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유생이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을 비난하는 지부상소를 올렸는데, 워낙에 황망한 일이라 조사를 했더니
이때 심의지란 유생이 배후로 지목이 되어 추궁 받았다. 근데 친국하러 온 영조에게 자기 변호나 반성이 아니라 뒤주를 들먹이며 도발하였다
일물이 뒤주를 뜻한다. 심의지는 당연히 개박살(사형)난다
정조실록44권, 정조 20년 3월 26일 임신 3번째기사 1796년
상이 이르기를,
"오늘 소대한 것은 오로지 재이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여러 재신들의 공사 아뢰는 일은 우선 천천히 하고, 삼사가 먼저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장령 현중조(玄重祚)가 아뢰기를,
"심의지(沈儀之)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은 참으로 초야의 의사(義士)였기에 충성된 뜻을 지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눈물을 머금고 있습니다. 세초의 빈연(賓筵)에서 대신이 건백하여 특별히 신설하라는 은전을 입었는데, 의지의 처 조씨(趙氏) 또한 하나의 절부(節婦)입니다. 그 남편의 죄에 연루되어 거제(巨濟)에서 귀양살이를 하였었는데 13년 동안을 하루같이 햇빛을 보지 않았고, 계묘년 초에 이르러 거제에 큰 기근이 든 때문에 그를 지도(智島)로 이배하라는 명이 있자, 의지의 처가 다시는 원통함을 품고 부끄러움을 참으면서 다른 고장을 전전하지 않으려고 마침내 8일 동안 먹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그가 도류안(徒流案)에 들어있으니, 해부(該府)에 명하여 죄명을 씻어주게 해서 필부(匹婦)로 하여금 억울함이 없게 한다면 어찌 재이를 없애는 한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순조실록2권, 순조 1년 2월 23일 기사 1번째기사 1801년
"부수찬 이상겸(李象謙)과 관학 유생(館學儒生) 김이호(金履祜) 등이 상소하여 심의지(沈儀之)를 포증(褒贈)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한유와 심의지는 초야(草野)의 일개 서생(書生)으로서 소를 올려 역적을 징토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들이 그 뜻을 슬퍼하며 그 충절을 숭상해 온 지 이제 30여 년이 되었으나, 공의(公議)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그 당시 두 사람이 수립한 절의(節義)는 영세토록 할 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추증의 은전이 한유에게는 이미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심의지는 신과 유복친(有服親)으로서의 혐의로움이 있으므로, 감히 헌의(獻議)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여러 대신들에게 하문(下問)하소서."
순조실록2권, 순조 1년 2월 30일 병자 1번째기사 1801년
서미수(徐美修)를 이조 참의로, 이상황(李相璜)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고, 박치륭(朴致隆)에게 사헌부 대사헌을, 박재원(朴在源)에게 이조 참판을, 심의지(沈儀之)에게 사헌부 집의를 추증(追贈)하였다.
그런데 훗날 심의지는 충의지사로 인정받아 복권되고 벼슬도 추증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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