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만주실록>
흔히 누르하치의 거병 초창기는 '명과 이성량의 지원과 이해를 등에 업은 누르하치가 가볍게 건주여진을 통일했다'는 식의 인식이 많으나, 실상 거병 초창기에서 1589년 건주여진 통일 직전까지, 누르하치는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수 차례의 암살 위협과 일족 내부와의 갈등, 외부 세력의 연합적인 저항에 직면한 누르하치의 거병 초창기는, 명-보다 정확히는 요동아문 계통과 총병의 양해라는 이점이 있었다 할지라도 절대 순탄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역설적으로, 정녕 건주여진의 통일이 절대적으로 순탄했다면 그의 통일이 6년이나 소요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누르하치의 초기 전쟁의 상황적 열악함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전투 중 하나가 1585년 4월 혼하-기린 하다 전투였다.
1585년 4월 누르하치는 저천부 원정을 위해, 당시의 그와 건주여진의 상황으로서는 '대군'이라고 표현할 만한 5백여명의 군대를 소집했고, 그를 통해 저천부를 대상으로 한 확실한 상대 제압을 이루어 내고자 했다. 그들을 제압하면 지금까지 이어지던 본인의 세력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누르하치로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를 기준으로 불과 2개월 전에 있었던 타이란 전투에서 자신의 적대세력인 자이피얀(jaifiyan)과 그 연합군-사르후(sarhv), 둥기야(dunggiya), 바르다(barda) 세력과 충돌하여 열세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적의 수장 너신(nesin)과 바무니(bamuni)를 살해하고 피해 없이 빠져 나온 것이 그의 자신감을 강화시켰을 것이며, 나아가 수장급들을 상실한 일로 인해 적대 세력의 사기 역시 많이 떨어졌을 것이란 계산이 그가 자신의 출정에 박차를 가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로 인한 혼하 지역의 범람은 그의 대규모 원정을 막았고,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정예병들만을 소집하여 80여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구성, 이전 2월에 벌인 자이피얀 약탈전과 마찬가지의 약탈전으로 군사적 행동의 방향을 선회했다. 대규모 원정을 기획한 이상, 아예 원정 자체를 취소하자면 휘하 암반들과 병사들의 사기에 악영향도 있을 테고, 지난 타이란 전투 역시도 적의 수장들 중 2 명을 제거하는 성과를 얻긴 했으나 정작 물질적 이득 및 적에 대한 물질적 타격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략적 내지는 경제적 성과를 확보코자 약탈전을 진행했을 공산이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이피얀을 위시로 한 누르하치의 적대 세력들은 누르하치의 움직임을 수쿠 라이후(sukv laihv)라는 사람의 정보 제공으로 말미암아 파악하여, 이미 대응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이들은 누르하치가 이끄는 부대의 후방을 공략코자 기동했고, 그런 상황에서 두 군대가 조우하게 됨으로서 혼하-기린 하다 전투가 촉발되게 되었다.1
해당 전투는 누르하치 휘하 부대의 압도적인 열세 상황에서 벌어지게 된 전투였다. 자이피얀 세력을 위시로 한 반(反) 누르하치 연합군은 8백여명의 대군이었던 반면에, 누르하치는 정예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는 하나 그 10분의 1에 불과한 군대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배에 달하는 병력 차이 상황은 가시적으로 쉽게 해결 될 상황이 아니었고, 덕분에 정예병들과 친족들로 이루어진 그의 80여명의 정예 부대 역시도 사기가 요동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 상황을 대표한 것이 바로 누르하치의 휘하에서 종군하던 자친·상구리(jacin·sangguri)의 행동과 그에 대한 누르하치의 반응이었다.2
자친·상구리는 닝구타 버일러 연맹내의 다섯 번째 마파(mafa) 보올랑가(boolangga)의 손자였으며, 누르하치와는 육촌 관계였다. 보올랑가계는 막 거병했을 무렵 내부적으로 닝구타 버일러 연맹의 다른 계통(더시쿠, 리오찬, 소오창가, 보오시계)들과 갈등을 겪던 누르하치와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관계가 좋았고, 그렇기에 누르하치로서는 귀중한 내부 협력 세력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을 대표하는 이들의 일각인 자친·상구리는 한 명인 전황상 매우 불리한 상황에 겁을 집어먹고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 다른 자에게 입혔다.3
두 사람의 이런 행위를, 부대 내 갑옷 착용자의 비율이 적은 상황에서 다른 군인에게 자신의 갑옷을 대신 입혀 전열 앞에 서게 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역시도 충분히 비겁하고 의무를 방기하는 행위지만, 실상은 그보다 심각했다.
당시 누르하치 휘하에 종군하고 있던 이들은 모두가 면갑병(綿甲兵, olboi cooha) 내지는 갑사(uksin i cooha)였다.3 그렇기 때문에 자친·상구리는 병사들 모두가 갑옷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갑옷을 타인에게 맡기며 그들이 본래의 갑옷 대신에 자신들의 갑옷을 입게 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이런 행위를 한 까닭은, 당시 여진사회 내에서 본인이 입고 있던 갑옷을 타인에게 입히는 것이 곧 그 타인에게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대리하게 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1589년 조오기야 전투 당시 누르하치는 자신의 갑옷을 나이후(naihv)와 바르타이(bartai)에게 입혀 주어 일선에 보내면서 자신이 내린 명령을 전두지휘할 것을 지시한 바가 있다.5그렇기에 자친·상구리의 이런 행동은 상대하기가 매우 힘든 적의 대군을 목도한 상황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대행하게끔 하려 한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자친·상구리는 일개 평범한 병사도 아니고 누르하치의 친족이자 협력자로서 부대 내 서열상 상위권에 위치한 이들이었다. 또한 누르하치가 평하길 그들은 친족들 사이에서도 그 실력이 출중한 이들이었다.6 그런 이들이 이런 책임감 없는 행동을 보이며 겁을 집어먹는 것은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안그래도 흔들리고 있던 부대의 사기를 완전히 끌어내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그래도 불리한 현황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이들의 비겁한 행동을 크게 꾸짖으면서 자신이 직접 깃발을 들고 전면에 나서는 강수를 두면서 군대의 사기를 끌어 올려야만 해야 했다.8 이 때 누르하치는 이들에 대해 '본시 형제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강했던 너희가 지금에 이르러 대군을 보니 그를 두려워 하여 너희가 입은 갑옷을 입힌다'9며 그들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전투의 선두에 섰다.
당시 전투는 누르하치와 그의 형제 무르하치의 분전으로 말미암아 누르하치측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이 싸움에서 친족들과 병사들의 행태에 크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자친·상구리의 행동 탓으로 지금껏 믿고 있었던 보올랑가계에 대한 실망이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누르하치와 보올랑가계의 마찰 단초 중 하나가 되어, 훗날 살극찰의 난 당시 보올랑가계가 누르하치와 대립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을 공산 역시 조금은 있지 않을까 한다.
1.이상의 상황은 『만주실록』 권2 을유년 4월의 기사를 참조.
2.이전의 관련 글에서 각주로 짧게 다루었듯, 자친·상구리는 사료에 따라 한 사람으로 서술되기도, 두 사람으로 나뉘어 서술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자친과 상구리를 이어서 서술하되 가운뎃점(·)으로 나누어 서술하며, 나아가 자친·상구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다루도록 하겠다.
3.『만주실록』 권2 을유년 4월, jacin sangguri golofi etuhe uksin besufi gvwa de etubuhe manggi.
4.『만주실록』 권2 을유년 4월, olboi cooha susai, uksin i cooha gvsin uhereme jakvnju cooha be gaifi.
5.『만주실록』 권2 기축년, taizu sure beile safi, ini etuhe uksin be sufi naihv gebugge amban de etubufi coohai niyalma olji temxeme musei dolo wandurahv, tafulame nakabu seme hendufi unggihe (이하 생략)
7.『청태조실록』 권2 을유년 4월, 上怒曰。爾平日自雄於兄弟鄉黨間。今臨陣。何懼敵眾。反解甲與人耶。
8..『만주실록』 권2 을유년 4월, ini beye tu jafafi juleri dosire de
9.『청태조실록』과 『만주실록』에 따라, 그리고 한문본이냐 만문본이냐에 따라 당시 누르하치의 말이 미묘하게 달라지지만 대략적인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