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추(金遇秋)는 조선 중기 무렵 북방에서 활약했던 무장이다.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인 그는 그 기록은 소략하나 1580년대에 특히 활약이 컸던 장수로서, 1583년에 발발한 니탕개의 난에 참전했고1, 1587년 녹둔도 전투로 인해 촉발된 조선의 보복 토벌전에도 기용되어 시전부락(時錢部落) 정토의 서전인 추도(楸島) 전투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했다.2 여기에 더하여, 시전부락 정토에도 역시 우위의 호분도장(虎賁都將)으로서 참전하여 활약한 바가 존재한다.3
그러나 김우추의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김우추의 생몰년 자체가 미상이기 때문에 그가 언제 죽었는지 조차 확실치 않다. 아마도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실전 경험이 건실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기록으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벌어진 임진왜란에 참전한 기록이 없다는 점, 1587년 그가 참여한 추도 전투 당시의 관직인 함경북도 병마우후(咸鏡北道 兵馬虞候)가 그의 마지막 실직이었던 점4 등을 생각해 보자면 그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시전부락 전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우추의 아들인 김형(金瑩)이 1568년생이고 손자인 김대건(金大乾)이 1583년 생임을 생각해 보자면5 노년의 나이가 되기 이전에 중장년의 나이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주요 활동지가 험한 북방이었던 점, 무장으로서 숱하게 전장을 넘나들었던 점을 생각해 보자면 그의 죽음은 꼭 이르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전투 지휘관으로서는 비교적 유능했던 것 같은 김우추지만, 평시 국경 감독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김우추가 본격적으로 전장에서 활약하기 전인 1578년 경, 그는 함경도의 삼수군수(三水郡守)로 재직 중 파직당한 사례가 그것을 증명한다.
선조 11년 1월 이 당시 사헌부에서는 병조좌랑 신언경(愼彦慶)을 탄핵하는 동시에 김우추를 탄핵했다. 사헌부는 김우추에 대해 '광망(狂妄)하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으면서 그의 그릇된 직임 수행을 규탄했다. 이러한 탄핵에, 선조 역시 사헌부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를 파직했다.6 덕분에 김우추는 니탕개의 난에서 활약하며 자신의 불명예를 씻을 당시에, 이미 군수의 직임까지 수행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전의 파직전례로 말미암아 일개 군관으로서 참전하였다.7 니탕개의 난에서 공을 세움에 따라서 다시 북우후라는 고위 무관이 될 수 있었으나, 그 이전에는 그에 대한 중앙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했음으로 짐작할 수 있다.
김우추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사헌부로부터 '광망하다'는 평가까지 받으며 파직이 된 것일까. 『실록』에서는 김우추 파직의 정확한 사유를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김성일(金誠一)이 함경도 순무 어사로 파견되었을 당시의 일을 작성한 『북정일록』에는 김우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김성일은 기묘년(1579년) 10월 17일, 즉 김우추가 삼수군수에서 파직된 지 2년 정도가 지난 날의 일기에 밤에 그가 군수로 있던 삼수군의 진융루(鎭戎樓)를 올라 주변 사세를 살핀 일을 기술했다.
여기서 그는 이전에 있었던 김우추의 일을 꺼내면서 '김우추가 호인(胡人, 여진)인을 죽였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뒤이어 삼수의 전략적 요충지적 특성을 설명하며 그 군수가 적임자가 아닐 경우 관방과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김우추 같은 자가 군수가 되어 변방서 사단이 일어나지 않을래도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설명한다.8
또한 김상헌의 『학봉전집』 내 「학봉속집」에는 이 당시 진융루에 올라가서 지은 시가 쓰여져 있는데, 이 시에도 역시 김우추가 흔단을 만들었다며 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들어가고 있다.
(전략)
武弁貪功邊釁起/무변이 공을 탐내어 변방에 흔을 만들어 내니
誰將雄略鎭要衝/누가 장차 웅략으로서 진을 요충하려나
여기서의 무변이란 곧 김우추를 뜻한다.
즉, 이를 살펴 보자면 김우추는 삼수군수로 재임하던 중 여진인을 함부로 살해함으로서 해당 여진인이 소속된 번호 부락을 자극했고 그로서 삼수 일대에 불안감을 조장한 죄가 생겼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함경도의 변장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지역 여진 번호들에 대한 통제와 관리였는데, 명종~선조 초중기 무렵 -즉 김우추의 삼수군수 재직 당시 무렵에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당시 변장들은 조선에 우호적이던 번호의 관리에 소홀하거나 도리어 침학하면서 여진인들의 진상품을 횡령하거나 재산을 약탈하기도 했고, 토호나 군관들 역시도 이런 일을 벌이며 여진인들을 학대하여 그들이 도리어 앙심을 품게 하기도 했다.9 이는 거시적으로 조선 변경의 안정 상황을 붕괴시켜 나가는데에 내적인 일조를 했다.
선조 11년(1578년) 당시 삼수군수였던 김우추 역시도 그런 이들 중 일획이었다. 그는 김성일의 표현에 의하면 '공을 탐하여' 상대가 조선에 우호적인 번호 여진인인지 아니면 적대적 여진인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혹은 상대가 우호 번호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해했다. 그리고 그가 자행한 이 일이, 그의 관할 지역인 삼수군에 긴장 상황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을 요약하자면, 1578년 삼수군수 김우추는 공적을 위해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혹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번호를 죽였다. 그로 인해 살해된 번호인이 소속된 번호 부락과 삼수군의 조선군간에 긴장 상황이 발생하자, 이 사실을 인지한 사헌부에서 해당 문제를 발생시킨 김우추를 탄핵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파직되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김우추의 대체자로 변언수가 대신 삼수군수가 되었는데, 그는 김성일이 평가하기로 '재간이 좋고 함부로 거두지 않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순무어사로서 살펴본 결과 삼수군의 군민들의 생활이 편안했다고 한다.10 이것이 자신을 잘 대접해 준 변언수에 대한 김성일의 개인적 호감으로 발로된 평가일 수도 있으나11, 선조의 변언수의 능력에 대한 호평12과, 그가 시전부락 전투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한 것을 생각해 보자면 역량 자체는 준수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평에 따라 변언수는 경기수사(京畿水使)를 맡거나, 임진왜란 발발 직후 경성우위장(京城右衛將), 유도대장(留都大將)을 맡는 등 중임되었다.
하지만 김우추와 변언수의 생애에 대한 결과적 평가는 다르다. 김우추는 파직의 멍에에도 불구하고 후일 니탕개의 난 당시 군관으로 활약하여 그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북우후가 되었고, 이후 추도 전투와 시전부락 전투를 끝으로 자신의 무관으로서의 생에 유종의 미를 잘 거둔 반면, 변언수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중임을 맡았음에도 여러 실책 끝에 '망명(亡命)'의 죄목으로 결국 처형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 둘의 운명은 치세와 난세, 국경의 국지전과 국가간 전면전의 형국에서 엇갈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선조실록』 선조 16년 2월 30일, 『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2월 기사.
2.『선조수정실록』 선조 21년 1월 기사.
3.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8187021 참조.
4.시전부락 전투 당시에는 우후 직책에서 교체되어 절충장군 전우후로서 참전했다. 시전부락 정토를 앞둔 북방 인사개편으로서 서득운(徐得運)이 북우후 직책을 맡게 되었다.
5.화성시 화성문화원, 『해풍김씨 남양쌍부파 -무신의 길, 그 오백년의 발자취』, 2008, 화성시 화성문화원, 326~327쪽.
6.『선조실록』 선조 11년 1월 26일.
7.『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2월 기사. 僉使申尙節及軍官金遇秋。
8.김성일, 『학봉일고』, 「북정일록」 기묘년 10월 17일.
9.이에 대해서는 김세용, 2016, 『宣祖朝 尼湯介亂 硏究』,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45~50쪽 참조.
10. 김성일, 『학봉일고』, 「북정일록」 앞과 같음.
11.김성일, 『학봉일고』, 「북정일록」 기묘년 10월 9일.
12.『선조실록』 선조 20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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