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평온하고 햇빛이 눈부시던 날이었다. 그 와중에 고등학교 동창회를 하자고 연락을 돌린 모양이다. 졸업 앨범을 통해 전화번호가 그대로인 옛 학우들에게 연락은 갔고 이제 모이기로 한다. 그리하여 동창들은 어느 동네 공원에서 모였다. 그 와중에 그들 눈에는 확 깨는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박이었다. 박은 이들과 안 좋은 사이 정도가 아니라 대립관계가 깊었다. 그들에게 박은 자신들의 좋은 날을 망쳐왔던 소위 말하는 방해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은 왜 졸지에 방해꾼이 되어있을까. 그리고 뜻밖에 사이가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등장했을까.
박은 그래도 친구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주동자들은 이제 정신을 차렸을거고 거기에 정신이 왔다갔다하는 친구들은 이제 없을것이라고. 그것은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바쁜 입시생의 삶 속에서 도저히 단순한 노력이나 감정노동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다. 박과 동창들과의 관계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 과격했다가 차가웠다가 마치 오실로스코프가 움직이듯이 곧 직선으로 돌아오곤했다. 그랬던 이유는 학교 담임선생이 폭력 직전까지 가던걸 즉각적인 처리로 어느 정도 막아낸것이 컸다. 그리고는 박은 곧장 내성적인 아이가 되었다.
박이 등장하자 모인 동창들 중 일부는 놀랐다. 한편으로는 오늘도 어떤 날을 망치러왔나 곤조를 세우는 쿨한 냄새를 피우는 몇몇 인물도 있었고. 알 수 없는 서먹함과 조용함이 계속 되었다. 어떠한 인사도 서로간에 없었다. 적어도 서로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알고 있다는듯이 조용한 신경전이 오갈 뿐이다. 그들은 그저 하던대로 사진의 친구만을 기다릴뿐. 그렇게 같은 반이지만 사분오열 서로 갈라서듯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박에게는 조용함뿐.
박에게 친구를 하고싶어하던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건, 이런 눈부심 속 잔인함이 있음에도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과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같은 반임에도 너무나도 달라져서 정서적인 궤도가 어긋나 서로 조우할 수 없음이 컸다. 그것은 친구를 하고싶다는 호감까지도 휘감아 모든 것을 조용함과 서먹함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 대가는 제법 컸다. 박은 일을 겪으면서 나는 보통과는 다른 일을 겪었고 그로 인해 좋은 말로 치면 조숙한 시선을 얻었다. 나쁜 말로는 체념의 정서. 마치 사람들 사이가 인형끈을 조종하듯 일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10여년간 계속된 괴롭힘 중에서도 초중반이었다. 이들은 소중한 인간관계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고 전가를 하고, 트릭을 쓰는 그런 몹쓸 짓을 태연히 저질러온것이다. 게다가 그 나이에는 인간관계가 가진 유일한 자산이기에 인간관계를 박탈하고 흔적까지 사보타주하는것은 싫어하는 상대를 없애기 위한 이 작은 사회의 계책이었다.
김과 이와 성은 박과 친구는 아니지만 느슨하게 호감은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학우가 겪는 고통을 알고도 외면하는게 아니라 사람을 알 시간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서 자신감도 없고 도무지 알 턱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 괴롭힘의 주동자들은 다행이도 이 날 그렇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 두 명 있었지만 그 때의 무리가 깨어진 터라 나서지는 않고 눈치를 보는 편이었다. 물론 눈치를 보는것은 이 상황을 못 따라잡았던 김과 이와 성도 마찬가지. 그렇게 공부를 해봤지만 도무지 박의 사건과 고통을 도무지 제 때 꿰뚫지 못하던 인연. 다시 보자고 동창회에 모였건만 정작 박에 대해서는 모르고 처음부터 관계를 해나가야 하는 상황. 이제 시간이 된걸까.
"안녕" 이가 정적을 깼다.
"어..." 조그마한 자신감 없는 박의 대답.
어 알아. 말하지 않아도 너가 힘들었던거 알아.
그들은 늦게나마 등쌀에 벗어나 이제야 거대한 스텝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