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바야라 부대
바야라(bayara)는 후금/청조의 정예부대이자 호위부대였다. 한자로는 호군(護軍) 내지는 호군영(護軍營)등으로 칭해진다. 호위부대라고는 하지만 비단 그 임무가 호위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한 명 한 명이 우수한 실력을 지닌 전투병인데다가 부대 자체도 다른 부대들보다 뛰어난 평균역량을 지녔기에 전투에서 다목적으로 운용되었고, 활동했다. 그들은 일반 팔기들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구사하 니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임무 혹은 전시에 동원 차출되었다.
타자들이 보기에 수은갑 혹은 양은갑으로 대표되는 갑옷을 착용한 그들은 팔기 내에서도 일반 팔기병에 비해 높은 위치를 점유하면서 엄격히 관리되었다. 후에는 이들보다도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소수 정예의 군대, 근위대(갑시햔 초오하gabsihiyan cooha-전봉군, 히야hiya, gocika hiya-시위, 어전시위)가 편성되면서 조금 위상이 내려간 바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높은 위상을 점유했다.
바야라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 후금의 기록을 보면 바야라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618년 음력 4월 누르하치가 최초로 명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뒤서 부터이다. 이 때 누르하치는 각 니루에서 40명의 병력을 차출하여 팔기 원정군을 편성하고 여기에 각 병사들이 쿠툴러를 차출하게 하였으며, 더불어 바유트와 사할차 종군병력을 합산하여 무순 공격군을 완편했다. 여기서 바야라의 존재 역시 언급되는데, 누르하치가 군을 두 개로 나누어 진군시킬 당시에 누르하치는 동주, 마근단을 공략할 부대는 좌익 4개 구사에서 바야라를 제외한 병력으로 구성했으며 자신의 군대는 우익 4개 구사의 일반 팔기 병력 + 모든 구사의 바야라 병력 + 사할차, 바유트군으로 구성했다.1
이 때도 바야라는 일반 팔기들과 구분되고 있었으므로 이 때에도 역시 정예군/호위군으로서 바야라가 기능했음을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이 때에 바야라가 정상적으로 차출,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이 이전에 바야라라는 집단이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야라 집단의 정확한 구성/혹은 창설 시기의 경우 후금의 기록에서 알 수 없다. 앞서 말했다시피 바야라가 최초로 언급된 기록이 바야라의 전투 투입이 지시된 기록이므로, 바야라가 이 이전에 구성되었음은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설 시기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바야라가 최소한 누르하치가 겅기연 한에 즉위하기 전/후금이 건국되기 전, 즉슨 누르하치 세력이 아직 '건주'였을 시절에 창설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료가 존재한다.
광해군 7년 사은사 윤방은 광해군의 친모 공빈 김씨가 왕후로 추숭된 이후 그에 대한 고명과 책봉 칙서를 받아오는 임무를 띄고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건주의 상황을 살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2 이 때 윤방은 건주군 중 일부가 비단옷을 입고 그 위에 수은갑을 착용했으면서도 조금의 피곤한 기색도 없이 근무를 서는 것을 보면서 무척이나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건주군의 역량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파악했다.3
그런데 여기서 윤방이 목격한 건주군은 일반 군병이 아니라 바야라로 추정된다. 옷감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정주국가에서도 상당히 귀하게 취급받는 비단옷을 입은 것에서부터 윤방이 목격했던 해당 군병들이 일반 군병 집단은 아님이 드러나는 데다가, 해당 병사들이 극히 정예했으며, 뭣보다도 당시 바야라들의 특징이 수은갑을 착용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속잡록과 광해조일기에 의하면 사르후 대전 이후 포로로 잡힌 강홍립은 후금서 본인이 올린 장계에 수은갑을 입은 호위군의 존재를 명시했다.3 또한 1621년 후금을 방문한 정충신 역시도 바야라를 '별초'로 언급하면서 그들이 수은갑을 입었다고 명시했다.4 이로 보건대 이 무렵 바야라들은 일률적으로 수은갑을 착용하고 근무를 서거나 임무에 임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방이 목격한 '수은갑을 착용한 건주군' 역시도 단순히 일반병이 아니라 바야라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윤방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돌아온 시기가 1615년 상반기였으므로 이 때에 이미 건주에 바야라 체계가 잡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15년은 일반적으로 사기(duin gūsa)체계가 팔기(jakūn gūsa)구축되었다고 추정되는 시기이지만, 이 조치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바야라들이 편성되었으리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바야라에게 지급할 수은갑을 단기간에 수백 수천벌씩 만드는 것은 건주가 아무리 야철업과 갑옷제조기술이 기존의 여진 세력에 비해 극히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무리였으며, 병종의 편성 역시 그리 단기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다.
이로 보건대 바야라들 또는 바야라의 전신이라 할 만한 조직은 1615년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것 같다. 즉슨 후금이 건국되기 전을 넘어서 팔기 체계가 편성-구축되기 이전, 팔기의 전신인 사기(四旗)가 건주의 군사/행정 체계로 존재했던 시기서부터 이미 건주군에 편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확한 편성 연대는 파악이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슈르가치와 추영이 살아 있던 시기에도 바야라들은 각 구사에 존재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바야라들은 일반적으로 판단되는 것과 같이 후금이 건국된 이후나 팔기가 구축된 이후에 처음으로 편성되지 않고, 오히려 후금 건국과 팔기 체계의 구축에 선행하여 존재했던 병종 및 부대집단 이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이를 기반으로 생각해 보건대 바야라는 그 기원이 생각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 『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13~14일
2.공빈 김씨의 추숭에 대하여서는 계승범, 2008, 「恭嬪 追崇 과정과 광해군의 母后 문제」, 『민족문화연구』34,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동저자, 2021, 『모후의 반역 : 광해군대 대비 폐위논쟁과 효치국가의 탄생』, 역사비평사, 173~200쪽 참조. 단, 저자와 같은 조선사 연구자 오수창은 해당 서적에 대해 강한 비판적 의식을 가져 저자와 비판자 양자간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공빈 김씨의 추숭과 관련하여서는 견해와 개괄 측면에서 참조할 만 하다고 여겨진다.
3.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7년 윤 8월 5일
3. 『속잡록』 권1 기미년, 臣等到胡城. 卽令來見. 入其庭則左右被水銀鎧. 三行排列.
4.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13년 음력 9월 1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