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 15일, 누르하치는 무순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마시를 요청하는 척 하면서 위장부대를 투입한 뒤 그 틈을 노려 공격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금의 기록을 보자면 무순은 그 공격 한 번으로 붕괴되진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영방은 어떻게든 군대를 규합하여 무순을 사수할 태세를 갖춘 것 같다.
누르하치는 이영방에게 항복을 종용했으나 이영방은 처음에는 그 요구를 거부하고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대군을 상대로 소수의 병력만을 데리고 있던 이영방이 항전을 결심한 것은 물론 대단하다고 평가할 만 하지만, 그가 전투 마지막에 행한 선택을 보건대 그저 무모하게 의기만으로 항전 결심을 한 것 이기보다는 어느정도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항전을 결심했다고 보여진다. 아마도 명군이 보유한 화력과 수비입장이라는 이점, 그리고 후금군의 공성역량에 대한 과소평가가 그의 항전에 영향을 미쳤을 전투요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자존심 역시도 그가 항복을 주저하게 된 이유였으리라 본다.
이영방이 만약 그 현장에서 순절했더라면 아마도 명에서는 그를 오랑캐의 대군의 기습에 맞서 싸워 순절한 영웅으로 칭송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영방은 순절치 않았다. 이영방은 성벽에 후금군이 올라서고 교두보가 확보되기 시작하자 그 시점에서 수비 항복을 결행했다. 이미 성벽을 점거당한 상황에서 항복을 선택했음에도, 일단 이영방의 항복 자체는 받아들여졌다.
후금의 기록에서는 이영방의 항복 의식에 대한 묘사가 사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을 비롯한 원당/노당 계열의 사료에서 이영방은 조복(朝服)을 입고 말에 탄 채로 누르하치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 출성을 했는데, 누르하치는 그가 자신을 상대로 저항을 결의했음에도 말에서 내리게 하지 않고 그의 항복을 받았다. 누르하치는 말 위에서 자신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이영방에게 별 다른 힐난 같은 것을 하지않고 말 위에서 그에게 똑같이 회답했다.1
무황제실록과 만주실록서는 항복을 하는 이영방의 태도가 보다 공손해졌다. 이영방은 누르하치의 종제 아둔 히야에게 인도되어 누르하치의 앞에 선 뒤 본인이 탄 말에서 내려 누르하치에게 무릎꿇고 인사했다. 누르하치는 이에 본인 역시도 손을 들어 올려 이영방에게 회례했다.2
고황제실록에서는 한 차례 더 개변이 보이는데, 이영방이 말을 타고 성을 나온 뒤 아둔에게 인도되어 누르하치의 앞에 선 것까지는 위의 무황제실록이나 만주실록과 동일하지만, 누르하치에게 보다 비굴하게 항복했다. 여기서 이영방은 포복을 하며 누르하치를 알현하였고 누르하치는 그런 이영방에게 말 위에서 회례했다.3
후대에 편찬된 사료일수록 이영방의 태도가 비굴해지고, 이영방의 항복 당시의 모습에서 누르하치의 위치가 격상하며 이영방의 위치가 격하되는 것을 알 수 있다.4 이는 명나라를 상대로 한 역사적인 첫 번째 전투의 상징성을 더욱 강화하고, 누르하치와 이영방의 격차를 더욱 벌려 누르하치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영방의 투항에 관한 기술중 가장 실제에 가까운 것은 구만주당과 그 복간개수본인 만문노당일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의 기술이야말로 투항한 이영방에 대한 누르하치의 의도가 보이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말 위에서 서로에게 손을 들어 서로에게 격식을 차리는 방식의 인사는 1613년 음력 12월 누르하치가 여허 공격에 관하여 명나라에 대해 해명서신을 전달할 때에 둘 사이에 이미 똑같이 행해졌던 전례가 있다.5
해당 인사는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나누어진 것이나, 일개 당시 비어였던 이영방과 한 세력의 수장이었던 누르하치의 입장, 그리고 누르하치가 직접 무순에 출두했어야 했던 입장등을 고려해 보자면 누르하치가 상당히 양보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4년 반의 시간이 흘러서 누르하치가 그 때와 같은 방식으로 투항한 이영방과 다시금 인사를 나눈 것은 누르하치가 이영방에게 지난 번에 나누었던 인사를 떠올리게 함으로서 이영방에게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이영방에게 그가 저항을 하다가 항복한 항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 자신이 이영방을 대했던 것처럼 예우해 해주겠다는 뜻을 알린 것으로 유추된다.
이렇게 이영방은 투항했고, 그와 함께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명나라 군병들 역시도 이영방을 따라 투항했다. 그러나 투항한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 과정중에서 당시 이영방과 함께 무순을 지키던 천총 왕명인은 전사했고 다른 군졸들도 상당히 많은 수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영방이 항복한 이후 누르하치는 무순의 백성들을 항복시키고 포로화하는 동시에 또 다른 성을 공략하기 위해 군을 움직였다. 이 기술은 작전 정황이 요약된 만문노당이나 실록에서는 생략되며 구만주당에만 서술이 되어 있다.
아마도 무순을 점령한 뒤 당시 동주, 마근단과 그 주변을 공략하고 있던 군단을 원호하기 위해 움직인 것으로 사료된다. 누르하치는 손쉽게 공격대상이 된 성을 점령했다.6이후 당일날 누르하치는 직속군을 거두어 무순으로 회군, 그 곳에서 군대를 숙영시켰으며 다른 곳에서 작전을 진행하던 군대, 요컨대 동주와 마근단, 그 주변 농장과 진보들을 공략하던 군대는 따로 무순으로 이동치 않고 작전 지역에서 그대로 숙영하게 하였다. 그것으로 무순 전투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군사작전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1. 『구만주당』,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5일
2. 『무황제실록』, 『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15일
3. 『청태조고황제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14일
4. 단 『만문노당』과 『만주실록』의 경우 모두 건륭제 당시에 기존의 사료(구만주당, 무황제실록)을 이용하여 복간 개수, 편찬한 사료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5. 『만문노당』계축년 음력 12월
6. 『구만주당』무오년 음력 4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