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 21일, 누르하치는 자신의 군대를 추격해온 요동총병 장승윤의 명군 부대의 존재를 탐지했다. 누르하치는 처음에는 그들과 싸우고자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두 아들,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장승윤군과 싸워야만 하는 이유를 들며 전투를 건의하자 본인의 본래 생각을 바꾸고 장승윤군을 요격하기로 한다.
이에 따라 누르하치는 자신이 대동하고 있던 군대를 이끌고 장승윤 휘하 명군 부대가 포진해 있는 방어지점으로 진군, 그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당시 장승윤은 고지를 점유한 채로 참호를 파고 총포를 배치한 상황이었기에, 병력의 질적으로 후금군에 비해 열세이던 상황을 보완하여 충분히 승산이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러한 장승윤군의 유리한 입지를 당시 전장에 닥쳐온 바람을 이용해 적절히 분쇄하고 그 틈에 우월한 기병전력을 이용해 장승윤군을 향해 손쉽게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 장승윤군이 바람으로 인해 일체의 반격을 하지 못했느냐면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문노당과 청태조실록계 사료(만주실록 포함)에 의하면 바람으로 인해 총포사격이 지연된 통에 누르하치군의 돌격이 단 한 차례도 저지되지 않았으나, 흠정 팔기통지 135권과 청사고의 피옹돈 열전을 살펴보자면 그래도 명군은 유리한 고지를 점유한 채로 어느정도나마 반격을 가한 듯 하다. 비록 팔기통지와 청사고 열전의 기술이기에 완전히 맹신할 수는 없으나, 피옹돈이 당시 상황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 공적으로 피옹돈은 누르하치로부터 만인적(萬人敵)이라고 불렸다고 한다.1
물론 명군이 어느 정도 반격을 가했다고 해도 바람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반격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로 판단된다. 후금의 기록에 의하면 한 번 방어선이 돌파당한 명군은 후금군에 의해 궤멸적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 많은 수의 병력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명의 기록에도 역시 각각 한 영을 지휘하고 있던 유격 양여귀와 부총병 파정상이 가까스로 포위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결국 장승윤의 죽음 이후 전장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못하고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살아남은 명군은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도주했지만, 후금군은 대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채 후퇴하는 명군을 약 40여리에 걸쳐 추격했고 그 뒤에야 추격을 멈추었다고 한다. 당시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명군의 수효는 어떤 기록에서건 전체 숫자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2
(영화 남한산성 中, 바람의 영향으로 화기의 재장전에 악영향을 받은 조선군이 청군에게 도륙당하는 장면의 묘사. 영화 속의 해당 전투는 실제 병자년 12월 29일의 전투를 모티브로 각색을 한 전투이다. 본 전투에서도 영화 속의 전투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까 한다.)
해당 전투로 인해 명군이 입은 손실은 사실 병력적인 면보다도 지휘부 타격 부분에서 컸다고 할 수 있었다. 이 때 명군을 지휘하던 총지휘관이던 요동총병 장승윤은 교전중 전사했으며, 함께 전투에 참전했던 부총병 파정상과 참장 포세방 역시도 전사했다. 그외에도 장관, 장교급이 다수가 전사했다. 이러한 고급 지휘관 및 그 아래급 장교들이 다수 살상되면서 요동의 군사지휘체계는 얼마간 본래대로 작동치 못하고 그 동력을 잃게 되었다.
해당 전투를 통해 얻은 노획물의 경우도 꽤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문노당』에 이르기를 갑옷 7천벌과 말 9천마리를 노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시여리 근교 전투 1회의 교전으로 말미암아 이만큼의 노획물을 얻었기 보다는 어느정도 윤색이 들어갔을 것 으로 고려하지만3그렇다 하여도 후금군이 명군 전사자들로부터 다수의 갑옷과 다수의 말, 그리고 화약과 화기 다수를 노획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에 시여리 근교 전투는 다이샨과 홍타이지의 과감한 판단과 누르하치의 과감한 수용, 그리고 전장의 변수로 작용했던 바람 덕분에 후금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 전투로 인해 무순과 마근단, 동주 일대를 함락하고 다수의 포로와 노획물을 확보하는 선에서 끝날 예정이었던 누르하치의 1차 원정은 총병급 장수와 부총병급 장수를 함께 패몰시키고 대규모의 야전군에게 궤멸급의 피해를 입히는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요컨대 누르하치의 1차 원정은 전과면에서 목표의 초과달성을 이루게 되었다.
누르하치의 군대가 전투를 끝마쳤을 무렵은 이미 야간이었던 것 같다. 숙영지를 설치하려 했다가 명군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이후 다이샨과 홍타이지의 권유에 따라 교전에 나선 것이었던데다가, 40여리에 걸친 잔당 추격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탓에 후금군은 그 날 하루를 명의 경계 내에서 숙영하면서 노획물을 정리해야 했다. 이러한 점은 패전한 명군 장병들 중 일부나마라도 생존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월 22일에는 재전에 따른 논공행상으로 부상자들과 전공자들에 대한 포상이 재차 이루어졌고, 노획물의 정리 역시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때 노획대상(olji)에 실제 인명 포로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있었다고 해도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2일에도 역시 노획물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기에 누르하치는 조금 영을 움직여 명과 후금간 경계에 걸친 지역에서 숙영했다. 그와 그의 군대는 다음 날인 23일에야 겨우 모든 노획물을 정리하고 21일에 숙영하려 했던 시여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4
당시 누르하치의 군대의 이동속도가 느렸던 것은 노획물의 정리때문에 시간이 소요된 탓도 있었으나 노획물이 많은데에 비해 움직일 병력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에 대해, 이미 다수의 병력을 20일에 선행하여 허투 알라로 보낸 참에 소수의 병력만으로 막대한 노획물을 옮기는 작업이 느려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 뿐 아니라, 장승윤군의 패몰 이후로 또 다른 명군 추격부대가 뒤에서 엄습해올 수 있음 역시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 명군의 상황상 그러한 2차 추격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노련한 지휘관이었던 누르하치로서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누르하치는 23일부터 허투 알라로의 본격적인 복귀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서 후금의 명나라에 대한 1차 원정에서의 전투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1. 『흠정 팔기통지』 135권/『청사고』 권 225 피옹돈 열전. 팔기통지와 청사고의 뉘앙스가 약간 다른데 팔기통지에서는 누르하치가 피옹돈을 '만인적'이라고 칭했다 기술하며 청사고에서는 피옹돈을 칭하기를 '진만인적'이라고 서술한다.
2.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21일, 『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21일,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3월 21일, 『명사』 권 239 장신 열전 부록 장승음 열전외. 전사자와 생존자의 실제적인 추론에 관하여서는 이후 보다 자세히 다룸.
3. 이 역시도 추후 다룰 것을 기약한다.
4. 이상까지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22일~23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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