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5월에 있었던 명나라에 대한 2차 원정에서 대승을 거두고 허투 알라로 복귀한 누르하치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명으로부터 파견된 사절단을 맞이했다. 해당 사절단은 기록으로 보건대 요동순무에 의해 파견된 것으로 살펴지기도 하나, 실제로는 요동경략인 양호에 의해 파견된 사절단으로 파악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당시 무원의 경우 이유한의 탄핵으로 인해 임시체제로 운영되고 있었고, 당시에는 이미 경략 양호가 요동에 도착한 뒤였으므로 양호가 당시 직무정지로 인해 급한 사무만 보고 있던 이유한을 대신해 본인의 권한을 사용하여 사절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이 되었건, 당시 파견된 명의 사절은 후금측에 전쟁을 끝내고 싶다면, 즉슨 누르하치의 뜻대로 화친을 하고 싶다면 전쟁포로가 된 이들을 송환하라는 전언을 전했다. 이는 누르하치가 원하는 화친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명을 상대로 거둔 승리와 전과를 토대로 자신이 내세운 전쟁명분을 명으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이 전쟁에서 얻은 결과를 그대로 유지하며 동시에 자신의 국가를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명측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누르하치의 명분에 대해 인정치 않고, 그가 전쟁에서 얻은 전과이자 소득인 포로들을 쇄환하라고 하였으며 동시에 후금과의 관계를 전쟁 이전으로 회귀시키고자 했으므로 누르하치가 원하는 화친과는 정반대에 해당했다.
이에 누르하치는 화친 제안을 가져온 명측 사절에게 전쟁에서 얻은 포로들을 어찌하여 쇄환하겠느냐고 반문했다.1여기서 누르하치의 의도를 좀 더 상세히 풀어내자면, 후금의 대의명분이 옳은 전쟁에서 얻은 포로를 어찌하여 쇄환하겠느냐는 뜻이었다. 누르하치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명나라에 자신이 옳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는데 그는 즉슨 본인의 건국과 본인의 대의명분, 즉슨 누르하치가 전쟁선포와 동시에 내세웠으며 명나라에 사절을 보내면서 주구장창 주장한 칠대한(칠종뇌한)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물론 후금과 여허간의 문제에 명나라가 개입하지 말 것에 대한 요구 역시 자연적으로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누르하치의 요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금, 은, 보통의 비단과 망룡단을 화친의 예물로서 보낼 것을 요구했다.2 일종의 세폐요구였다. 누르하치는 화친에 대한 물질적인 대가를 받음으로서 자신과 후금의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여 국가 재원으로 삼고, 전쟁이 종전됨으로 인해 명으로부터 더 많은 약탈물을 얻지 못하게 된 암반들과 병사들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불만을 위무하며, 더불어 명으로부터 전쟁의 책임을 물리적으로 인정/배상받고자 한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요구는 음력 4월의 1차 원정과 음력 5월의 2차 원정의 승리를 기반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지난 원정에서 누르하치는 1차적으로 음력 4월에 이영방(李永芳)을 항복시키고 주요 요충지들을 함락한 뒤 요동총병 장승윤(張承胤)이 이끄는 요격부대 마저도 궤멸시켰고, 2차적으로 음력 5월에 다른 17 곳의 요새와 수많은 마을들 역시도 함락하는데에 성공했다. 이러한 전과는 누르하치의 당초 계획보다 목표가 초과 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을 기반으로 누르하치는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의 본래 자신의 목표였던, 명나라가 자신의 대의명분과 세력을 인정할 것을 명나라에 요구하는 것과 더불어 막대한 양의 물자까지 요구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목표가 초과달성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금은을 비롯한 자금과 물자를 요구했을 것이다. 휘하의 암반들과 병사들에게 명과의 화친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보상이 필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화친에는 필연적으로 물자의 요구가 수반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요구에 과감성이 더해진 것은 지난 전쟁의 대단한 성공으로 인해 누르하치에게 자신감이 붙은 탓으로 판단된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전쟁명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슨 이번 전쟁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본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화친치 않고 계속해서 전쟁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3그리고 이 이후 누르하치는 당분간 전력을 가다듬으며 향후 명나라의 자신을 향한 대응을 고려하는 동시에 전쟁 전략을 검토했다.
여기서 상대편인 명나라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누르하치의 이러한 태도와 요구는 명나라, 그리고 요동의 당시 최고 현장 책임자였던 경략 양호(楊鎬)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명의 입장에서 결국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누르하치였으며 본인들은 공격을 받은 입장이었다. 비단 그것을 제외하고도 감히 '천조'가 '오랑캐'의 자신들을 향한 전쟁 명분을 인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므로, 화친을 원한다면 엄연히 누르하치 쪽에서 본인의 전쟁책임을 인정하고 포로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현실의 상황 역시도 명나라측에서 판단키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비록 누르하치가 초과적 성과를 달성하여 요동의 방어시설들을 유린하고 요동총병까지도 패사(敗死)시켰다지만 당시는 아직 요동의 주요 거점들, 예컨대 개원, 철령, 심양, 요양등은 모두 멀쩡한 상황이었으며 대군이 패배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명으로서는 한참 후금에 대한 대응책이 작동하고 있던 와중에 누르하치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존재치 않았다.
명나라측과 양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지 간에 누르하치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고 또 다른 원정을 준비했다. 명이 자신의 화친 요구와 그 조건을 이번에도 역시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 다른 공격을 통해 명을 압박하여 화친을 이끌어 내고자 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의 눈은 이제 요동의 또 다른 방위거점, 청하(清河)로 향했다.
1.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6월 22일
2. 『만주실록』 동년 동월, 망룡단은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봉신이었던 시절부터 그들로부터 지급받은 용이 새겨진 비단이다. 이는 흔히 '망단(蟒緞)'이라고 기술되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에도 역시 누르하치가 이전부터 망단을 은과 함께 받아온 것이 기술되고 있다. 『선조실록』 선조 29년 2월 29일.
3. 만문노당 이상과 동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