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bs.ruliweb.com/best/board/300143/read/72224906
이 글의 댓글에서
이런 짤을 발견했는데
부싯돌 폭발력 문제는 처음 알았는데, 저기서 대답하는 오른쪽 남자가 진주박물관 학예사니까 아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거임
근데 이 짤은 애초에 조선이 왜 조총이 도입된 이후로 추가적인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았냐에 대한 문답이 아니라, 다른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예시로 든 거라 설명이 좀 부족함
그래서 '왜 조선이 개항기까지 화승총만 쓰고 휠락, 플린트락 같은건 도입을 안 했는지' 에 대해 추가 설명을 해보려고 함
참고로 글이 좀 긴데, 맨 밑에 3줄요약 있음
일단 의외로 기술력은 문제가 없었음
00년대에는 거의 정설이었고 25년 현재도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휠락에 들어가는 정교한 태엽/플린트락에 들어가는 고강도 스프링을 당시 동아시아 레벨에서 못 만들어서 복제를 못함' 이라는 설이 있었음
근데 이건 최근에 일본이나 중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물들이 재조명받고, 조선 측 기록이 새로 국역되면서 파훼됨
https://www.dpm.org.cn/collection/defense/234707.html
강희제 때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휠락 머스킷
18세기 일본에서 만들어진 플린트락 라이터
'만국 조총의 제도', 즉 남만(17세기 동아시아에서 네덜란드 등 서양을 일컫는 말)식의 조총을 만들었고, 이 조총이 명중률은 조총과 비슷한데 위력은 더 강해서 성능이 매우 좋다고 언급하는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4월 27일자 기록. 정황상 벨테브레(박연) 일행이 가지고 있던 총을 복제한 것으로 추측됨
즉 한중일 3국 모두 휠락, 플린트락을 제작할 기술력 자체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만들어본 사례도 있다는 거
그렇다면 문제가 뭐냐
걍 휠락, 플린트락으로 총기를 추가 개량할 이유가 없어서 그런 거임
여기서 그냥 '유럽이랑 달리 전쟁을 안했으니까' 라고만 하면 설명이 너무 부실하니까 좀 자세히 짚어보도록 하겠음
일단 위에 승정원일기의 '남만식 조총', 즉 플린트락 관련 기록이 쓰여진 시기는 인조 14년 4월인데, 이때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임
병자호란이 인조 14년 12월에 일어났거든
그러면 이런 의문이 들 거임
'어? 병자호란 일어나기 직전이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굉장히 강했을 텐데, 이때 플린트락을 복제 성공해놓고 추가 양산을 안했다고? 바보 아님??'
특히 병자호란의 패인을 두고 '조선군이 너무 조총원툴로 가는 바람에 청나라 기병돌격을 막기가 힘들어서 졌음' 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까, 저런 의문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을 거임
여기서 대체역사물 좀 본 사람들은 전쟁 전에 빠르게 훈련도감이라도 플린트락으로 무장시켜서 전열보병 빵야빵야 하는 상상도 가능할 거고
근데 말이지
'병자호란 때 조총원툴이라서 졌음' 은 사실 틀린 말임
오히려 당대 실전을 겪은 사람들은 '조총이 부족해서' 졌다고 판단함
왜냐면 일단 저때 조선은 아직까지 전군을 조총으로 무장시키지 못했거든
실제로 병자호란 일어나기 1년 전에 쓰여진 <화포식언해> 라는 병서에는 여전히 승자총통이 등장함
게다가 호란 도중 승전했거나 전술적으로 좋은 성과를 보여준 전투(광교산 전투, 김화 전투 등) 들은 하나같이 조총을 잘 다뤄서 이긴 전투들이지
흔히 생각하는 조총 쏘고 나면 창병이 나와서 방어해주고, 그동안 화살을 쏘면서 화력 공백을 메워주고, 조총 장전이 끝나면 다시 나와서 쏴주고~ 하는 아름다운 조별과제가 이루어진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임
- 인조 14년 12월 21일 승정원일기(병자호란 도중의 기록임)
그래서 분명 호란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조별과제를 강조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 인조 17년 1월 15일 승정원일기
호란이 끝나고 나니까 신하들이 "야 역시 원딜은 총이 최고야 우리 걍 활 없애고 걍 총이나 씁시다" 라고 건의하는가 하면
- 인조 17년 12월 17일 승정원일기
나중에는 아예 어영청(조선 오군영 중 하나)에서는 "전쟁 이후로 활은 총으로 바꿨고요, 창병은 아예 폐지했어요" 라고 언급하기까지 함
오히려 근접전 비중을 줄이고 조총 비중을 늘린 것이 '실전경험을 겪고 난 뒤의 개선점' 으로 나타난다는 거
요약하자면 병자호란은 '조총 비중이 너무 과해서' 전쟁에 패배한 게 아니라 '조총조차 부족해서 창고에 처박힌 승자총통까지 꺼내 오는 상황이라서 패배함' 에 가까웠다는 거고
그렇기에 조선은 전쟁 이후 조총을 대량생산하는 데에 필사적으로 매달림
다르게 말하자면, 저때 조선은 아직 화승총도 넉넉하게 무장하기 전이었다는 말임
그러니까 '아 조총 성능 좀 애매한데 이거 성능 좀 올려볼까?' 가 아니라, '조총 자체를 일단 꾸역꾸역 채워넣어야 하는 상황' 이었다는 말임
여기에 사건이 하나 또 터지는데, 바로 나선정벌임
나선정벌은 인조 아들내미인 효종 대에 일어난 국경분쟁임
청군이 국경을 넘어온 러시아군에게 패배하자 조선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고, 이후 파견된 조선 조총수들이 큰 활약을 펼쳐 승리한 전투임
이때 2차 나선정벌의 조선군 총사령관이었던 신유는 청군 사령관이 노획품을 독식하려고 하자 강하게 항의했고, 러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한 플린트락을 한 자루 받아오게 됨
내 기억이 맞다면 예전 대체역사물 같은 데서는 이때 가져온 플린트락을 양산하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것도 있었을 건데
아무튼 여기서도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옴
"아니 이때 플린트락 가져와놓고도 왜 아무 반응이 없냐?" 라고 ㅇㅇ
근데 이건 너무 당연한 건데
나선정벌 때 조선군은 그냥 이긴 것도 아니고 거의 양학 수준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
물론 이게 조선군 단독으로 벌인 것이 아니고, 청군이 몸빵을 해줬으니까 가능한 전적이기는 한데
아무리 그걸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교전비를 보여줬음
어느 정도냐면 1차 나선정벌 때 조선군은 걍 사상자 자체가 없었고,
2차는 교전 중 발생한 전사자가 7명인데 이마저도 조선군 사령관 신유의 일기에 따르면 사상자 하나도 안 내고 이길 수 있었는데, 청나라 사령관이 러시아 범선에 실린 모피를 탐내서 화공을 못 하게 하는 바람에 우물쭈물하다가 피해가 난 거라고 언급함
즉 조선이 플린트락을 접하고 그 이후로 벌어진 사건들의 흐름을 정리해보면
1. 플린트락의 개념 자체는 병자호란 이전에 인지함. 병자호란 직전에 복제도 성공함. 하지만 병자호란 때 조선군은 조총 -> 플린트락을 신경써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아직 조총도 충분히 양산이 안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플린트락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음
2. 정작 플린트락으로 무장한 적을 상대로 싸웠을 때는(나선정벌) 탈탈 털어버려서 아! 플린트락이 좋구나! 라고 느낄 수가 없었음
3. 그 이후로는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 등 내부 반란만 일어났고, 개항기 이전까지는 외국과의 안보 위기가 없었기 때문에 무기 발전시킬 이유가 없음
이렇게 3줄 요약해볼 수 있음
p.s. 아무리 그래도 병인양요 신미양요까지 조총원툴인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도 양요 전후로는 극심한 안보 위기를 느끼고 무기 개량에 심혈을 기울임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이후 청나라, 왜관 등을 통해 퍼커션 캡 라이플을 알음알음 도입하고 있었고, 특히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동화모(퍼커션 캡) 를 활용한 수중 기뢰를 설계하기도 했고, 신미양요 때는 일본을 통해서 유입된 퍼커션 캡으로 무장한 '왜창대' 라는 군부대 명칭이 기록에 등장함
현대인 기준으로는 당연히 부족해 보이겠지만, 당대 사람들이 준비를 안한 건 절대 아니었음
전쟁 위기가 왔는데도 무기 개량을 안하는 그런 바보같은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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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예나 지금이나 나쁜 무기보다 더 안좋은건 없는 무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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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덕후 답게 무기는 신경 많이 쓰려고 했지만 조선이 상상 이상으로 너무 가난했고… 일본도 없었던 맥심 기관총까지 들여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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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게 영지물때부터 이어져 대역물에도 계속 쓰이는 뚝딱 갈갈 보급ㅋㅋ 오오 좋아. 신기술 최고. 보급해라? 예? 굴리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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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은 조총으로 전군을 무장할 생산력 조차 없는 가난한 나라다 뺴애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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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예나 지금이나 나쁜 무기보다 더 안좋은건 없는 무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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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은 조총으로 전군을 무장할 생산력 조차 없는 가난한 나라다 뺴애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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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야아악 | 25.09.09 15:4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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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진지하게 답변해보자면 저때 조선 조정의 조총 대량생산 노력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함 그래서 분명 병자호란 때까지만 해도 아 조총 없어 어떡하지? 급한대로 승자총통이라도 쓰자! 라면서 빌빌거리던 게 조선이었는데 효종 때는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해오자 제주도 어민이 뭔 일인가 싶어서 집안에서 조총을 가져와서 경계할 정도로 많이 퍼지게 됨 | 25.09.09 15:5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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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게 영지물때부터 이어져 대역물에도 계속 쓰이는 뚝딱 갈갈 보급ㅋㅋ 오오 좋아. 신기술 최고. 보급해라? 예? 굴리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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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덕후 답게 무기는 신경 많이 쓰려고 했지만 조선이 상상 이상으로 너무 가난했고… 일본도 없었던 맥심 기관총까지 들여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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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댓글을 봐서 지금 답변함 이건 동아시아에 전래된 화승총이 애초부터 배 위에서 편하게 쓰기 위해서 개머리판을 자른 말라카식 화승총이어서 그런거임 이게 말라카식 화승총과 일반적인 화승총이 같이 들어온 상황이었다면 둘 다 쏴보고 아 개머리판 달린게 더 편하네 하면서 갈아탔을 수도 있는데, 처음에는 딱 말라카식만 들어온 상황이었고 이걸 기반으로 조준하는 방법이나 전술 같은거 다 짜놓은 상태였는데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개머리판 달린 화승총을 접할 일도 딱히 없고 하니까 딱히 불편한지도 모르고 걍 쓴거 어떻게 보면 플린트락 도입 안한거랑 비슷한 상황임 개머리판을 애초부터 접해보지를 않다보니까 그 존재 자체도 잘 몰랐고 그게 좋다고 느낄 일도 없었던거임 | 25.09.12 01:1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