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커녕 웬만한 장군의 방이라고 해도 안 믿을 정도로 소박한 집무실 안.
바실리오스 2세는 책상에 앉아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병사들의 기합을 감상하며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은발, 그리고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촐한 복장.
심지어 황제를 상징하는 자주색 로브는 바닥에 내팽겨쳐진 상태였다.
내가 군례를 올리고 책상을 향해 다가가자, 황제는 눈길을 서류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친위대장, 자네가 나에게 먼저 알현을 청한 것은 오랜만이군 용건을 말하라."
인사도 없고, 노고에 대한 치하도 없이 곧바로 용건을 물어온다. 동로마 제국의 중흥을 불러온 황제는 이런 인물이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순간이다.'
조카딸이자 유력한 제위계승자의 혼전 임신.
제국의 후계 구도에 일순간의 대격변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보고를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상대가 바실리오스 2세라면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황제께 은총을. 조이 황녀께서 회임하셨습니다."
멈칫, 펜을 향해 손을 뻗던 황제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 어떤 인물이 아이의 아버지인가?"
황제는 똑같이 평온한 목소리로 질문을 이어갔다.
나 역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접니다."
"......"
정적.
황제가 드디어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봤다.
당황하기는커녕 미간에 주름조차 잡히지 않은 무표정.
과연 황제 폐하 다운 감정조절 능력이다. 내 입실을 알렸던 환관은 거의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봐라. 환관 마르코스를 데려가라.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황제의 명령에 집무실 밖에서 시립해 있던 경비병들이 들어와 환관을 데리고 나갔다.
거품을 문 채 팔다리를 휘저으며 나에게 달려들려 하던 환관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방 안에는 나와 황제만이 남게 되었다.
한참을 나를 응시하던 황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양 손의 손가락들을 마주 대더니 톡톡 거리기 시작했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마다 무심코 나오는 황제의 버릇.
"그렇게 환관이 되고 싶었으면 그냥 나에게 이야기하지 그랬나."
어, 이건 안 좋은데.
"송구하오나 저는 군인으로써 콘스탄티노플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가? 그러고 싶었다면 스스로의 행실을 좀 더 자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을."
"송구할 뿐입니다."
참고로 손가락 톡톡은 고증이라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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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슴안해슴? 해슴 | 24.05.16 15:2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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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피아-동로마 황녀가 내 아이를 임신하셨다 | 24.05.16 15:3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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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 24.05.16 15:34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