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1. 정윤칭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537114
고려사 2. 태조의 세력 기반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68896
고려사 3. 호족연합정권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69247
고려사 4. 혜종-정종 왕위쟁탈전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78207
고려사 5. 광종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78496
고려사 6. 고려 귀족정치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79464
고려사 7. 고려의 봉작제도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84641
고려사 8~13. 고려 초기 외교사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89785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9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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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14~17. 고려 초기 정치기구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867325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867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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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18. 삼별초 항쟁(특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871779
고려사 19~23. 고려 초기 지방정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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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게이 하나가 고려거란전쟁 얘기를 해보길래 이번에는 3차 여요전쟁 및 귀주대첩을 주제로 한번 써볼까 함
일단 귀엽고 이쁜 아츠코 공주 짤부토 올리고
3차 여요전쟁의 배경부터 먼저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차 여요전쟁에서 고려와 요는 서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죠
고려는 개경을 뺏기고 국토 북부가 한번 박살이 났죠.
대신 양규 장군의 흥화진을 비롯, 일부 국경지에서는 요 군에 대해서 상당히 분전, 항전하는 등의 성과를 냈습니다.
요는 일단은 승전하긴 했지만, 사실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요의 최종 목적은 고려 정복이었지만, 목적 달성에는 실패한거죠.
아무튼 2차 여요 전쟁은 고려 현종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이라는 조건 하에 끝납니다.
'거란주(契丹主)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물러났다', 1011년 1월, 현종 2년의 일입니다.이후 한동안 고려와 요의 관계는 아슬아슬하게 유지됩니다. 서로 사신의 교류도 있었고, 경조사에 대한 의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요에 대해 고려가 종전 조건 이행을 걸고 유지되는 아슬아슬한 평화였죠
<고려사>를 인용하자면 요는 고려에게 이 종전 조건 이행을 여러번 요구했습니다.
- 거란(契丹)이 왕의 친조(親朝)를 명하는 조서를 보냈다.
- 갑자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거란(契丹)에 보내 여름철 안부를 묻고, 또 왕이 병이 나서 친조(親朝)하지 못함을 알렸다. 거란주(契丹主)가 분노하여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 등 6개 성을 빼앗으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사신의 교류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세세하게 목적이나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고려의 완전한 항복과 굴복을 요구한 것 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고려는 당연히 이를 실행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시행하는 순간, 고려라는 나라의 독자성이 사라질 건 분명하니까요.
그리고 요 역시 이를 진짜로 기대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려가 한두번 구라친게 아니었으니까요.
이렇게 양국은 서로 눈치싸움과 기싸움을 했습니다.
어차피 전쟁이 다시 일어날 건 기정 사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둘 다 각을 보고 있었다는거죠.
그리고 전쟁의 시작은 요의 보주 점령이었습니다.
요는 여진족과 합류, 소규모로 고려에 대한 공격을 반복, 이번에는 고려의 보주를 점령합니다.
보주의 점령은 요가 고려를 침공할 교두보의 마련이라는 의미가 있었죠.
이에 고려는 잠시 송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친송정책을 폅니다.
당연히 요 입장에서는 이에 분노,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었죠.
그리고 고려과 송의 연호를 사용하고 1년 후인 1018년, 소배압이 도통으로 이끄는 본격적인 요의 3차침공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번 요의 공격은 고려 입장에서도 해볼만한 싸움이었습니다.
이번 침공에서 요가 동원한 군세는 총 10만이었습니다.
고려가 이번 전쟁에 방어군으로 동원한 수는 약 20만, 호왈이 있더라도 요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숫자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전쟁에 있어서 공격측의 군세는 방어측보다 많아야 승기가 높아진다는 점에서 고려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볼만한 전쟁이었죠.
고려는 일단은 사신을 통해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는 동시에, 강감찬을 상원수로 삼아 방어군의 총 지휘를 맡깁니다.
강감찬은 방어군을 주요 요충지 곳곳에 배치, 대요전선을 구축합니다.
요의 이번 전략은 확실한 전진이었습니다.
이전 전쟁에서 속전속결을 시도한 결과, 흥화진에 뒤통수를 쎄게 두들겨맞은 기억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번에도 요의 작전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경로의 요충지를 확실하게 점령하고 지나가려던 요의 전술은 또 한번 흥화진에서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예, 이 두사람이 있었던 그 흥화진이요.
- 흥화진(興化鎭)에 이르러 기병 1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에, 큰 동아줄을 소가죽에 꿰어서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그들을 기다렸다. 적들이 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놓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개경으로 진격하자, 강민첨은 자주(慈州)의 내구산(來口山)까지 쫓아가서 다시 크게 패배시켰다. 시랑(侍郞) 조원(趙元)은 또 마탄(馬灘)에서 공격하여 목 벤 것이 10,000여 급(級)이었다.
그리고 흥화진이 이렇게 시간을 끌어내는 동안 강감찬이 이끄는 본군이 도착, 흥화진을 공격하던 거란군을 한번 패퇴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우리가 귀주대첩을 수공으로 이겼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이번 전투가 실제로 수공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강한 것도 있을겁니다.
이렇게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요는 전술을 바꾸기로 합니다. 요는 흥화진을 우회, 다시 한 번 개경을 직접공격하기로 합니다.
요는 고려의 군사적 요충지를 피해를 감수하고 우회, 개경을 직접 공격합니다.
그러나 개경은 고려가 미리 배치해둔 방어군으로 가득했고, 소배압의 개경 직접공격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갑니다.
더군다나 강감찬의 지휘 하에 고려군의 반복된 유격전에 요의 피해는 계속 누적되고 있었습니다.
소배압에게 이 이상의 무리한 공격은 부담이 너무나도 컸죠. 결국 소배압은 일시적 후퇴를 감행합니다.
그리고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반복적인 유격전과 기습으로 인한 패전으로 인한 피로가 쌓인 요의 군대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귀주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다리던 것은
-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맞아 싸우니, 양쪽 군사들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김종현이 군사를 인솔해 그곳에 이르니,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서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결국 요는 고려에게 조공책봉관계만 맺어준다면 강동6주나 현종의 친조 등의 조건을 모두 없던 일로 하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이 조건을 수락, 고려와 요 간의 전쟁은 이렇게 끝납니다.
이겼는데 왜 굳이 책봉국이 되냐고요?
여기서 전쟁이 더 지속되는 것은 양국 모두에게 부담이었으니까요.
고려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전쟁은 국비에 상당한 부담이었고
요 입장에서도 대패로 인한 손실과,
아직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송이 언제 고려와 함께 뒤통수를 후릴지 모를 일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양국은 서로 화해하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는 무슨. 이후로도 둘은 서로 눈치싸움을 계속합니다.
요는 은근슬쩍 고려에 더 많은 조공을 요구했고
고려는 계속 국경지역에 축성, 방어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현종 이후 덕종대에는 천리장성을 축성하기도 했죠.
이건 단순히 방어체계 구축만이 아니라 요와의 더 이상 충돌을 원치 않는다, 고려는 이 이상 안나가겠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대신 이 선을 넘어오면 가만있지 않겠다, 끝장을 보겠다는 의미도 함께하고 있지만요.
아무튼 이렇게 고려와 요, 거란의 우당탕탕 관계는 정리됩니다.
얼마 안있어서 요가 쇠퇴하고 금이 성장할 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