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5월 17일, 누르하치는 대군을 이끌고 허투 알라를 출정하여 명나라에 대한 2차 공격을 단행하였다. 윤 4월 22일에 발송한 칠종뇌한 겸 화친에 관한 전언에 대한 답변이 몇 주간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자 명나라를 상대로 군사적인 행동을 가하여 대답을 끌어내는 동시에 무역의 중단으로 말미암아 곧 닥칠 물자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물자를 확보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음력 5월 19일 명나라 영내로 진입한 누르하치 영도하 후금군은 작전기간 내내 총 17곳의 요새를 함락하였다. 이 중 송산둔보는 항복을 통해 점령했으며 나머지 요새들은 직접적인 공격을 통해 함락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외에도 수많은 마을들을 함락한 것으로 파악된다. 후금군은 이후 명나라의 영토내에서 어느정도 노획물을 정리한 뒤 국경 밖으로 철군, 그 곳에서 부상자들과 수송부대를 선행하여 허투 알라로 보냈고 그 다음에는 다시 명나라 영내로 진입하여 본인들이 함락한 요새 인근에 묻어둔 곡식들을 회수하고 다시 이전 음력 4월에 함락한 무순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 묻어둔 곡식들 역시도 회수했다.
5월달의 작전중에 요새들을 함락하고서 확보한 곡식들을 곧바로 치중을 통해 운송치 않고 일단 묻어둔 이유는 곡식들까지 운반해가며 움직이자면 군사작전에 방해가 되기 때문으로 판단되며, 무순에 곡식을 묻어둔 까닭은 너무 많은 노획물을 한꺼번에 옮기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곡식들까지 모두 회수한 누르하치는 허투 알라로 복귀했다. 이 때는 구만주당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에 6월 9일이었다.1그로서 누르하치의 대명(對明) 2차 원정이 완전히 끝났다.
전체적으로 결산해 보건대, 누르하치의 명나라를 상대로 한 2차 원정의 성과는 무척이나 성공적이었다. 물론 4월달의 1차 원정과 비교하자면, 1차 원정의 경우 원정중 이영방과 동양성이라는 역량 좋은 두 인물을 얻었고 또한 무순과 동주, 마근단등을 함락한 후금군을 추격해온 요동총병 장승윤을 패사시키기까지 했기 때문에 음력 5월의 원정의 성과가 비교적 밀리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2차 원정이 실패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누르하치와 후금으로서는 음력 4월의 선제 공격을 통하여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임에도 불구하고. 후금을 명확히 적으로 인식한 명의 대응태세를 그대로 무시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는 것에서 이번의 원정 성과를 자랑할 만 했다. 해당 전투에서 후금군은 명의 야전군으로부터 요격시도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17개의 요새를 유유히 각개격파했고, 덕택에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재차 충전했다.
한편 누르하치가 2차 원정을 끝내고 허투 알라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음력 6월 22일에는 누르하치가 윤 4월 22일에 명나라에 칠대한과 화친에 관련한 전언을 보내기 위해 투입한 포로 및 사신들이 명나라측에서 파견한 사절들과 함께 허투 알라에 도착했다. 그것은 전쟁 이후 최초로 확인되는 명나라의 후금에 대한 외교적 대응이었다. 후금의 기록에 의하면 이는 광녕의 도당 혹은 광녕의 순무에 의해 파견된 것이라고 하는데2, 이는 보편적으로 명의 요동순무직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전까지 요동순무였던 이유한의 경우 5월부터 탄핵으로 말미암아 직무가 정지되고3 임시적이고도 급한 업무처리만 진행하고 있었고, 뒤이어 6월초에는 실제적으로 체직되었으므로4이는 이유한이 체직되기 전 마지막으로 본인의 권한을 사용한 것이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요동순무가 아닌 경략 양호에 의해 보내진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도 후금/청의 기록상에서 당시 명의 요동경략의 위치에 있던 양호의 직위는 경략과 도당이 혼용되는데, 이 때 양호가 도당으로 서술될 때에는 '광녕의 도당' 혹은 '요동의 도당'으로 서술된다.5 이러한 호칭은 후금측에서 흔히 요동순무를 지칭할 때에 쓰이는 호칭과 구분할 수 없다. 이를 생각해 보자면 실제로는 양호가 해당 사신들과 통사들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순무로 서술된 후금측 기록의 경우 오기라고 판단되며, 실제로는 경략이라고 서술되어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절을 발송한 명부 주체가 무엇이었건, 해당 사절들은 후금측이 이전에 요구했던 화친, 그리고 그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후금의 정권과 명분 인정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후금군이 붙잡은 혹은 내속시킨 명나라 사람들을 쇄환시키는 조건을 받아들이며 파견한 사절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는 누르하치와 후금의 입장서 보건대 명이 후금측의 전쟁 명분을 인정치 않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후금이 해당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곧 그들이 천명과 명의 여진에 대한 잘못을 내세우며 일으킨 전쟁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쇄환을 한다고 하더라도 누르하치가 원하는 바들, 예컨대 후금의 국가로서의 인정과 같은 것은 수용될 수 없었고 오직 무력충돌상황에 대한 화친만이 명의 기본적 입장이었으므로 누르하치는 해당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화친의 수용은 곧 전쟁 이전 관계로의 회귀였기 때문이다.
야심차게 전쟁을 시작한 이상 원점으로의 회귀는 누르하치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전쟁을 시작한 이상 명과의 관계에서 의미있는 진전을 얻어내야 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여허를 병합하고 일원화된 여진세계를 완성해야 했다. 그런데 포로들까지 쇄환한 결과가 결국 이전으로의 회귀라면 누르하치로서는 화친을 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하느니만 못했다. 하물며 당시 누르하치는 2 번의 원정에서 모두 큰 결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자신감이 한참 넘칠 때였으므로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1. 『구만주당』 무오년 음력 6월 9일
2.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6월 22일, 『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6월 22일.
3.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10년 음력 6월 19일
4.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음력6월 6일
5.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12월 2일, 『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2월 2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