또한 도(道)가 아니라 하였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극(極)에 이르면 반드시 시간(時間)이 멎은 자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변화(變化)는 사라지게 되고 변화(變化)가 없으니 유(有)이겠는가? 무(無)이겠는가? 경계(境界)가 없으니 공(空)이라 이르고 공(空)은 모든 만유(萬有)의 어미요 근간(根幹)이 된다. 여기에는 한 생각도 없고 너와 내가 따로 없으니 공(空)은 모두가 하나되는 본래(本來)의 자리가 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이르되 색(色/물질)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아서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空)이 곧 색(色)이라 하였으니 만일 물질(物質)이라는 것이 절대적(絶對的) 알갱이 즉, 입자(粒子)로 구성이 되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는 물론이요 한 생각도 자연의 순환(循環)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알갱이란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고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변화(變化)라 할 수 없으니 거기에 무슨 생사(生死)가 있고 무슨 생각이 있으며 무슨 자연(自然)의 순환이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공(空)이 있으니 변화(變化)가 있고 그러한 변화는 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다. 물질(物質)을 아무리 쪼개어 봐야 변화(變化)만이 목도(目睹)될 뿐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되 이 세상은 그 이름이 이 세상일 뿐 실제의 이 세상이 아니라 하였다. 이 세상은 환상에 불과할 따름이요 따라서 자연(自然)은 인간(人間)으로 하여금 최고의 마술사인 것이다. 꿈속의 모든 것들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니 그 속의 모든 번뇌(煩惱)와 희비(喜悲)도 또한 나로부터 기인(起因)된 것이다. 환상의 세계(世界)에서는 불가능이란 없다. 만화영화를 보라. 무슨 불가능이 있겠는가? 다만 천(天)의 결정일 따름이니 천(天)이 나이고 내가 또한 천(天)이다. 따라서 천국(天國)은 내가 만드는 것이며 모든 아상(我相/나 따로)과 인상(人相/너 따로)과 중생상(衆生相/우리 따로)과 수자상(壽者相/운명 따로)을 끊어 각각의 마음이 하나로 통일(統一)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누구나 이 세상에 와서 한 번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일 뿐 삶에 취(醉)하여 이내 잊고 죽을 때까지 그 취기(醉氣)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다가 가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人生)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저 사람도 '나'라는 의식(意識)이 있고 이 사람도 '나'라는 의식(意識)이 있고 나 또한 '나'라는 의식(意識)이 있으니 저이도 '나'요 이이도 '나'요 나도 '나'요 이 셋을 합(合)해도 '나'요 다시 둘로 나눠도 '나'요 셋으로, 넷으로 나눠도 '나'인 것이다. 이는 모든 생명선(生命線)이 끊이지 않는 한 거듭 환생(還生)하는 이치(理致)를 보인 것이 된다. 고(故)로 니 맘이 내 맘이요 내 맘이 니 맘이니 이 내 몸뚱이가 경계(境界)를 만드는 것일 뿐 우리 모두는 하나인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되 무릇 있는 바 상(相/따로따로)은 다 헛되고 망령된 것이니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 아님을 본다면 곧바로 진실한 여래(如來)를 본다고 하였다. 못 알아듣겠다면 이를테면 만일 나 자신이 고유한 것이며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저 사람도 그리 생각할 것이고 다른 사람도 그리 생각할 것이니 이 삼자간(三者間)에는 결국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된다. 고(故)로 반드시 환생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못 알아듣겠다면 삼 년 전(前)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체세포(體細胞)가 생사(生死)를 반복하면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신(精神)도 마찬가지이다. 변화(變化)를 거듭하면서 삼 년 전(前)의 의식(意識)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본시 어제는 영국에서 노닐다가 오늘은 미국에서 노닐게 되니 내일은 어디에서 노닐 것인가? 마치 손가락의 지문과도 같아 절대로 똑같지 않다. 비록 과거의 경험과 추억이 남아 있을지라도 지금의 나로써 생각하고 지금의 나로써 살게 마련인 것이다. 또한 추억이 소주기(小週期)의 기억(記憶)이라면 역사(歷史)는 대주기(大週期)의 기억이다. 진실을 왜곡할수록 오류(誤謬)를 범(犯)할지니 누구나 어리석은 때는 있다. 따라서 추억이 소중하다면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고 진실로써 행(行)해야 할 것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니 만약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고 생각한다면 어제의 다른 사람도 오늘의 내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개념(槪念)은 붙박이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개념(槪念)으로 서로 변화하는 와중에도 제각기 '나'라는 개념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되니 또한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고(故)로 반드시 환생한다는 것이다. 좀더 부연하자면 만약 당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면 이미 과거가 사라졌으므로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렇다고 슬퍼만 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생사(生死)를 반복하며 그와 같이 거듭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이 아름다우면 그의 죽음을 슬퍼하겠지만 추억이 추악(醜惡)하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그러니 생사(生死)를 반복하며 거듭 태어남은 또한 자연(自然)의 합리적인 배려라 아니할 수 없다. 술이 각각의 술잔에 담기고 나면 아상(我相)이 붙게되어 그 행태(行態)가 가지가지가 되니 그 행태(行態)가 가지가지이고 보면 마치 따로따로 인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 자신이 고유하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편으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술에 취(醉)할수록 보이는 게 없으니 망동(妄動)하게 마련이요 사욕(私慾)이 강할수록 덕(德)은 사라져 온갖 모순(矛盾)과 갈등(葛藤)의 근원(根源)이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무한한 시간이 펼쳐져 있음을 모르고 그 성급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파멸(破滅)을 초래하게되니 그 누구의 밭을 망치는 것인가? 여름이면 덥다고 불평하게 되고 겨울이면 춥다고 불평하게 되니 이것은 어느 한 시점(時點)에서의 편협(偏狹)한 생각일 뿐 전체적으로 자연(自然)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것이며 모두가 한 배를 탔음을 인식(認識)해야 할 것이다. 잠을 자매 두려움이 없는 것은 다음날 깨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며 죽음에 임하매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인 줄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부귀자(富貴者)는 아까워서 서럽고 빈천자(貧賤者)는 억울해서 서럽다. 이것은 자연(自然)의 조화를 무시한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고 상위의 '도'와 하위의 '도'가 서로 응(應)하는 것이니 이러한 자연(自然)의 조화가 나를 만들었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다. 부활(復活)이란 무엇인가? 죽은 몸뚱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인가? 예수가 몸소 사랑과 희생을 가르치고 또한 행(行)하였으며 석가도 스스로 고행(苦行)하며 자비(慈悲)와 환생(還生)하는 이치를 깨우치려 애썼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부귀(富貴)도 영원한 것은 아니며 빈천(貧賤)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한낱 돌멩이도 공(空)의 마음에서는 나와 다를 바가 없고 돌멩이도 구르면 한 생각이 일어난 것과 다름이 없으니 공(空)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으며 마음이 동요(動搖)하면 우주가 일어난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과거(過去)에도 이미 그랬고 미래(未來)에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내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니 내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것이야 어찌되건 내 마음대로 즐기며 살겠다 생각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위험하고도 크나큰 오류이다. 내 앞에 무한한 시간이 펼쳐져 있음을 모르고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의 끝인 줄로만 여겨 성급(性急)함이 앞서게 되니 결국 나 자신을 스스로 포박하여 파멸(破滅)에 이른다. 왜 뜬구름과 같은 순간의 변화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온통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여 한 순간의 이익과 쾌락에만 마음이 앞서게 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어려서는 부모(父母)에 의지하나 나이를 먹을수록 공(空)에 의지할지니 거기에는 누구에게나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무한(無限)한 영생(永生)의 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도(道)를 얻고 덕(德)을 시(施)함은 나의 밭을 잘 가꿈이니 대저 한번만의 농사(農事)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도(道)를 얻어 덕(德)을 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위한 것이라 하겠다. 밭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생명을 이어가고자 모든 것을 정성껏 보살피고 가꾸는 것이다. 남사고(南師古)가 이르되 사구(四口)가 합(合)하여 밭전(田)자를 이룬다 하였으니 사구(四口)는 각각의 자아(自我)가 된다. 크고도 넓구나! 십자출(十字出)하니 사구(四口)중의 어느 곳에도 통(通)하지 않음이 없도다. 내 마음속의 하느님이 비로소 세상에 나오시도다. 십승(十勝)은 산에도 없고 들에도 없으며 바다에도 없으니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곳에 있는 것이다. 인간(人間)의 정신(精神)이 육체(肉體)의 지배를 벗어나 상위구조로 진화해 나아감이 곧 열매이니 천국(天國)은 빛과 같은 세계요 쭉정이가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메마름은 곧 천국의 메마름이니 하늘이 슬퍼할 것이고 지상의 풍요함은 천국(天國)의 풍요함이니 하늘이 기뻐할 것이다. 나무의 열매는 모두가 보아서 알지만 정신의 열매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니 마음이 하나가되는 곳에 있다. 그 누가 진실로 복(福)되다 하겠는가? 쭉정이는 다시 싹을 틔울 수가 없으니 오늘 한 점의 고기를 먹고 끝내 도(道)를 이루지 못하면 지옥(地獄)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된다. 대저 선(善)이 아니면 무슨 정신(精神)이 필요할 것이며 그 행(行)함이 없으면 무슨 체(體)가 필요하리요. 누구든지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덕(德)을 시(施)하고 영생(永生)을 추구해야 한다. 그 외에 또 무엇에 의지하리!
수(數)를 끝없이 더해 나가면 무한(無限)에 이르고 무한(無限)에 일만(一萬)을 더해도 무한(無限)이요 무한에 일만(一萬)을 빼도 무한(無限)인 것이니 이것을 수(數)라고 해야하나? 본시 수(數)라는 것이 많고 적음을 분별하기 위한 것인데 무한(無限)에서는 명확한 분별이 불가능하니 수(數)가 아니라고 해야하나? 시간(時間)을 쪼개고 또 쪼개면 반드시 시간(時間)이 멎은 곳을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변화도 없고 한 생각도 없으니 유(有)라고 해야하나 무(無)라고 해야하나? 해가 뜨면 가족들은 제각기 흩어져서 각자의 일터로 모여 활동하고 해가 지면 사람들은 다시 흩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모여 휴식한다. 구름이 비가 되어 흩어지면 백천중류(百川衆流)가 대해(大海)로 모여들고 대해(大海)가 증발하여 흩어지면 다시 구름이 되어 모인다. 따라서 자연(自然)은 헤쳐 모여 헤쳐 모여를 반복하면서 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분열(分裂)이 극(極)에 이르러 그 허(虛)를 다 메우고 나면 더 이상의 분열(分裂)이 곤란(困難)해 진다. 그러나 자연(自然)은 결코 멈추어 서질 않아 그 모양(模樣)과 성질(性質)을 달리하고서라도 반드시 출(出)하고야 마는 것이니 분열(分裂)의 시(始)는 성장(成長)이요, 분열(分裂)의 극(極)은 통일(統一)이다. 분열의 시(始)는 모순(矛盾)과 대립(對立)이요, 분열(分裂)의 극(極)은 변이(變異)와 붕괴(崩壞)가 된다. 핵 폭탄이 출현하고 공해가 가중(加重)되고 기상이변이 나타나고 전엔 없던 괴질이 떠돌며 테러가 발생하는 등등 이는 분열(分裂)의 말(末)에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들이다. 흐르는 물을 가둘 수가 있는가?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가 있는가? 누구든지 변화를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였던가? 나름대로의 이유로 하여 성장발전(成長發展)을 거듭할수록 그에 상응(相應)하는 괴변(怪變)도 또한 가중(加重)되는 것이니 지금으로써는 그 끝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핵 폭탄이 나왔으니 이미 가둘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발전을 거듭하게 될 것이며 혹 자구책을 강구하더라도 변화가 앞서게 되어 감당해내지 못하니 부단히 변화하다가 결국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상위(上位)의 지도자가 한 순간의 욕심을 채우고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부자가 부당하게 이익을 취해 세상을 힘들게 하였다면 다시 환생하여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인가? 성경에 이르되 부자가 천국에 이르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 하였으니 그 부덕(不德)은 곧 나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나를 채우면 채울수록 그 만큼의 허(虛)를 다른 사람이 메워야 하는 것이니 물질이 발달할수록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게 된다. 공(空)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나니 왜 거듭 태어나는 이치를 모르는가? 내 안의 하느님을 왜 모르는가? 누구나 나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나 자신을 버리고 항상 내 안의 하느님께 염원(念願)하라. 도(道)를 얻음은 마치 콜룸부스의 달걀과도 같아 대단한 것은 아니나 모두가 쉽사리 깨닫지 못하며 만약 당신이 공(空)을 얻었다면 태극(太極)을 연구하라. 무한의 영생(永生)과 과학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전기(電氣)도 태극이요, 소리도 태극이요, 사계절도 태극이니 이내몸도 태극이요, 우주(宇宙)도 태극이다. 태극(太極)의 이치를 깨달아라. 복희(伏羲)가 이미 수 천 년 전에 밝혀 놓았고 부처가 손가락으로 가르친 바다. 이 모든 아상(我想)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붙어 있는 한 백년을 공부해도 천년을 공부해도 모를 것이요 불상을 모셔도 한낱 나무토막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현명한 자는 문득 깨달을지니 모두가 쓰지 않으면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도 상위의 부귀(富貴)한 자(者)가 진실로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으면 많은 고통이 따를지니 자신이 누린 만큼의 허(虛)를 메워야하기 때문이다. 혹 자연이 불공평하다고 탓하지 마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진실한 내 안의 하느님을 볼지니 천국(天國)이 예 아닌가? 왜 태극(太極)의 이치를 모르는가? 궁궁을을(弓弓乙乙)이 '8'이요 무한궤도(無限軌道)가 되고 이것은 또한 사인파(Sine Wave)의 원운동으로 나타낼 수 있다. 마치 거울과도 같은 것이니 내가 거울을 보면 그 속에 내가 있고 그 속의 나는 또한 나를 보고 있다. 내가 행(行)한 바가 결국은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니 덕(德)의 광명(光明)이 아니면 천국(天國)은 없다.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고 아무도 구하려 하지 않으니 세상의 모든 철학(哲學)은 모두가 헛소리요 망상이 되나니 모두가 아상(我相)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붙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도(道)를 모르고 술(術)을 쫓음은 불가용(不可用)이요 도(道)를 모르고 과학(科學)을 쫓음은 또한 불가용(不可用)이다. 그러니 도(道)를 모르고 구하려 하는 것은 모두가 망상(妄想)이 되는 것이다. 만물(萬物)이 공(空)에서 시(始)하고 공(空)에는 본시 목적이 없으니 절대적인 존재의 목적이란 없다. 그저 배고프니 먹고 먹자니 좀 더 좋은 것을 찾게되고 더 좋은 것을 찾자니 더욱 더 움직여야 하는 것으로 상대적인 목적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존재(存在)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우주의 목적은 영생이며 끊임없는 순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즉생(死卽生)하니 그 사이에는 시공(時空)이 끊겼기 때문이다. 대저 선(善)이 아니면 무슨 정신(精神)이 필요하며 그 행(行)함이 없으면 무슨 체(體)가 필요하리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삶이 불리하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변화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거지도 한낱 돌멩이도... 그리하여 자연은 본래 무목적적이지만 각자가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 거듭 태어나면서 부자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성인도 되는 것이니 여기에 집착하지 말고 베풀고 나누어주는데 집착하라. 부자도 대통령도 성인도 필요치 않으리라.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움직이려면 더욱더 많은 반발력이 필요한 것이니 반드시 그 허(虛)를 메워야 한다. 대저 에너지 법칙이 그러하며 자연의 법칙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변화(變化)의 이치를 깨달아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따라서 어제의 나는 분명히 오늘의 내가 아니니 어제의 다른 사람도 오늘의 나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고(故)로 반드시 환생한다. 만약 나 자신을 절대적이고 고유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아상(我相)이 붙은 것이요,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인상(人相)이 붙은 것이요, 지역을 따지고 피부색을 따지고 내나라 내 민족만을 따진다면 이는 중생상(衆生相)이 붙은 것이요,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의 끝이니 더 빨리 더 쉽게 성급히 모든 것을 얻으려 한다면 이는 수자상(壽者相)이 붙은 것으로 이상 모두가 다 망상(妄想)이 되는 것이다. 쇠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하였던가? 공(空)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주의 목적은 영생이며 끊임없는 순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나 자신을 버려라. 가장 오래 사는 자가 가장 강한 것이니 오래 살려면 나 자신을 버려라. 죽음을 두려워 말지니 비록 육체의 고통은 두려울 것이나 이것은 또한 각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자연의 배려인 것이다. 당장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영생을 추구하라. 내일을 걱정 말고 오늘에 충실하라. 필요 이상의 것들을 취하려 하지 말 것이며 나누어 베풀어라. 대저 선(善)이 아니면 무슨 정신(精神)이 필요 할 것이며 그 행(行)함이 없으면 무슨 체(體)가 필요하리요. 지옥(地獄)이라면 차라리 정신이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니 모든 생명선(生命線)이 끊이질 않는 한 목숨을 버린다고 해서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바는 명료(明了)하다.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을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한다. 성인(聖人)은 모든 만유(萬有)를 자기자신과 같이 여기지만 세인(世人)은 자기자신만이 유일한 것으로 여긴다. 성인(聖人)은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만 세인(世人)은 자기 자신만의 것을 가지려 애쓴다. 성인(聖人)은 모두를 본래의 하나되는 자리로 마음을 환원시키려 하고 세인(世人)은 자꾸 만들고 분열시켜 개성을 찾고 어지럽히며 또한 번뇌한다. 자고 이래로 성인(聖人)들이 가르친 바는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다 하겠다. 각각의 종교(宗敎)들이 그 모양과 빛깔을 달리할지라도 성인(聖人)들이 가르친 바는 둘이 아니다. 어리석은 인간(人間)들이 왜곡하고 서로 고집하니 대소(大小)를 불문하고 이러한 모든 아상(我相)과 중생상(衆生相)을 다 끊어 버려야 통합(統合)이 이루어지며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분열(分裂)하고 또한 새로이 생성(生成)되어 결국은 여러 가지 모순(矛盾)과 갈등(葛藤)을 야기(惹起)함으로써 마침내는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성인(聖人)들은 이미 죽고 없으며 우리가 추구(追求)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몸뚱이가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 근본이 다름이 없으니 몸뚱이가 나뉜 것이지 그 마음이 나뉜 것은 아니다. 예수와 석가를 따르지 말지니 항상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로 희생하며 사랑과 부활의 이치를 가르치려 애썼고 석가도 부귀(富貴)를 포기하고 스스로 고행(苦行)을 하며 자비와 환생(還生)의 이치를 가르치려 애썼다. 도(道)와 덕(德)과 예(禮)가 하나라도 벗어남이 없으니 진실로 성인(聖人)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성인(聖人)들이 가르친 바를 요약하자면 두 길 뿐이다. 하나는 생멸문(生滅門)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환멸문(還滅門)이라는 것이다. 생멸문(生滅門)이란 이를테면 나오면 사라지는 것이 있고 사라지면 나오는 것이 있으니 그 생사(生死)의 오고 감과 한 생각의 들고남이 잠시라도 끊이질 않는 것이다. 내가 자식을 낳음은 기쁜 일이 되지만 한편 욕심(慾心)과 번뇌(煩惱)의 근원(根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니 한 생각도 마찬가지여서 망상(妄想)으로 하여금 그 근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본래 없던 것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모든 일체만법(一切萬法)이 벌어지게 되는 것으로 이 우주(宇宙)가 생기고부터 이 한 몸뚱이와 이 한 생각이 끊이질 않고 일어남으로써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시비(是非)가 끊이질 않고 선악(善惡)과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의 투쟁장(鬪爭場)이 되고 마는 것이니 이상 모두를 가리켜서 생멸문(生滅門)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이 진실로 가르치려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환멸문(還滅門)이라는 것이다. 환멸문(還滅門)이란 이 우주(宇宙)가 생기기전 이 한 몸뚱이와 이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본래의 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으니 모두가 하나가 되어 영생(永生)하는 자리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으며 부귀(富貴)도 빈천(貧賤)도 없어서 모두가 공평하며 치우침이 없는 본래의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聖人)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들의 마음을 본래의 그 자리로 귀환(歸還)시켜 각각의 마음이 순수성(純粹性)을 되찾아 통일(統一)하게 하는 것이다. 본시 현실세계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환상의 세계를 노니는 것으로 거듭 깨어나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영생(永生)하게 된다. 이것을 자각(自覺)하여 마음을 본래의 그 자리로 되돌림으로써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영원한 안식(安息)을 얻기 위함이다. 이것이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는 것이다. 일곱 색깔 무지개가 모두 하나의 빛에서 나온 것임을 어찌 애써 부정하려 하는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어찌 사람이 다른 것인가? 다른 것은 피부색이지 사람이 아니다. 몸뚱이가 구분된 것이지 마음이 본래 구분된 것은 아니다. 대저 온 우주만유(宇宙萬有)가 다 하나의 뿌리요 일체태극(一 太極)인 고(故)로 만일 이와 같은 이치(理致)를 안다면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둘이 아니요 몸뚱이가 다르다고 해서 마음이 둘이 아니요 종교(宗敎)가 다르다고 해서 천하(天下)에 도(道)가 둘이 아님을 또한 알 것이다. 유교이든 불교이든 십자가이든 간에 스스로 경계를 두어 가두면 이는 중생상(衆生相)이 붙은 것으로 이렇게 되면 모든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을 하나의 통일된 진리로 파악하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성인들의 말씀과 진리를 두루 관찰(觀察)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종교(宗敎)와 철학(哲學)의 번무(蕃茂)에 종지부를 찍고 바야흐로 하나의 통일(統一)된 핵(核)을 형성(形成)할 때이다. 누가 앞장서야 하는가? 개개인은 물론이요 무엇보다도 종교(宗敎)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종교(宗敎)는 모든 마음의 중심축(中心軸)이 기 때문이다. 사랑과 희생과 자비를 가르치나 실제로는 분열하고 새로이 생성되니 이렇게 되면 진(眞)이 없음을 증명(證明)하는 것이 된다. 누가 희생해야 하나? 종교가 스스로 희생하여야 한다. 번성(蕃盛)하매 하나의 핵(核)을 위한 것이니 이것이 자연(自然)의 이치요 도즉자연(道卽自然)인 것이다. 그 때에는 고개를 들 수 없을지니 스스로 희생한 자만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순간에 집착하지 말아라. 영생을 믿어라. 비록 지금은 각자의 위치에 충실하되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이루어야 결실(結實)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또한 시점(時點)의 문제이지 어찌 싫다고 되지 않으랴. 아무도 변화를 막을 순 없다. 오늘날 공해가 가중되고 개인은 물론 집단적인 온갖 이기주의가 성행하며 작금(昨今)에 유행되는 말세론(末世論)은 오히려 이것을 이용함으로써 온갖 그럴싸한 언어(言語)로 포장(包藏)하여 현혹(眩惑)하기 일쑤다. 이러한 때일수록 각자의 자각(自覺)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다. 우리나라는 도(道)의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국기(國旗)는 태극기(太極旗)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도리도리(道理道理) 각궁(覺弓)'을 들으며 자란다. 각궁(覺弓)이란 태극(太極)의 이치를 깨우치라는 말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각 지방의 이름은 모두 '도(道)'자로 끝나게 되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도(道)의 나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 이래(以來)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理念)은 그 당시로써는 그야말로 도리(道理)가 아니면 발현(發顯)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바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는 물론이요 일제하에 이르기까지 도리(道理)없이 이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욕망(慾望)이 그 얼마나 허황(虛荒)된 망상(妄想)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현란한 물질(物質)과 복잡한 지식(知識)으로써 승부(勝負)를 걸매 도리(道理)를 져버리는 것과 또한 같은 것이라 말 할 수 있겠다. 유혹(誘惑)이 있으면 취(醉)하게 되고 심취(深醉)하면 앞뒤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 누가 알랴? 얼른 공(空)으로 귀환(歸還)하여야 하는 것이다. 색(色)의 청정(淸淨)함은 투명한 것이요 마음의 청정(淸淨)함은 공(空)인 것이다. 태극(太極)은 '꼬물꼬물'이다. 그리하여 고대(古代)에는 '궁(弓)'자와 '을(乙)'자로도 표현하였으니 또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선두(先頭)에 서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은 그 누구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내 나라 내 민족만을 위한 것도 아닌 모든 류(類)의 영생(永生)을 위한 그야말로 전 우주적인 발상(發想)이라 말할 수 있겠다. 고대(古代)의 선지자(先知者)들은 왜 그토록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그리고 태극(太極)에 주안점을 두고 생각하였을까? 그것은 이것이야말로 자연(自然)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도(道)를 구함에 있어 또한 베풀고 정(正)히 인도(引導)함이 없다면 요즘 매스컴에서 흔히 말하는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진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단 한푼의 값어치도 없는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며 마음의 통일이 선행(先行)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음의 통일을 이루어야 모든 투쟁이 사라질 것이니 우리가 항상 꿈꾸는 낙원의 세계가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 만으론 부족해서 나누어 놓았더니 진실로 서로 돕고 사랑할진대 서로 할퀴어 상처를 주더라! 혼자만으로는 영생하지 못하며 혼자만으로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더라! 술을 술잔에 나누어 담으니 모두가 취하네! 메아리가 맑게 울리면 천국(天國)의 문(門)이 열리고 메아리가 슬피 울리면 지옥(地獄)의 문(門)이 열리는 도다. 메아리도 환상이요 이세상도 환상이로다. 내 안의 하느님이 진정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해와 달이 번갈아 찾아들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며 하위의 '도'와 상위의 '도'가 서로 응(應)하니 시간(時間)이 흘러도 이 이치는 변함이 없도다. 도(道)가 둘이 아니니 그 길을 따라 걸어가라. 방황하고 벗어나는 자는 반드시 후회할지니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 시공(時空)
흙은 공(空)을 통해 순환하고 몸은 흙을 통해 순환하고 마음은 몸을 통해 순환하니 그 모양과 성질을 달리하여 시간에 따라 응한다. 정신(精神)은 귀(鬼)가 되어 공(空)에 거(居)하고 육신(肉身)은 흙이 되어 토(土)에 거(居)한다. 정신(精神)은 공(空)에서 순환(循環)하게 되고 육신(肉身)은 지(地)에서 순환(循環)하게 되니 천지(天地)가 나 자신이 되어 어찌 너와 내가 다르다 이르겠는가? 만물(萬物)이 공(空)에서 나온 고(故)로 만약 공(空)이 없으면 변화(變化)도 없다. 이를테면 '효자(孝子)'라는 말은 어떻게 나왔는가? 불효(不孝)하는 놈들이 많으니 '효자'라는 말이 나온 것이지 모두가 효자라면 굳이 '효자'라는 말이 나올 이유가 없다. 공(空)이 있으매 변화(變化)가 있는 것이니 공(空)은 만물(萬物)의 어머니가 된다.
변화(變化)로써 순환을 거듭함에 따라 자연(自然)에는 생장수장(生長收藏)하는 이치가 있다. 동(動)하면 생(生)이요, 정(靜)하면 저장(貯藏)된 것으로 본다. 겨울이 오면 모든 활동(活動)을 멈추고 각각의 씨앗들은 땅속에 저장되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요즘 컴퓨터(Computer)를 모르면 컴맹이라 하여 놀림받기 일수이므로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컴퓨터 자체를 무극(無極)으로 가정한다면 전원을 켠 순간은 태극(太極)이 될 것이며 이때부터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다. 음양(陰陽)의 동정(動靜)하는 이치로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활동(活動)하여 인터넷(Internet)도 하고 게임(Game)도 하고 수많은 세상이 열리고 사라지고 필요한 것들은 저장하고 또한 필요 없는 것들은 영구히 삭제해 버린다. 또한 전원을 끄면 저장된 것들만 남게 되는데 이것은 활동(活動)하지 아니하므로 분명히 생(生)은 아닌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이러한 우주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는 공(空)이란 그야말로 순수한 무(無)의 개념이다. 그러나 선지자(先知者)들이 보았던 바 공(空)이란 일체만유(一切萬有)를 품고 저장한 하나의 핵(核)으로써의 의미이며 모든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또한 그곳으로부터 생출(生出)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공(空)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바의 절대적인 무(無)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공(空)이라는 하드디스크(Hard Disk)는 우리의 감각을 통(通)해서는 느낄 수 없으나 만물(萬物)은 반드시 이 문(門)을 통(通)해 출입(出入)하며 생사(生死)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공(空)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으며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고 시간(時間)도 공간(空間)도 없다. 또한 만물(萬物)이 공(空)에서 활동(活動)하게 됨은 이러한 공(空)이야말로 모든 만유(萬有)의 모체(母體)이자 또한 영원한 휴식처요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변화(變化)는 반드시 시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영화(映畵) 필름(Film)과 같아서 우리는 매양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變化)를 관찰(觀察)하게 된다. 또한 필름의 경우 변화와 변화 사이에는 항상 '시공(時空)의 끊김'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우주의 실제시간이 다를 수가 있으며 또한 같은 공간 내에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가 공존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된다. 이를테면 우주(宇宙)가 일정한 시간을 간격으로 하여 거듭 사상(寫像/Scan)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모든 감각이 그 사상(寫像/Scan)된 순간의 변화(變化)만을 인식(認識)하고 기억(記憶)하도록 구성(構成)되었다면 결국 인간은 그 시공(時空)이 끊어진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이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달은 매 시간마다 동(東)에서 서(西)로 이동하나 매일 밤 같은 시간(時間)에 관측하게 되면 서(西)에서 동(東)으로 움직인다. 만약 그 사이에 시공(時空)이 끊겼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식(認識)하지 못할 것이므로 달이 그저 서(西)에서 동(東)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알 것이다. 또한 필름을 빠르게 돌리든지 느리게 돌리든지 간에 그 내부의 인식체(認識體)가 실제로 느끼는 시간상의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의식계 시간의 밀도(密度)에 따라 우리의 생체리듬도 또한 상대적으로 그 반응속도를 달리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시간(時間)이 빠르면 생체리듬 또한 빠르게 진행(進行)되어 상대적으로 나이를 빨리 먹게 되고 시간(時間)이 느리면 생체리듬 또한 느리게 진행(進行)되어 상대적으로 나이를 덜 먹게 될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 차이(差異)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지금 우리의 세계와 파장을 달리하는 곳이 우주 저편에 있다면 시간의 흐름 또한 다를 것이다. 시간뿐만 아니라 매번 재생성(再生成) 될 때마다 모든 것이 비례적으로 그 크기를 달리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 크기의 변화를 인식(認識)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우주만큼 클 수도 있으며 어느 순간에는 내가 먼지만큼 작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시공(時空)의 끊김은 같은 공간 내에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가 가능(可能)하게 되는데 같은 공간 내에 서로 다른 세계가 번갈아 가며 사상(寫像/Scan)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TV를 보는 것처럼 우리가 어디에 소속(所屬)되었는가에 따라 변화의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변화(變化)가 이러하다면 흥미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시간(時間)에 쫓기어 산다. 그러나 조물주(造物主)가 우주(宇宙)를 생성(生成)하는데 있어서 천년(千年)이 걸린들 만년(萬年)이 걸린들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 크기도 또한 개미만큼이든 코끼리만큼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 끊긴 시간 속에 또 다른 우주를 생성(生成)한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태산(泰山)이 코 구멍에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것이 소위(所謂) 귀신(鬼神)이 행(行)하는 바가 아니랴. 선지자(先知者)들은 생성소장(生成消藏)하는 변화(變化)로써 만물(萬物)을 인식(認識)한 바 절대적인 시간(時間)이나 절대적인 공간(空間)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하나의 먼지에도 무한(無限)의 공간이 존재(存在)한다 했으니 그러한 무한(無限)의 공간(空間)을 일일이 다 통과(通過)하려면 또한 무한(無限)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가 실제로 그와 같지 않음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오가기 때문으로 본 것이다. 무극(無極)은 공(空)의 개념(槪念)이요 태극(太極)은 변화(變化)의 개념(槪念)이 된다. 흘러간 과거는 없어진 것일까? 밤하늘의 별을 보라. 그것은 이미 과거의 별빛이다. 기억의 연속됨은 또한 무엇인가? 어찌 과거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인간(人間)의 정신(精神)이 서로 위상차(位相差)를 달리하면서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는 식으로 서로의 정신(精神)을 공유(共有)한다면 주위의 행태(行態)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방관(傍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불행한 사람을 돕고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는 것은 결국 나를 돕고 구하는 것이 된다. 흘러가는 시냇물에 가랑잎을 띄우면 가랑잎은 물결을 타고 떠내려간다. 그러나 근원(根源)이 끊이지 않는 한 그 물결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모든 것이 순환하여 돌아간다. 대저 우주(宇宙)가 하나의 태극(太極)이어늘 시간(時間)이라고 어찌 예외(例外)가 있으랴. 어째든 이것은 사고력의 확장된 예를 보인 것이다. 자연(自然)의 수많은 변화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기 쉽상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맹점(盲點)이다. 실제로 자연(自然)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맞물려 돌아가며 인간의 생각이 미치는 것과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 또한 맞물려 돌아간다. 만약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제의 변화요 생각이 닿는 것만이 실제의 진리로 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거듭하여 우리 모두의 터전이 됨을 인지(認知)해야 할 것이며 절대적인 삶과 절대적인 죽음이란 없는 것이며 진정한 '나'란 나만의 '나'가 아님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나'라는 것도 없는 것이 된다.
도(道)안에 덕(德)이 있음이요 도(道)가 반드시 덕(德)은 아니다. 덕(德)안에 예(禮)가 있음이요 덕(德)이 반드시 예(禮)는 아니다. 도(道)는 반드시 광명(光明)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많으나 덕(德)은 광명(光明)하여 세상을 밝게 비추며 예(禮)는 겉포장에 불과하다. 도(道)는 공(空)의 마음으로 시(始)하나 덕(德)은 말과 행동으로 시(始)한다. 예(禮)는 말과 행동을 보기 좋게 다듬고 꾸미는데 있다. 도(道)는 공(空)으로부터 시(始)하고 공(空)은 만유(萬有)의 어미요 일사일물(一事一物)도 여기에서 시(始)하지 않음이 없으니 무릇 모든 종교(宗敎)와 철학(哲學)과 과학(科學)도 여기로부터 시(始)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모래로써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정(正)한 것이 못된다. 예(禮)를 말할 것 같으면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이 배려이다. 공자(孔子)가 이르되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말라 하였으니 예(禮)에 관한 한 그 어떠한 예(例)라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덕(德)을 말할 것 같으면 말과 행동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유익(有益)함을 주는 것이며 도(道)를 말할 것 같으면 모르겠다. 도덕경(道德經)에 이르되 세간(世間)에서 흔히 말하는 도(道)는 도(道)가 아니며 도(道)를 말할 것 같으면 세간(世間)사람들이 비웃게 되니 사람들이 비웃지 않는 도(道)는 또한 도(道)가 아니라 하였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극(極)에 이르면 반드시 시간(時間)이 멎은 자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변화(變化)는 사라지게 되고 변화(變化)가 없으니 유(有)이겠는가? 무(無)이겠는가? 경계(境界)가 없으니 공(空)이라 이르고 공(空)은 모든 만유(萬有)의 어미요 근간(根幹)이 된다. 여기에는 한 생각도 없고 너와 내가 따로 없으니 공(空)은 모두가 하나되는 본래(本來)의 자리가 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이르되 색(色/물질)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않아서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空)이 곧 색(色)이라 하였으니 만일 물질(物質)이라는 것이 절대적(絶對的) 알갱이 즉, 입자(粒子)로 구성이 되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는 물론이요 한 생각도 자연의 순환(循環)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알갱이란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고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변화(變化)라 할 수 없으니 거기에 무슨 생사(生死)가 있고 무슨 생각이 있으며 무슨 자연(自然)의 순환이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공(空)이 있으니 변화(變化)가 있고 그러한 변화는 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다. 물질(物質)을 아무리 쪼개어 봐야 변화(變化)만이 목도(目睹)될 뿐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되 이 세상은 그 이름이 이 세상일 뿐 실제의 이 세상이 아니라 하였다. 이 세상은 환상에 불과할 따름이요 따라서 자연(自然)은 인간(人間)으로 하여금 최고의 마술사인 것이다. 꿈속의 모든 것들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니 그 속의 모든 번뇌(煩惱)와 희비(喜悲)도 또한 나로부터 기인(起因)된 것이다. 환상의 세계(世界)에서는 불가능이란 없다. 만화영화를 보라. 무슨 불가능이 있겠는가? 다만 천(天)의 결정일 따름이니 천(天)이 나이고 내가 또한 천(天)이다. 따라서 천국(天國)은 내가 만드는 것이며 모든 아상(我相/나 따로)과 인상(人相/너 따로)과 중생상(衆生相/우리 따로)과 수자상(壽者相/운명 따로)을 끊어 각각의 마음이 하나로 통일(統一)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누구나 이 세상에 와서 한 번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일 뿐 삶에 취(醉)하여 이내 잊고 죽을 때까지 그 취기(醉氣)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다가 가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人生)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저 사람도 '나'라는 의식(意識)이 있고 이 사람도 '나'라는 의식(意識)이 있고 나 또한 '나'라는 의식(意識)이 있으니 저이도 '나'요 이이도 '나'요 나도 '나'요 이 셋을 합(合)해도 '나'요 다시 둘로 나눠도 '나'요 셋으로, 넷으로 나눠도 '나'인 것이다. 이는 모든 생명선(生命線)이 끊이지 않는 한 거듭 환생(還生)하는 이치(理致)를 보인 것이 된다. 고(故)로 니 맘이 내 맘이요 내 맘이 니 맘이니 이 내 몸뚱이가 경계(境界)를 만드는 것일 뿐 우리 모두는 하나인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되 무릇 있는 바 상(相/따로따로)은 다 헛되고 망령된 것이니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 아님을 본다면 곧바로 진실한 여래(如來)를 본다고 하였다. 못 알아듣겠다면 이를테면 만일 나 자신이 고유한 것이며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저 사람도 그리 생각할 것이고 다른 사람도 그리 생각할 것이니 이 삼자간(三者間)에는 결국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된다. 고(故)로 반드시 환생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못 알아듣겠다면 삼 년 전(前)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체세포(體細胞)가 생사(生死)를 반복하면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신(精神)도 마찬가지이다. 변화(變化)를 거듭하면서 삼 년 전(前)의 의식(意識)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본시 어제는 영국에서 노닐다가 오늘은 미국에서 노닐게 되니 내일은 어디에서 노닐 것인가? 마치 손가락의 지문과도 같아 절대로 똑같지 않다. 비록 과거의 경험과 추억이 남아 있을지라도 지금의 나로써 생각하고 지금의 나로써 살게 마련인 것이다. 또한 추억이 소주기(小週期)의 기억(記憶)이라면 역사(歷史)는 대주기(大週期)의 기억이다. 진실을 왜곡할수록 오류(誤謬)를 범(犯)할지니 누구나 어리석은 때는 있다. 따라서 추억이 소중하다면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고 진실로써 행(行)해야 할 것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니 만약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고 생각한다면 어제의 다른 사람도 오늘의 내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개념(槪念)은 붙박이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개념(槪念)으로 서로 변화하는 와중에도 제각기 '나'라는 개념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되니 또한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고(故)로 반드시 환생한다는 것이다. 좀더 부연하자면 만약 당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면 이미 과거가 사라졌으므로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렇다고 슬퍼만 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생사(生死)를 반복하며 그와 같이 거듭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이 아름다우면 그의 죽음을 슬퍼하겠지만 추억이 추악(醜惡)하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그러니 생사(生死)를 반복하며 거듭 태어남은 또한 자연(自然)의 합리적인 배려라 아니할 수 없다. 술이 각각의 술잔에 담기고 나면 아상(我相)이 붙게되어 그 행태(行態)가 가지가지가 되니 그 행태(行態)가 가지가지이고 보면 마치 따로따로 인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 자신이 고유하고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편으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술에 취(醉)할수록 보이는 게 없으니 망동(妄動)하게 마련이요 사욕(私慾)이 강할수록 덕(德)은 사라져 온갖 모순(矛盾)과 갈등(葛藤)의 근원(根源)이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무한한 시간이 펼쳐져 있음을 모르고 그 성급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파멸(破滅)을 초래하게되니 그 누구의 밭을 망치는 것인가? 여름이면 덥다고 불평하게 되고 겨울이면 춥다고 불평하게 되니 이것은 어느 한 시점(時點)에서의 편협(偏狹)한 생각일 뿐 전체적으로 자연(自然)은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것이며 모두가 한 배를 탔음을 인식(認識)해야 할 것이다. 잠을 자매 두려움이 없는 것은 다음날 깨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며 죽음에 임하매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인 줄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부귀자(富貴者)는 아까워서 서럽고 빈천자(貧賤者)는 억울해서 서럽다. 이것은 자연(自然)의 조화를 무시한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고 상위의 '도'와 하위의 '도'가 서로 응(應)하는 것이니 이러한 자연(自然)의 조화가 나를 만들었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다. 부활(復活)이란 무엇인가? 죽은 몸뚱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인가? 예수가 몸소 사랑과 희생을 가르치고 또한 행(行)하였으며 석가도 스스로 고행(苦行)하며 자비(慈悲)와 환생(還生)하는 이치를 깨우치려 애썼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부귀(富貴)도 영원한 것은 아니며 빈천(貧賤)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한낱 돌멩이도 공(空)의 마음에서는 나와 다를 바가 없고 돌멩이도 구르면 한 생각이 일어난 것과 다름이 없으니 공(空)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으며 마음이 동요(動搖)하면 우주가 일어난 것과 다름이 없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과거(過去)에도 이미 그랬고 미래(未來)에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내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니 내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것이야 어찌되건 내 마음대로 즐기며 살겠다 생각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위험하고도 크나큰 오류이다. 내 앞에 무한한 시간이 펼쳐져 있음을 모르고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의 끝인 줄로만 여겨 성급(性急)함이 앞서게 되니 결국 나 자신을 스스로 포박하여 파멸(破滅)에 이른다. 왜 뜬구름과 같은 순간의 변화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온통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여 한 순간의 이익과 쾌락에만 마음이 앞서게 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어려서는 부모(父母)에 의지하나 나이를 먹을수록 공(空)에 의지할지니 거기에는 누구에게나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무한(無限)한 영생(永生)의 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도(道)를 얻고 덕(德)을 시(施)함은 나의 밭을 잘 가꿈이니 대저 한번만의 농사(農事)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도(道)를 얻어 덕(德)을 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위한 것이라 하겠다. 밭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생명을 이어가고자 모든 것을 정성껏 보살피고 가꾸는 것이다. 남사고(南師古)가 이르되 사구(四口)가 합(合)하여 밭전(田)자를 이룬다 하였으니 사구(四口)는 각각의 자아(自我)가 된다. 크고도 넓구나! 십자출(十字出)하니 사구(四口)중의 어느 곳에도 통(通)하지 않음이 없도다. 내 마음속의 하느님이 비로소 세상에 나오시도다. 십승(十勝)은 산에도 없고 들에도 없으며 바다에도 없으니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곳에 있는 것이다. 인간(人間)의 정신(精神)이 육체(肉體)의 지배를 벗어나 상위구조로 진화해 나아감이 곧 열매이니 천국(天國)은 빛과 같은 세계요 쭉정이가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메마름은 곧 천국의 메마름이니 하늘이 슬퍼할 것이고 지상의 풍요함은 천국(天國)의 풍요함이니 하늘이 기뻐할 것이다. 나무의 열매는 모두가 보아서 알지만 정신의 열매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니 마음이 하나가되는 곳에 있다. 그 누가 진실로 복(福)되다 하겠는가? 쭉정이는 다시 싹을 틔울 수가 없으니 오늘 한 점의 고기를 먹고 끝내 도(道)를 이루지 못하면 지옥(地獄)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된다. 대저 선(善)이 아니면 무슨 정신(精神)이 필요할 것이며 그 행(行)함이 없으면 무슨 체(體)가 필요하리요. 누구든지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덕(德)을 시(施)하고 영생(永生)을 추구해야 한다. 그 외에 또 무엇에 의지하리!
수(數)를 끝없이 더해 나가면 무한(無限)에 이르고 무한(無限)에 일만(一萬)을 더해도 무한(無限)이요 무한에 일만(一萬)을 빼도 무한(無限)인 것이니 이것을 수(數)라고 해야하나? 본시 수(數)라는 것이 많고 적음을 분별하기 위한 것인데 무한(無限)에서는 명확한 분별이 불가능하니 수(數)가 아니라고 해야하나? 시간(時間)을 쪼개고 또 쪼개면 반드시 시간(時間)이 멎은 곳을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변화도 없고 한 생각도 없으니 유(有)라고 해야하나 무(無)라고 해야하나? 해가 뜨면 가족들은 제각기 흩어져서 각자의 일터로 모여 활동하고 해가 지면 사람들은 다시 흩어져서 각자의 집으로 모여 휴식한다. 구름이 비가 되어 흩어지면 백천중류(百川衆流)가 대해(大海)로 모여들고 대해(大海)가 증발하여 흩어지면 다시 구름이 되어 모인다. 따라서 자연(自然)은 헤쳐 모여 헤쳐 모여를 반복하면서 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분열(分裂)이 극(極)에 이르러 그 허(虛)를 다 메우고 나면 더 이상의 분열(分裂)이 곤란(困難)해 진다. 그러나 자연(自然)은 결코 멈추어 서질 않아 그 모양(模樣)과 성질(性質)을 달리하고서라도 반드시 출(出)하고야 마는 것이니 분열(分裂)의 시(始)는 성장(成長)이요, 분열(分裂)의 극(極)은 통일(統一)이다. 분열의 시(始)는 모순(矛盾)과 대립(對立)이요, 분열(分裂)의 극(極)은 변이(變異)와 붕괴(崩壞)가 된다. 핵 폭탄이 출현하고 공해가 가중(加重)되고 기상이변이 나타나고 전엔 없던 괴질이 떠돌며 테러가 발생하는 등등 이는 분열(分裂)의 말(末)에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들이다. 흐르는 물을 가둘 수가 있는가?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가 있는가? 누구든지 변화를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였던가? 나름대로의 이유로 하여 성장발전(成長發展)을 거듭할수록 그에 상응(相應)하는 괴변(怪變)도 또한 가중(加重)되는 것이니 지금으로써는 그 끝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핵 폭탄이 나왔으니 이미 가둘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발전을 거듭하게 될 것이며 혹 자구책을 강구하더라도 변화가 앞서게 되어 감당해내지 못하니 부단히 변화하다가 결국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상위(上位)의 지도자가 한 순간의 욕심을 채우고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부자가 부당하게 이익을 취해 세상을 힘들게 하였다면 다시 환생하여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인가? 성경에 이르되 부자가 천국에 이르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 하였으니 그 부덕(不德)은 곧 나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나를 채우면 채울수록 그 만큼의 허(虛)를 다른 사람이 메워야 하는 것이니 물질이 발달할수록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게 된다. 공(空)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나니 왜 거듭 태어나는 이치를 모르는가? 내 안의 하느님을 왜 모르는가? 누구나 나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나 자신을 버리고 항상 내 안의 하느님께 염원(念願)하라. 도(道)를 얻음은 마치 콜룸부스의 달걀과도 같아 대단한 것은 아니나 모두가 쉽사리 깨닫지 못하며 만약 당신이 공(空)을 얻었다면 태극(太極)을 연구하라. 무한의 영생(永生)과 과학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전기(電氣)도 태극이요, 소리도 태극이요, 사계절도 태극이니 이내몸도 태극이요, 우주(宇宙)도 태극이다. 태극(太極)의 이치를 깨달아라. 복희(伏羲)가 이미 수 천 년 전에 밝혀 놓았고 부처가 손가락으로 가르친 바다. 이 모든 아상(我想)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붙어 있는 한 백년을 공부해도 천년을 공부해도 모를 것이요 불상을 모셔도 한낱 나무토막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현명한 자는 문득 깨달을지니 모두가 쓰지 않으면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무엇보다도 상위의 부귀(富貴)한 자(者)가 진실로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으면 많은 고통이 따를지니 자신이 누린 만큼의 허(虛)를 메워야하기 때문이다. 혹 자연이 불공평하다고 탓하지 마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진실한 내 안의 하느님을 볼지니 천국(天國)이 예 아닌가? 왜 태극(太極)의 이치를 모르는가? 궁궁을을(弓弓乙乙)이 '8'이요 무한궤도(無限軌道)가 되고 이것은 또한 사인파(Sine Wave)의 원운동으로 나타낼 수 있다. 마치 거울과도 같은 것이니 내가 거울을 보면 그 속에 내가 있고 그 속의 나는 또한 나를 보고 있다. 내가 행(行)한 바가 결국은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니 덕(德)의 광명(光明)이 아니면 천국(天國)은 없다.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고 아무도 구하려 하지 않으니 세상의 모든 철학(哲學)은 모두가 헛소리요 망상이 되나니 모두가 아상(我相)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붙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도(道)를 모르고 술(術)을 쫓음은 불가용(不可用)이요 도(道)를 모르고 과학(科學)을 쫓음은 또한 불가용(不可用)이다. 그러니 도(道)를 모르고 구하려 하는 것은 모두가 망상(妄想)이 되는 것이다. 만물(萬物)이 공(空)에서 시(始)하고 공(空)에는 본시 목적이 없으니 절대적인 존재의 목적이란 없다. 그저 배고프니 먹고 먹자니 좀 더 좋은 것을 찾게되고 더 좋은 것을 찾자니 더욱 더 움직여야 하는 것으로 상대적인 목적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존재(存在)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우주의 목적은 영생이며 끊임없는 순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즉생(死卽生)하니 그 사이에는 시공(時空)이 끊겼기 때문이다. 대저 선(善)이 아니면 무슨 정신(精神)이 필요하며 그 행(行)함이 없으면 무슨 체(體)가 필요하리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삶이 불리하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변화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거지도 한낱 돌멩이도... 그리하여 자연은 본래 무목적적이지만 각자가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게 된다. 거듭 태어나면서 부자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성인도 되는 것이니 여기에 집착하지 말고 베풀고 나누어주는데 집착하라. 부자도 대통령도 성인도 필요치 않으리라.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움직이려면 더욱더 많은 반발력이 필요한 것이니 반드시 그 허(虛)를 메워야 한다. 대저 에너지 법칙이 그러하며 자연의 법칙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변화(變化)의 이치를 깨달아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따라서 어제의 나는 분명히 오늘의 내가 아니니 어제의 다른 사람도 오늘의 나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고(故)로 반드시 환생한다. 만약 나 자신을 절대적이고 고유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아상(我相)이 붙은 것이요,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인상(人相)이 붙은 것이요, 지역을 따지고 피부색을 따지고 내나라 내 민족만을 따진다면 이는 중생상(衆生相)이 붙은 것이요,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의 끝이니 더 빨리 더 쉽게 성급히 모든 것을 얻으려 한다면 이는 수자상(壽者相)이 붙은 것으로 이상 모두가 다 망상(妄想)이 되는 것이다. 쇠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하였던가? 공(空)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주의 목적은 영생이며 끊임없는 순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나 자신을 버려라. 가장 오래 사는 자가 가장 강한 것이니 오래 살려면 나 자신을 버려라. 죽음을 두려워 말지니 비록 육체의 고통은 두려울 것이나 이것은 또한 각자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자연의 배려인 것이다. 당장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영생을 추구하라. 내일을 걱정 말고 오늘에 충실하라. 필요 이상의 것들을 취하려 하지 말 것이며 나누어 베풀어라. 대저 선(善)이 아니면 무슨 정신(精神)이 필요 할 것이며 그 행(行)함이 없으면 무슨 체(體)가 필요하리요. 지옥(地獄)이라면 차라리 정신이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니 모든 생명선(生命線)이 끊이질 않는 한 목숨을 버린다고 해서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바는 명료(明了)하다.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을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한다. 성인(聖人)은 모든 만유(萬有)를 자기자신과 같이 여기지만 세인(世人)은 자기자신만이 유일한 것으로 여긴다. 성인(聖人)은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만 세인(世人)은 자기 자신만의 것을 가지려 애쓴다. 성인(聖人)은 모두를 본래의 하나되는 자리로 마음을 환원시키려 하고 세인(世人)은 자꾸 만들고 분열시켜 개성을 찾고 어지럽히며 또한 번뇌한다. 자고 이래로 성인(聖人)들이 가르친 바는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다 하겠다. 각각의 종교(宗敎)들이 그 모양과 빛깔을 달리할지라도 성인(聖人)들이 가르친 바는 둘이 아니다. 어리석은 인간(人間)들이 왜곡하고 서로 고집하니 대소(大小)를 불문하고 이러한 모든 아상(我相)과 중생상(衆生相)을 다 끊어 버려야 통합(統合)이 이루어지며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분열(分裂)하고 또한 새로이 생성(生成)되어 결국은 여러 가지 모순(矛盾)과 갈등(葛藤)을 야기(惹起)함으로써 마침내는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성인(聖人)들은 이미 죽고 없으며 우리가 추구(追求)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몸뚱이가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 근본이 다름이 없으니 몸뚱이가 나뉜 것이지 그 마음이 나뉜 것은 아니다. 예수와 석가를 따르지 말지니 항상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로 희생하며 사랑과 부활의 이치를 가르치려 애썼고 석가도 부귀(富貴)를 포기하고 스스로 고행(苦行)을 하며 자비와 환생(還生)의 이치를 가르치려 애썼다. 도(道)와 덕(德)과 예(禮)가 하나라도 벗어남이 없으니 진실로 성인(聖人)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성인(聖人)들이 가르친 바를 요약하자면 두 길 뿐이다. 하나는 생멸문(生滅門)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환멸문(還滅門)이라는 것이다. 생멸문(生滅門)이란 이를테면 나오면 사라지는 것이 있고 사라지면 나오는 것이 있으니 그 생사(生死)의 오고 감과 한 생각의 들고남이 잠시라도 끊이질 않는 것이다. 내가 자식을 낳음은 기쁜 일이 되지만 한편 욕심(慾心)과 번뇌(煩惱)의 근원(根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니 한 생각도 마찬가지여서 망상(妄想)으로 하여금 그 근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본래 없던 것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모든 일체만법(一切萬法)이 벌어지게 되는 것으로 이 우주(宇宙)가 생기고부터 이 한 몸뚱이와 이 한 생각이 끊이질 않고 일어남으로써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시비(是非)가 끊이질 않고 선악(善惡)과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의 투쟁장(鬪爭場)이 되고 마는 것이니 이상 모두를 가리켜서 생멸문(生滅門)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이 진실로 가르치려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환멸문(還滅門)이라는 것이다. 환멸문(還滅門)이란 이 우주(宇宙)가 생기기전 이 한 몸뚱이와 이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본래의 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으니 모두가 하나가 되어 영생(永生)하는 자리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으며 부귀(富貴)도 빈천(貧賤)도 없어서 모두가 공평하며 치우침이 없는 본래의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인(聖人)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들의 마음을 본래의 그 자리로 귀환(歸還)시켜 각각의 마음이 순수성(純粹性)을 되찾아 통일(統一)하게 하는 것이다. 본시 현실세계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환상의 세계를 노니는 것으로 거듭 깨어나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이어가며 영생(永生)하게 된다. 이것을 자각(自覺)하여 마음을 본래의 그 자리로 되돌림으로써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영원한 안식(安息)을 얻기 위함이다. 이것이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는 것이다. 일곱 색깔 무지개가 모두 하나의 빛에서 나온 것임을 어찌 애써 부정하려 하는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어찌 사람이 다른 것인가? 다른 것은 피부색이지 사람이 아니다. 몸뚱이가 구분된 것이지 마음이 본래 구분된 것은 아니다. 대저 온 우주만유(宇宙萬有)가 다 하나의 뿌리요 일체태극(一 太極)인 고(故)로 만일 이와 같은 이치(理致)를 안다면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둘이 아니요 몸뚱이가 다르다고 해서 마음이 둘이 아니요 종교(宗敎)가 다르다고 해서 천하(天下)에 도(道)가 둘이 아님을 또한 알 것이다. 유교이든 불교이든 십자가이든 간에 스스로 경계를 두어 가두면 이는 중생상(衆生相)이 붙은 것으로 이렇게 되면 모든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을 하나의 통일된 진리로 파악하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성인들의 말씀과 진리를 두루 관찰(觀察)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종교(宗敎)와 철학(哲學)의 번무(蕃茂)에 종지부를 찍고 바야흐로 하나의 통일(統一)된 핵(核)을 형성(形成)할 때이다. 누가 앞장서야 하는가? 개개인은 물론이요 무엇보다도 종교(宗敎)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종교(宗敎)는 모든 마음의 중심축(中心軸)이 기 때문이다. 사랑과 희생과 자비를 가르치나 실제로는 분열하고 새로이 생성되니 이렇게 되면 진(眞)이 없음을 증명(證明)하는 것이 된다. 누가 희생해야 하나? 종교가 스스로 희생하여야 한다. 번성(蕃盛)하매 하나의 핵(核)을 위한 것이니 이것이 자연(自然)의 이치요 도즉자연(道卽自然)인 것이다. 그 때에는 고개를 들 수 없을지니 스스로 희생한 자만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순간에 집착하지 말아라. 영생을 믿어라. 비록 지금은 각자의 위치에 충실하되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이루어야 결실(結實)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또한 시점(時點)의 문제이지 어찌 싫다고 되지 않으랴. 아무도 변화를 막을 순 없다. 오늘날 공해가 가중되고 개인은 물론 집단적인 온갖 이기주의가 성행하며 작금(昨今)에 유행되는 말세론(末世論)은 오히려 이것을 이용함으로써 온갖 그럴싸한 언어(言語)로 포장(包藏)하여 현혹(眩惑)하기 일쑤다. 이러한 때일수록 각자의 자각(自覺)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다. 우리나라는 도(道)의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국기(國旗)는 태극기(太極旗)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도리도리(道理道理) 각궁(覺弓)'을 들으며 자란다. 각궁(覺弓)이란 태극(太極)의 이치를 깨우치라는 말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각 지방의 이름은 모두 '도(道)'자로 끝나게 되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도(道)의 나라인 것이다. 그리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 이래(以來)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理念)은 그 당시로써는 그야말로 도리(道理)가 아니면 발현(發顯)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바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는 물론이요 일제하에 이르기까지 도리(道理)없이 이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욕망(慾望)이 그 얼마나 허황(虛荒)된 망상(妄想)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현란한 물질(物質)과 복잡한 지식(知識)으로써 승부(勝負)를 걸매 도리(道理)를 져버리는 것과 또한 같은 것이라 말 할 수 있겠다. 유혹(誘惑)이 있으면 취(醉)하게 되고 심취(深醉)하면 앞뒤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 누가 알랴? 얼른 공(空)으로 귀환(歸還)하여야 하는 것이다. 색(色)의 청정(淸淨)함은 투명한 것이요 마음의 청정(淸淨)함은 공(空)인 것이다. 태극(太極)은 '꼬물꼬물'이다. 그리하여 고대(古代)에는 '궁(弓)'자와 '을(乙)'자로도 표현하였으니 또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선두(先頭)에 서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은 그 누구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내 나라 내 민족만을 위한 것도 아닌 모든 류(類)의 영생(永生)을 위한 그야말로 전 우주적인 발상(發想)이라 말할 수 있겠다. 고대(古代)의 선지자(先知者)들은 왜 그토록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그리고 태극(太極)에 주안점을 두고 생각하였을까? 그것은 이것이야말로 자연(自然)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릇 도(道)를 구함에 있어 또한 베풀고 정(正)히 인도(引導)함이 없다면 요즘 매스컴에서 흔히 말하는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진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단 한푼의 값어치도 없는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며 마음의 통일이 선행(先行) 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마음의 통일을 이루어야 모든 투쟁이 사라질 것이니 우리가 항상 꿈꾸는 낙원의 세계가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 만으론 부족해서 나누어 놓았더니 진실로 서로 돕고 사랑할진대 서로 할퀴어 상처를 주더라! 혼자만으로는 영생하지 못하며 혼자만으로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더라! 술을 술잔에 나누어 담으니 모두가 취하네! 메아리가 맑게 울리면 천국(天國)의 문(門)이 열리고 메아리가 슬피 울리면 지옥(地獄)의 문(門)이 열리는 도다. 메아리도 환상이요 이세상도 환상이로다. 내 안의 하느님이 진정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해와 달이 번갈아 찾아들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며 하위의 '도'와 상위의 '도'가 서로 응(應)하니 시간(時間)이 흘러도 이 이치는 변함이 없도다. 도(道)가 둘이 아니니 그 길을 따라 걸어가라. 방황하고 벗어나는 자는 반드시 후회할지니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 시공(時空)
흙은 공(空)을 통해 순환하고 몸은 흙을 통해 순환하고 마음은 몸을 통해 순환하니 그 모양과 성질을 달리하여 시간에 따라 응한다. 정신(精神)은 귀(鬼)가 되어 공(空)에 거(居)하고 육신(肉身)은 흙이 되어 토(土)에 거(居)한다. 정신(精神)은 공(空)에서 순환(循環)하게 되고 육신(肉身)은 지(地)에서 순환(循環)하게 되니 천지(天地)가 나 자신이 되어 어찌 너와 내가 다르다 이르겠는가? 만물(萬物)이 공(空)에서 나온 고(故)로 만약 공(空)이 없으면 변화(變化)도 없다. 이를테면 '효자(孝子)'라는 말은 어떻게 나왔는가? 불효(不孝)하는 놈들이 많으니 '효자'라는 말이 나온 것이지 모두가 효자라면 굳이 '효자'라는 말이 나올 이유가 없다. 공(空)이 있으매 변화(變化)가 있는 것이니 공(空)은 만물(萬物)의 어머니가 된다.
변화(變化)로써 순환을 거듭함에 따라 자연(自然)에는 생장수장(生長收藏)하는 이치가 있다. 동(動)하면 생(生)이요, 정(靜)하면 저장(貯藏)된 것으로 본다. 겨울이 오면 모든 활동(活動)을 멈추고 각각의 씨앗들은 땅속에 저장되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요즘 컴퓨터(Computer)를 모르면 컴맹이라 하여 놀림받기 일수이므로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컴퓨터 자체를 무극(無極)으로 가정한다면 전원을 켠 순간은 태극(太極)이 될 것이며 이때부터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다. 음양(陰陽)의 동정(動靜)하는 이치로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활동(活動)하여 인터넷(Internet)도 하고 게임(Game)도 하고 수많은 세상이 열리고 사라지고 필요한 것들은 저장하고 또한 필요 없는 것들은 영구히 삭제해 버린다. 또한 전원을 끄면 저장된 것들만 남게 되는데 이것은 활동(活動)하지 아니하므로 분명히 생(生)은 아닌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이러한 우주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는 공(空)이란 그야말로 순수한 무(無)의 개념이다. 그러나 선지자(先知者)들이 보았던 바 공(空)이란 일체만유(一切萬有)를 품고 저장한 하나의 핵(核)으로써의 의미이며 모든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또한 그곳으로부터 생출(生出)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공(空)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바의 절대적인 무(無)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공(空)이라는 하드디스크(Hard Disk)는 우리의 감각을 통(通)해서는 느낄 수 없으나 만물(萬物)은 반드시 이 문(門)을 통(通)해 출입(出入)하며 생사(生死)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공(空)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으며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고 시간(時間)도 공간(空間)도 없다. 또한 만물(萬物)이 공(空)에서 활동(活動)하게 됨은 이러한 공(空)이야말로 모든 만유(萬有)의 모체(母體)이자 또한 영원한 휴식처요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변화(變化)는 반드시 시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영화(映畵) 필름(Film)과 같아서 우리는 매양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變化)를 관찰(觀察)하게 된다. 또한 필름의 경우 변화와 변화 사이에는 항상 '시공(時空)의 끊김'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우주의 실제시간이 다를 수가 있으며 또한 같은 공간 내에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가 공존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된다. 이를테면 우주(宇宙)가 일정한 시간을 간격으로 하여 거듭 사상(寫像/Scan)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모든 감각이 그 사상(寫像/Scan)된 순간의 변화(變化)만을 인식(認識)하고 기억(記憶)하도록 구성(構成)되었다면 결국 인간은 그 시공(時空)이 끊어진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이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달은 매 시간마다 동(東)에서 서(西)로 이동하나 매일 밤 같은 시간(時間)에 관측하게 되면 서(西)에서 동(東)으로 움직인다. 만약 그 사이에 시공(時空)이 끊겼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식(認識)하지 못할 것이므로 달이 그저 서(西)에서 동(東)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알 것이다. 또한 필름을 빠르게 돌리든지 느리게 돌리든지 간에 그 내부의 인식체(認識體)가 실제로 느끼는 시간상의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의식계 시간의 밀도(密度)에 따라 우리의 생체리듬도 또한 상대적으로 그 반응속도를 달리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시간(時間)이 빠르면 생체리듬 또한 빠르게 진행(進行)되어 상대적으로 나이를 빨리 먹게 되고 시간(時間)이 느리면 생체리듬 또한 느리게 진행(進行)되어 상대적으로 나이를 덜 먹게 될 것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 차이(差異)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지금 우리의 세계와 파장을 달리하는 곳이 우주 저편에 있다면 시간의 흐름 또한 다를 것이다. 시간뿐만 아니라 매번 재생성(再生成) 될 때마다 모든 것이 비례적으로 그 크기를 달리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 크기의 변화를 인식(認識)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우주만큼 클 수도 있으며 어느 순간에는 내가 먼지만큼 작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시공(時空)의 끊김은 같은 공간 내에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가 가능(可能)하게 되는데 같은 공간 내에 서로 다른 세계가 번갈아 가며 사상(寫像/Scan)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TV를 보는 것처럼 우리가 어디에 소속(所屬)되었는가에 따라 변화의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변화(變化)가 이러하다면 흥미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시간(時間)에 쫓기어 산다. 그러나 조물주(造物主)가 우주(宇宙)를 생성(生成)하는데 있어서 천년(千年)이 걸린들 만년(萬年)이 걸린들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 크기도 또한 개미만큼이든 코끼리만큼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 끊긴 시간 속에 또 다른 우주를 생성(生成)한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태산(泰山)이 코 구멍에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것이 소위(所謂) 귀신(鬼神)이 행(行)하는 바가 아니랴. 선지자(先知者)들은 생성소장(生成消藏)하는 변화(變化)로써 만물(萬物)을 인식(認識)한 바 절대적인 시간(時間)이나 절대적인 공간(空間)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하나의 먼지에도 무한(無限)의 공간이 존재(存在)한다 했으니 그러한 무한(無限)의 공간(空間)을 일일이 다 통과(通過)하려면 또한 무한(無限)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가 실제로 그와 같지 않음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오가기 때문으로 본 것이다. 무극(無極)은 공(空)의 개념(槪念)이요 태극(太極)은 변화(變化)의 개념(槪念)이 된다. 흘러간 과거는 없어진 것일까? 밤하늘의 별을 보라. 그것은 이미 과거의 별빛이다. 기억의 연속됨은 또한 무엇인가? 어찌 과거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인간(人間)의 정신(精神)이 서로 위상차(位相差)를 달리하면서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되는 식으로 서로의 정신(精神)을 공유(共有)한다면 주위의 행태(行態)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방관(傍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불행한 사람을 돕고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는 것은 결국 나를 돕고 구하는 것이 된다. 흘러가는 시냇물에 가랑잎을 띄우면 가랑잎은 물결을 타고 떠내려간다. 그러나 근원(根源)이 끊이지 않는 한 그 물결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모든 것이 순환하여 돌아간다. 대저 우주(宇宙)가 하나의 태극(太極)이어늘 시간(時間)이라고 어찌 예외(例外)가 있으랴. 어째든 이것은 사고력의 확장된 예를 보인 것이다. 자연(自然)의 수많은 변화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기 쉽상이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맹점(盲點)이다. 실제로 자연(自然)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맞물려 돌아가며 인간의 생각이 미치는 것과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이 또한 맞물려 돌아간다. 만약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제의 변화요 생각이 닿는 것만이 실제의 진리로 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거듭하여 우리 모두의 터전이 됨을 인지(認知)해야 할 것이며 절대적인 삶과 절대적인 죽음이란 없는 것이며 진정한 '나'란 나만의 '나'가 아님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나'라는 것도 없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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