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윤 4월 누르하치는 명나라측에 본인의 전쟁명분을 언급하면서 본인의 전쟁선언과 명분, 이후의 화친등에 대한 명나라 정부의 답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군대를 무장시켜 명나라에 대한 2차 공격을 준비했다. 명나라가 누르하치가 생각하기에 수긍할 수 있는 답을 보내지 않는다면,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향해 그대로 2차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음력 5월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조선에도 역시 서신을 보냈다. 그것은 2차 공격에 대한 준비가 한참 진행되던 와중에 진행된 서신 발송이었다. 그 서신 발송을 통해 누르하치는 자신이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을 조선에 공식적으로 전달했다.
조선으로서는 이미 명이 공격받은 사실을 정탐정보와 명나라의 정보 타진으로 알고 있었으나, 후금 정부 차원에서의 조선에 대한 전쟁 정보 공개는 최초라고 할 수 있었다. 서신을 가져온 후금의 차관들은 해당 서신을 만포측에 전달하면서 조선에게 전쟁에 참여하지 말 것을 압박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이러한 후금측의 위협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한편 누르하치는 이 시기 명나라와 조선뿐만이 아니라 몽골계 세력들, 특히 칼카 5부 세력에게 다시금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출병계획을 통지하면서 이에 대해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해 음력 7월에 있었던 양호의 보고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음력 4~5월중에 몽골 세력에게 무순 전투에서 확보한 것으로 판단되는 노획물들을 송물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다지고 명나라와의 싸움에 나서달라는 연락을 보낸 것으로 파악된다.1
이러한 사실은 명나라의 첩보 수집 결과에 의해 밝혀진 바이며, 후금의 당시 기록에는 이러한 일이 묘사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명이 거짓 정보 또는 잘못된 정보를 수집한 탓에 사실관계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에 확실히 송부한 서신에 관한 기록 역시도 생략되었음을 생각해 보고 또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접경 세력에 대한 외교적 행보가 이어지는 와중에 후금은 2차 출병 준비를 끝마쳤다. 2차 출병의 준비과정 끝에 출병준비가 완료된 후금군의 숫자는 후금의 내부기록상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2차 공격 당시 후금군의 주요 공략대상에 수천 이상의 병력이 주둔한 대규모 방위거점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 그 미만급의 거점들이었던 만큼 아마도 누르하치로서는 1차 출병이었던 무순, 동주, 마근단 원정에 투입된 병력과 비슷한 규모의 병력, 즉슨 2만여명 정도의 병력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보통 전례에 따라 병력을 출진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1612년 음력 9월과 1613년 음력 1월에 행해진 울라에 대한 1, 2차 대규모 공세에서 누르하치는 모두 동일한 규모의 3만 병력을 투입하여 규모를 일관화했던 만큼2, 명에 대한 2차 공격 역시도 역시 기존의 전례인 음력 4월의 출병의 사례를 적용하여 2만의 병력을 투입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을 듯 하다.
혹은 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했을 가능성 역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음력 4월에 있었던 최초 공격보다 광범위한 지역이 공격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음력 4월에 있었던 후금의 대명 공격은 후금군의 기습에 가까운 개전이었기에 명군이 방어태세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고 있었던 반면, 음력 5월의 공격은 이미 전쟁이 시작된 뒤이기 때문에 명군이 어느정도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점 역시도 후금이 이전의 작전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했을 가능성에 대해 떠올리게끔 한다.
이에 따라 보다 많은 군대를 투입하여 예상치 못한 상황3에 대비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이전보다 많은 병력-약 3~4만 정도의 쿠툴러를 포함한 대군을 투입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확실한 내부문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당시 투입된 후금군의 전력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것은 힘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금군은 1618년 음력 5월 17일에 누르하치의 직접 통솔하에 허투 알라를 출병했다. 이 때 출병한 후금군의 공격 목표가 된 지역은 무안, 화표충, 삼차아등 주로 1615년에 누르하치가 요동총병 장승윤으로부터 회수당한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 해당했다.4
음력 4월에 있었던 후금의 무순, 동주, 마근단에 대한 공격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초전에 기세를 잡기 위해 가장 피해효과가 클 국경지역들에 대해 공격을 한 것이었다면 ,이번의 공격은 이전에 자신이 당했던 굴욕에 대한 복수의 목적을 보다 명확히 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누르하치가 물질적 이득을 계산에서 배제하고 단순히 복수에 대한 개인적 욕망 내지는 국가적 대의명분만을 내세워 명나라에 대해 공격을 가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2차 원정의 진행상황을 살펴보자면 누르하치는 해당 원정에서 특히 식량의 노획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벌이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5 아마도 전쟁의 장기화와 그로 말미암은 잦은 소집으로 인해 식량수급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두에 두고서 식량의 확보에 특히 매진한 것으로 생각된다.
누르하치가 공격한 해당 요새들은 1615년까지 건주의 백성들이 경작했던 농경지역 상에 위치한 명나라 요새들이었으니만큼 주변의 경작지가 명나라에 의해 그대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 만큼 주변의 경작지에는 후금군이 확보할 만한 곡식들이 존재했을 개연성이 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굴욕에 대한 복수뿐 아니라 그 점 역시도 염두에 두고 해당 지역을 공격한 것 같다.
음력 5월 19일 무렵 명나라 국경내로 진입한 후금군은 그날부터 본격적인 2차 공격을 시작했다. 이 날 후금군은 무안, 화표충, 삼차아등의 요새 도합 11곳을 공격, 함락했다.6 이러한 공격 형태로 보건대 누르하치는 무순 전투 때처럼 군을 둘 혹은 그 이상의 복수로 나누어 각 요새들을 빠르게 공격한 것 같다. 당시 무안등의 요새에 주둔한 각각의 명군의 규모로는 후금군이 분산되어 공격해 오더라도 막아내기 힘들었고, 누르하치 역시 그 점을 인지하고 보다 빠른 작전전개를 위해 굳이 만단위의 대군을 하나로 뭉쳐 움직이지 않고 분산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기록상에서는 그저 요새들을 공격하여 취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19일 이후 후금군이 다른 명군 요새들에 취한 행동을 보자면 아마도 공격전에 항복을 종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해당 11개 요새들의 경우 항복했다는 구절은 없고 모두 '공격하여 취했다'7라고만 서술된 것을 보건대 해당 11개 요새들의 경우 후금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저항했다가 공격으로 말미암아 함락된 것으로 판단된다.
1. 노기식, 「後金의 遼東進出 前後 만주와 몽골의 關係逆轉」, 『중국학논총』 12,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1999, p.104./『명신종실록』 만력 46년 음력 7월 乙未
2. 『만주실록』 임자년 음력 9월, 계축년 음력 1월
3. 예컨대 음력 4월에 있었던 장승윤의 추격과 같은 명나라 야전군의 대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5월 17일
5. 『만문노당』 무오년 5월 20일~28일, 약술된 『만문노당』이 아닌 『구만주당』에는 식량의 노획과 관련하여 보다 세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후금군이 식량 확보에 열을 올린 것을 알 수 있다.
6.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5월 19일
7.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5월 19일, uhereme juwan emu hecen be afame gaif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