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의 명나라에 대한 첫 번째 공격으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무순, 동주, 마근단, 주변의 명나라 진보를 함락하고 적장 이영방을 항복시켰으며 1천여호의 민간포로와 1천여명의 군병포로, 도합 30만의 노획물을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요동총병 장승윤과 그가 이끄는 군대까지 큰 피해없이 궤멸시키면서 본인이 설정한 전략 목표를 초과달성하는데에 성공했다. 더불어 요동의 여진계 명인가문인 동씨 가문 역시도 귀부시켜 한인지배정책에 대한 탄력을 더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누르하치의 1차 원정은 그의 완벽한 승리로 정리될 수 있었다.
그는 허투 알라로 복귀한 뒤 군법의 집행을 단행한 뒤 이영방을 자신의 칠남 아바타이의 딸과 혼인시키고 항복한 명나라 군병들과 한인들의 관리자로 임명했고 동씨 가문의 동양성과 동양진 역시도 그를 돕게끔 했다. 이 과정에서 동양성 역시도 누르하치의 삼남 아바이의 딸과 혼인했으나, 이영방이 아바타이의 딸과 혼인한 시기와 어느 정도 시기차이가 있는지는 여러 추론이 존재한다.
항복하여 후금에 내속되게 된 한인들에게도 포로들 치고는 대단한 대우를 하여 여러 가재도구와 기거할 곳, 가축을 지급했는데 이는 '항복'의 형태로 후금에 내속된 이들에게 좋은 대우를 함으로서 선전 효과 및 본인의 권위의 신장 효과, 충성심의 확보라는 이득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들에 대한 우대는 청이 입관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물론 이들이 후금 백성으로 편입되는데에는 체발이 필수였고, 그에 따라 그들은 최초로 대량으로 체발이 진행된 한족 백성 집단이 되었다.
이후 누르하치는 윤 4월 무렵에는 외부적인 군사활동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차례의 대규모 원정이 끝난 상황에서 군대의 전열을 가다듬어 혹시 모를 명나라의 역습을 대비하면서, 명측에서 자신에 대해 무언가 '외교적인' 반응을 보이기를 기대한 것 같다.
윤 4월까지,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따로 서신 같은 것을 보내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명으로서는 누르하치의 대규모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상당한 상황에서 명에서 먼저 누르하치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은 곧 누르하치에게 천조가 굴종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누르하치가 천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이상에야 명나라로서는 그를 확실하게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이 나았고, 그에 따라 이여백, 두송, 유정등의 총병급 실무 지휘관들을 배치하고 양호를 요동경략으로 삼아 누르하치에 대한 대비 및 요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1
명이 그렇게 행동하는 동안 누르하치는 윤 4월 22일에 칠종뇌한을 언급한 서한을 명으로 전송했다.2 이전에 필자는 4월에 누르하치가 명을 상대로 화친의 서한을 보낸 것에 이어 두 번째로 화친을 유도하는 서한을 보내었다고 기술한 바 존재하는데, 이는 장정수의 해석을 따른 바였다. 하지만 이는 명측 기록의 착간으로 판단되므로 실제적으로 누르하치는 이 때 처음으로 명측에 서신을 보내며 명측과의 협상을 유도했다.3 이는 자신의 공격 이후 명측에서 외교적 움직임 없이 군사적인 방어만을 준비하고 있는 것에서 기인한 대응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순전역 이후 얼마간은 승리 분위기 속에서 먼저 화친의 서신을 보내는 것이 후금의 지휘부내 분위기를 흐릴 수 있었으나, 그로부터 충분한 시일이 지난데다가 명측에서도 대화의 움직임이 없던 만큼 그제서 서신을 송부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 때 누르하치는 장유신(張儒紳), 장동(張棟), 양희순(楊希舜), 노국사(盧國仕)등 이전의 무순 전역에서 포로로 잡은 이들을 돌려 보내는 동시에 그들을 통하여 명측에 자신의 건국 사실과 명에 대한 전쟁 명분인 칠종뇌한의 전달, 그리고 화친의 제안을 전달했다.4
삽화 출처 : 칼부림
누르하치의 서신 송부는 크게 두 가지 의도를 고려할 수 있는데, 하나는 명의 군사적 대응 태세를 완화하고 그들의 역공을 늦추기 위한 기만책이며, 또 하나는 적의 방비 완화를 유도하면서도 가능하다면 실제로 외교적 합의를 통해 자신의 여진 지배권을 인정받고자 했음으로 생각된다. 비록 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긴 했으나 누르하치로서도 역시 후금의 현 역량과 요동 상황상 명과의 장기전이나 내지 점유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왠만하다면 명과의 전쟁은 빠르게 종결짓고 여허에 대한 공격과 그를 통한 여진 통일-지배를 인정받거나 최소한 묵인받고자 했을 공산이 있다.
특히, 누르하치가 명에 대해 서신을 보낸 시점이 누르하치가 명을 향한 2차 원정을 준비했다가 잠시 취소한 시점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만문노당』이나 실록 등지에서는 살펴지지 않으나 『구만주당』에서는 누르하치가 윤 4월 16일 명을 상대로 2차 원정을 준비했다가 군대의 준비와 군마의 회복이 아직 충분치 않음을 지적하며 원정을 미루고 군대를 해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5 이것이 실제로 명을 상대로 2차 공격을 준비한 것인지 아니면 후금의 제장들에게 명 공격을 미룰 당위성을 설파키 위한 '퍼포먼스' 였는지는 고민의 여지가 있으나, 누르하치는 이러한 배경을 두고서 명에 자신의 거병 명분과 화친의 제의에 관한 서신을 보냈다. 이를 보자면 누르하치가 군사적 의미에서의 기만과 외교적 의미에서의 협의를 둘 모두 고려했을 공산이 높다고 보여진다.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서신 발송 이후 얼마간 명의 움직임과 상황을 지켜보면서 명나라에 대한 2차 공격을 준비해 나갔다. 누르하치가 윤 4월 16일의 원정 연기 이후 다시 군대를 일으킨 것은 5월 17일이므로6 누르하치는 명에 서신 발송을 함과 동시에 병사, 병장기, 군마의 준비를 취소하거나 하지 않고 팔기의 각 구사와 니루에 자신의 기준점에 맞는 수준으로 그 모든 것을 준비케 했던 것 같다. 명이 자신의 화친 제안에 대해 응하지 않으면, 곧바로 다시 군사력을 이용해 압박을 가하며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했음으로 여겨진다.
군대를 대기시켜두는 동시에 누르하치는 조선에도 외교적 서한을 보냈다. 이는 후금 건국 이후 세 번째로 진행된 외교 서한 발송이었으며 전쟁과 관련하여서는 두 번째로 진행된 외교 서한 발송으로 지칭될 수 있다. 당시까지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전쟁과 관련하여 조선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비록 몇몇 후금인들이 개인차원에서 조선에 접촉을 해오긴 했으나 최소한 누르하치 본인은 그런 행동을 금지시키고 후금 정부차원에서도 따로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7아마도 조선과의 통교가 명나라에 대한 작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무순 전투 전후 무렵에 일시적으로 연결을 차단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2차 원정을 준비하는 와중에 조선에 서신을 보낼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명과 조선의 공조체제를 의식한 탓으로 보인다. 명나라에 대한 전쟁에 들어간 만큼, 조선이 명나라와 연계하여 후금의 후방을 치거나 명나라의 조병요구에 응하는 상황을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누르하치로서는 오로지 명나라에 집중해야만 전황을 보다 유리하게 끌고 나갈 수 있었으므로 타당한 선택이었다.
누르하치의 서신은 평안도 만포로 발송되었다. 해당 서신은 5월 16일, 즉슨 누르하치의 대명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했는데 편지 겉면에 '朝鮮國王開拆'이라고 쓰여 있어 광해군에게 직접적으로 보내는 서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포첨사 장후완은 해당 서신을 수신하지 않으려 했으나 후금의 차인들이 본인들은 단지 서한을 전하러 왔을 뿐이라고 말하자 결국 서신은 임의로 보관하고 그 서한의 내용만 등서해서 상부로 올려보내기로 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후금의 차관들을 잘 대접하는 한편으로 하세국과 방응두를 시켜 그들과 대화를 나누게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량의 정보를 확보했다.
삽화 출처 : 칼부림-김경서와 누르하치
보고는 평안병사 김경서에 의해 조정에 올라왔다. 해당 정보획득 과정에서 조선은 지금까지 조선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끊겼던 것은 누르하치의 기밀유지지시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했고, 더불어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이유를 재차 확인했으며 무순 전투의 대략적인 정보 역시도 파악했다. 여기서 해당 후금 차관들은 이영방을 항복시키고 그를 아바타이의 딸과 혼인시킨 것, 1천여명의 명군을 후금군으로 편입시켜 선봉으로 세운 것등의 정보는 물론 5~6월 사이에 재차 출병할 계획인데 아직 확정치는 못했다는 기밀 정보도 확보했다.
출병과 관련한 기밀 정보에 관하여서 누르하치는 5월 17일, 즉슨 후금의 차관이 만포에 도착한 다음날에 출병을 했으므로 누르하치는 차관들을 조선에 보낸 직후 출병의 시기를 결정했던가 혹은 아예 조선에 거짓 정보를 뿌린 것으로 사료된다. 필자의 경우에는 전자의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판단한다.
이어서 후금의 차관들은 우리 조정(我朝)은 조선과 신의관계를 지키고 있으나 조선이 명나라를 돕는 선택을 한다면 결국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으니 명나라의 참전요구에 따르지 말고 조선의 강토만을 지키라고 압박했다.8
압박의 형태를 띄고는 있으나, 해당 종용은 결과적으로 당시 후금이 조선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당시 서신의 내용 역시도 칠대한(칠종뇌한)의 재차 언급과 더불어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다는 내용이 확인되는데 칠종뇌한의 재차 언급 자체가 후금이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조선을 향해 전쟁에서 후금을 적대치 말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 후금의 차관이 본인들의 세력에 대해 아조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주목할 만한데 이는 후금의 차관들이 본인들의 세력을 명실상부히 국가로 칭하며 조선을 상대로 국가 대 국가간의 외교행동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조선을 상대로 국가간 외교관계를 구축코자 그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9
이에 대해서 차관의 접대를 맡은 통사 하세국은 '중국 조정이 2백여년동안 쌓아온 국력으로 너희 소추를 상대하는 것은 태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굳이 외국에 도움을 요청할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로 인해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을 파악해 보자면 당시 하세국의 말은 후금의 전쟁불참요구에 대해 간접적으로 조선이 사태에 끼어들지 않을 것을 내비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비록 조선과 명의 관계나 후금의 존재성등 외교적 형세를 고려해 보건대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할 수는 없었으나 최대한 전쟁위협을 낮추려 한 것이다.
5월 29일 조선 조정이 이 후금서신의 수신을 파악한 직후 함경도에도 비슷한 소식이 전해졌다. 해당 진고를 전한 인물은 여진인 우장개였는데 서신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고 다만 만포에 도착한 정보와 대략적으로 일치하는 정보를 가져왔다. 이러한 내용의 서한과 정보전달은 당시에 조선에서 논의되고 있던 명나라의 조병요구 문제와 연동되어 광해군과 조선 조정이 명나라의 조병요구에 더욱 소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0
1.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윤 4월 1일, 2일
2. 『만문노당』 무오년 윤 4월 22일.
3. 이에 대해서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71175992 참조.
4.『명신종실록』 만력 46년 4월 25일. 이상과 각주 3번의 링크를 통해 언급했듯, 이는 착간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윤 4월 25일의 반응일 것이다.
5.『구만주당』 무오년 윤 4월 16일.
6.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5월 17일
7. 『비변사등록』 광해군 10년 5월 22일, 5월 26일
8.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10년 음력 5월 29일
9. 장정수, 「조선의 대(對)명 후금 이중외교와 출병(出兵) 논쟁의 추이」, 『한국사연구』 191, 한국사연구회, 2020, 323~324쪽.
10. 장정수, 앞의 논문. 2020,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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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인데, '천여호의 민간포로와 1천여명의 군병포로, 도합 30만의 노획물을 확보했다' 여기서 30만은 은이나 금과 같은 화폐 단위로 환전했을 숫자인가? 잘 몰라서리 | 25.06.29 13:0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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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만문기록상 나오는 올지(olji)를 노획물로 치환한 것인데 올지는 명시적인 의미는 '포로'이지만 실상 가축이나 노획물등 여러 부가적인 노획물 역시 포함함. 즉, 인축과 함께 은이나 귀중품등의 각각의 물건들 역시도 합산된 거라고 보면 됨 | 25.06.29 13:1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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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당 가치라고 봐야 하나? 노획이나 약탈이 자주 일어나니 그에 대한 단위가 있다는 것도 합당하다면 합당하구나 | 25.06.29 13:14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