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는 오툉(Autun, Augustodunum)을 관문으로 삼아 소나ㆍ론 회랑 축선으로의 진입로를 여는 것을 목표로 군을 일으켰습니다. 소나 강 수운과 제방로, 그리고 로마식 도로가 겹쳐지는 이 회랑을 장악하면, 북갈리아와 지중해권을 잇는 병참 축선이 손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532년.
오툉과 그 외곽 구릉대에서 프랑크와 부르군트 간의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부르군트는 오툉 성곽과 아루(Arroux) 강을 끼고 방어를 전개했습니다. 갈로로마 보병ㆍ도시 민병과 왕실 기병을 배치하고, 샬롱(Chalon) 방면의 구호군이 들어올 시간을 벌기 위해 성곽 외곽에 목책ㆍ해자 등 간이 방어선을 덧댔습니다.
프랑크는 프란키스카(투척 도끼)로 무장한 창ㆍ방패 보병을 중심으로 공성 전개를 준비했습니다. 전면에서는 사다리ㆍ공성퇴를 갖춘 포위ㆍ교란 공격을 이어가고, 측면에서는 계곡로를 따라 들어온 귀족 기병(안트루스티오네스)이 보급로 차단과 역습 저지를 맡았습니다.
전투는 성곽 주변에서의 교란전과 도끼 투척 후 밀집 돌입으로 시작됐습니다. 프랑크 보병의 압박으로 외곽 목책이 여러 갈래에서 무너지자, 부르군트는 성문 일대로 방어선을 수축했습니다. 샬롱-쉬르-소나(Chalon-sur-Saône)에서 올라오던 부르군트 구호 시도는 프랑크 기병의 차단으로 지연되었고, 성내 곡물과 연료가 빠르게 고갈되었습니다.
결정부는 성문 인접 지점에서 벌어졌습니다. 프랑크는 야간에 흙제방과 흉벽을 끌어 붙이며 공성퇴를 전진시켰고, 성벽 일부가 파괴되자 일제히 투척, 돌입, 방패벽 밀어붙이기의 전술로 틈을 넓혔습니다. 부르군트는 반격을 위해 기병이 성문 돌파를 노렸으나, 측면에서 대기하던 프랑크 기병에게 저지되며 후퇴했습니다.
고도마르 2세는 오툉을 보전하지 못한 채 내부 질서 유지를 위해 후퇴를 선택했고, 오툉은 프랑크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이로써 소나ㆍ론 계곡 축선의 관문이 열렸고, 프랑크는 샬롱, 마콩, 리옹으로 이어지는 하천 회랑을 따라 종심 압박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르군트는 리옹ㆍ비엔 축선으로 방어선을 재정비했지만, 주도권은 프랑크로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532년 오툉 전역은 소나ㆍ론 회랑의 북쪽 관물을 열어 부르군트 왕국의 심장부를 흔들고, 프랑크 왕국의 갈리아 통합을 가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