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23–533년의 연속된 원정. 532년 오툉(Autun) 함락 이후, 부르군트 왕국은 소나ㆍ론 회랑과 쥐라 관문을 잇달아 상실하며 내륙 거점이 고립되었습니다.
왕 고도마르 2세(Godomar II)는 왕실 호위대와 함께 내륙으로 물러나 잔존 세력을 수습했으나, 귀족단과 주교좌는 생존을 위해 프랑크 왕가에 개별 항복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크 측은 기존 로마식 행정과 주교권을 활용하는 조건으로 투항을 유도했습니다.
534년.
클로타르 1세(Chlothar I)와 킬데베르트 1세(Childebert I), 그리고 튀데베르트 1세(Theudebert I)가 북ㆍ서ㆍ동의 세 축으로 동시 진군하여 리옹(Lugdunum), 비엔누(Vienne), 제네바(Gena.va), 베장송(Vesontio) 일대를 연쇄 점거했습니다. 회랑과 하천 도하 지점, 그리고 ‘비아 아그리파(Via Agrippa)’ 구간을 프랑크 수비대가 막으며 부르군트 내륙은 서로 고립되었습니다.
왕실 금고와 기록, 인질 일부가 프랑크 수중에 들어가며 백작(count)과 공작(dux)들은 차례로 충성 선서(homagium)를 실시했습니다. 고도마르 2세의 최후에 대한 확실한 전사ㆍ체포 기록은 남지 않았고, 항복ㆍ분할 정리와 함께 사료에서 사실상 퇴장합니다.
프랑크 왕가 내부에서는 기존 부르군트 왕국을 분점하되, 주교좌와 로마계 관료를 존치하여 세무ㆍ사법을 계속 운영했습니다. 갈로로마인과 부르군트인에게는 관습적으로 로마법ㆍ부르군트 법(Lex Burgundionum)이 병용되었습니다.
이로써, 리옹ㆍ론 회랑ㆍ쥐라 관문은 프랑크의 손에 들어가 알프스 북사면에서 이탈리아ㆍ프로방스로 이어지는 전략적 연결이 확보되었고, 부르군트 왕국은 소멸하여 프랑크 왕국 내부의 지역 단위로 재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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