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의 목에 현상금이 걸려있단 거짓말로 투항한 곽앙과 왕쌍, 두 항장(降將) 외에도, 싹수가 보여 주유가 곁에 두고서 가르치고 있는 정상급 인재(人材)들에는 조조측 세작(細作)들 또한 섞여 있었습니다. 조인의 사람들도 있었고, 가후 측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죠.
곁을 맴돌며 감시하는 스파이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자, 주유는 산 정상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휴양을 취하며 지휘를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 내응자들의 증언을 이중삼중으로 검증을 거치고 나서, 확신한 조조는 허도(許都)에 포진중이던 후방병력까지 끌고 나옵니다. 주유를 단숨에 몰아쳐 죽이기 위해서요. 이윽고 조조군은 산 정상에 포위망을 형성했지만, 아시다시피 그 포위망 자체가 주유의 노림수였고, 주유는 자신의 목숨을 땔감삼아 거대한 화공(火攻)을 발동시킵니다.
주유를 산 위에서 불태울 수 있을 것이라 ‘틀’을 짰지만, 주유는 그 ‘틀(테두리)’바깥에 있었습니다.
주유가 짠 테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유가 위치한 산은 지세가 굉장히 험해 형주 방면의 인후(咽喉)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오고가는 게 굉장히 힘들죠.
여기서 주유는 분신(焚身)을 통해 형주방면의 모든 진입로를 불태우는 겁니다. 이로서 조조가 형주 쪽으로 물러날 길 자체를 막아버렸고,
둘째로, 본디 조조군 병력이란 장애물에 발이 묶여있던 주환 부대는 자유롭게 움직여 양양(襄讓)성은 고립시킵니다.
셋째로, 방통과 가후가 산에 있다는 걸 포착하고 위에서(북쪽, 조조 side)에서 제1참모(가후)를 죽이고, 아래쪽(남쪽, 유비 side)에서 제1참모(방통)을 사지로 내몹니다.
그리고 사마의는 주유가 짠 ‘틀(테두리)’바깥에 위치해있습니다. 그는 불타는 산이 아니라, 그보다 더 거대한 산(山)을 뒷배로 두고 있었습니다. 바로 조비(曹丕)라는 거대한 산이였죠. 그렇기에 그는 황문시랑이란 명함을 달고서도 전선을 제집 드나들듯 할 수 있었지요.
사마의는 모든 것을 계산했습니다. 손권군의 보급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후가 현재 자리를 비운 상태라는 것, 조조를 화공(火攻)에서 구하려면 누구를 움직여야 하는지 등등. 주유가 짜놓은 ‘틀’ 역시 계산 범위 내에 있음은 물론이었죠.
전선을 담당하는 제1막료진인 가후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사마의는 자신이 활약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마의는 하산합니다.
이통(李通)을 시켜 조조에게 비단주머니를 건네고, 이통이 조조의 목숨을 구하게 하고
소수의 특작부대[잔병殘兵]만 데리고 남하하여 자의적으로 손권을 납치합니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화봉요원에서는 설정상 주유와 사마의가 거의 똑닮은 외모라고 나옵니다. 둘은 집안의 하인들도 구분하지 못할만큼 외모가 엇비슷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주유의 모든 수단을 꿰뚫어보고 그의 ‘틀(테두리)’ 바깥에 위치한 인물이 하필 주유와 100%닮은 사마의라는 점은 많은 의미를 시사합니다.
일군의 군주라지만, 손권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형이 죽었다는 것을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국을 위해서라지만, 분신(焚身)이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손권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의는 다 알고서 손권을 납치한 겁니다. 주유와 빼닮은 얼굴로 말하면 협박이 더 잘 먹힐 테니까요. 그리고 말합니다. ‘엉아가 주유 생각하는 걸 다 알고 있어서 이렇게 널 납치했다고.’
주유의 시체가 아직도 불타고 있는 와중에, 주유의 얼굴로 자기는 주유가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꿰뚫었다고 입을 놀려대는 인물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인물(사마의)은 주유의 얼굴로 말합니다. 생전에 주유가 짜놓은 노림수는 훤히 알고 있으니, 살아나가고 싶으면 형주를 유비에게 넘기라고. 어르고 달래길 반복하며 손권을 협박합니다.
달래는 내용은 - 손권은 이미 ‘동탁’의 이미지로 반쯤 덧씌워진 상태라, 괜히 형주까지 넘보다 기득권 세력에 낙인찍히지 말고 자기 말을 따라 순리대로 가자는 것이고
어르는 내용은 - 손권군 보급이 얼마나 남았는지 파악하고 있다며, 자신이 이기지는 못해도 조비를 내세워 피곤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협박합니다. 또한 가장 직접적인 위협으로 손권의 처지가 납치되어 있음을 계속해서 상기시키죠.
말 그대로,
화봉요원에서 항상 나오듯,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상인(商人)이란 족속들은, 항상 사람을 해칠[상인傷人] 뿐입니다.
손권은 분명 어마어마한 모욕을 느꼈을 겁니다. 안 그래도 가까운 형님의 죽음으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아직도 불은 꺼지지 않았고, 형님은 계속 화마(火魔) 속에 불타고 계시는데...
어떤 장사치가 그 형님과 똑닮은 얼굴로 ‘난 다 알고있는뒈~ 이 엉아는 주유의 계획을 다 아는뒈~ 그래서 널 납치했는뒈~’라고 깐족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상인의 협박은 끝내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손권의 쇠축(軸), 주태가 납치된 주군을 구하기 위해 시의적절하게 당도했거든요.
이 순간부터, 주유의 ‘틀’ 바깥에 있다 자부했던 사마의의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홍곡(鴻鵠;기러기나 고리의 무리, 큰 인물을 비유)로 생각하며 연작(燕雀 ; 도량이 좁은 사람, 평범한 사람) 무리에 숨어 있었다 생각하지만, 그가 하산한 순간 수많은 홍곡(鴻鵠) 무리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물며 그가 패드립친 손권조차도, 사마의의 ‘틀’바깥에 있었습니다.
사마의는 계산에 가장 뛰어남을 자부하며 하산했습니다. 손권군에게는 더이상 남은 물자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산은 모조리 틀렸습니다.
첫째, 사마의가 하산하여 관직을 받고 조정에 나간 이후, 산무릉 혼자서 상인 연합을 관리하기엔 힘이 벅찼습니다. 그래서 산무릉은 추천받은 인물을 기용합니다. 바로 ‘공 노사’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 노사’는 양수가 심어둔 인물이었습니다.
>양수는 사마의가 어떻게 움직일지 대번에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마의가 조비를 뒷배로 삼아 나댈 것을 깨닫고, 손권과 공모하여 사마의를 제물삼아 상인 연합을 집어 삼킵니다.
둘째, 손권의 보급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형주 점령을 위해 형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루트 곳곳에 물자보관소를 두고 있었습니다.
>사마의는 자기 말 한 마디면 손권이 철썩 같이 따를 거라 여겼지만, 애초에 손권은 사마의 말을 따를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사마의와 그의 정예부대-잔병을 한꺼번에 정리할 요량이었죠.
>그래서 손권은 사마의가 남은 보급을 판단함에 있어 헛발 짚으리라고 예상하고, 형주 방면 곳곳에 보급선을 세워둡니다.
‘틀’,
사마의가 실실 웃으며 말했던, 자신은 계산에 뛰어나며 주유가 짜놓은 ‘틀(테두리)’바깥에 있다고 했던 말.
헌데 어떻죠?
사마의가 하산하기 이전서부터...그는 이미 ‘틀’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양수가 짜놓은 틀에. 손권이 짜놓은 틀에 갇혔습니다.
손권은 사마의의 권고를 무시하고 형주를 침공합니다. 손권을 철썩같이 믿었던 사마의는 양양-형주 방면의 방어선을 느슨히 했고, 파상공세에 시달려 속절없이 영토를 내줍니다.
아버지 조조를 지원하기 위해 원군을 이끌고 온 조비(曹丕)는, 양양성으로 후퇴해야 할 처지에 놓입니다.
양수는 조비의 후퇴를 꼬투리 잡고 비판하며, 이 호재를 놓치지 않고 조비의 실책을 더욱 크게 만들고자 양양-형주 방어선의 모든 병력을 철퇴시킵니다. ‘대국이 우선’이란 명분하에 사마의의 측근-가규,서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양양성을 사수하는 게 옳은 결정이거든요. 양수는 후퇴명령만 내리고 뒤로 쏙빠지고, 모든 책임은 조비가 떠안게 됩니다.
양수가 내린 후퇴명령에 발맞춰, 손권은 자신이 준비한, 가장 날이 잘 드는 두 칼을 휘두릅니다. 바로 여몽,육손의 특작부대였죠. 철저한 고립에 처한 사마의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틀’바깥의 암수에 속절없이 당합니다.
상인(商人)이란 족속은 항상 사람을 해치듯[상인傷人]
백의(白衣)를 입은 상인(商人)에게 가문의 정예 사병(私兵)들은 모조리 쓸려나가고, 잔병(殘兵)의 가장 뛰어난 실력자 삼선(三船)마저도 창에 꿰뚫려 죽습니다.
손권에게 패드립을 갈기며 실실 웃었던 사마의는, 눈물을 흘리며 가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죠.
밖에서 사마가의 병력들이 쓸려나간다면, 안에서는 ‘공 노사’가 양수의 밀명을 받고 사마 가문의 콘체른을 집어삼킵니다.
사마의는 ‘형주’를 두고 유비와 손권이 기싸움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이 도살장에 오르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손권과 양수가 서로 손잡고 맛있는 부위를 이리저리 도축하리라곤 전혀 몰랐죠.
또한 위의 인물들이 그어놓은 ‘틀’바깥에는 어김없이 또 다른 ‘틀’이 있습니다. 바로 제갈량과 방통. 제갈량과 방통은 손권이 형주 노선으로 틀 것을 일찍부터 예상하고는, 호랑이 같은 다섯 장군(관우, 장비, 황충, 요원화[조자룡],진도)를 보내 형주 곳곳에 박아둔 물자보급소를 습격하게 하였습니다. 소수의 기병(奇兵)으로 진격과 동시에, 손권군의 물자보급소를 습격하여 물자를 보충한다는 가히 정신나간 진격이죠. 물론 유비군이 활동한다는 걸 가리기 위해서 조조군 복장으로 변장하고 움직이는 것은 덤이고요.
그렇기에 68권의 주제는 ‘틀’이 되겠습니다.
드디어 ‘틀’바깥으로 나온 손권.
그리고 아직까지도 ‘틀’안쪽에서 타조처럼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된 사마의.
‘틀’바깥에 또 다른 ‘틀’이 있고, 그 ‘틀’은 끝없이 이어지는...아수라.
결국 ‘틀’을 만드는 사람은 혼자가 아님을 명심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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