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도 깰 겸 또 써보는 유게 고려사 시간
어제 태조랑 고려 초기 국가의 성격에 대해서 써봤으니 이번엔 그 다음인 혜종부터 시작해보죠
근데 이 혜종 출생부터 얘기하자면...이것도 나름대로 설화가 있워요. 이건 일단 「고려사」열전 후비편에 실린 혜종이 어머니이자 태조의 2비, 장화왕후 오씨 편을 한번 봅시다.
「태조(太祖)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출진(出鎭)하여 목포에 정박하였다. 〈태조가〉 강가를 바라보았더니 오색(五色)의 구름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 곳에〉 이르니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불러 사랑하였다. 〈왕후의 집안이〉 측미(側微)하므로 임신시키지 않고자 하여 잠자리에 깐 돗자리에 〈정액(精液)을〉 뿌렸으나, 왕후가 바로 이를 〈자신의 질 안에〉 넣어 결국 임신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혜종(惠宗)이다.」
여기서 우린 질외사정도 피임 100퍼가 아니니까 착한 유게이들은 밖에 싸면 돼, 오늘은 안전한 날이니까 같은 말은 믿지 맙시다.
농담이고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왕후의 집안이> 측미하므로' 여깁니다. 이 당시 나주 오씨, 최소 장화왕후의 집안은 그리 강한 세력의 호족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화왕후의 첫째 아들이 태조의 장자로 태어난거죠,
지난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고려 건국 극초기에 왕권은 미약, 호족 세력은 여전히 강성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자의 외가는 좀 급이 딸리고
왕요, 왕소 등 다른 왕자들의 외가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거나, 왕규처럼 사성을 받은 왕실 외척 세력 등...라이벌이 워낙에 많았죠.
태조는 나름대로 혜종에게 장자계승하기 위해서 여러 안배를 해두긴 했습니다. 먼저 측근이자 공신인
박술희를 혜종의 후견인으로 지정하고, 혜종을 기존에 쓰던 태자 대신 '정윤'이라는 특수한 칭호를 가져서 그 상징성을 더해주려고 했죠.
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상황은 좋아지질 않았습니다.
여전히 왕요, 왕소 등 이복형제들은 왕위를 노리고 있고, 특히 왕규는 직접적으로 혜종의 목숨을 노리기도 했으니까요. 이번엔 고려사 혜종편을 봅시다.
「왕규(王規)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옹립하려고 도모하여, 일찍이 밤에 왕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당여(黨與)로 하여금 침실에 잠입하게 하여 장차 대역죄를 범하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깨닫고 한 주먹에 그들을 때려죽인 후 주위에 명하여 끌어내게 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한주먹...한주먹...
대충 혜종한테 죽은 자객의 상상도입니다.
여기서도 주목할 점은 '다시 묻지 않았다.' 여깁니다. 혜종은 왕규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점이 거의 명백함에도 왕규를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왕권이 약했다는 반증이 되겠네요. 특히 왕규는 두 번이나 혜종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고, 둘 다 실패합니다.
유게이들이 혜종이면 어떨까요?
이런 스트레스 때문일까요? 혜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술과 여자, 간신배에 빠져 즉위 2후인 945년에 죽어버리고 맙니다.
거기가 덤으로 혜종의 후견인인 박술의 역시 혜종 사망 직전에 제거당하고 마는데, 「고려사」기록을 따르면 박술희는 왕규에게 제거당했다고 적혀있지만...음...다른 추측도 있습니다.
혜종의 이복형제, 고려 3대 왕이 되는 정종 왕요가 그 배후라는 거죠...
왕요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덤으로 왕요에게도 든든한 지원 세력이 있었습니다.
왕식렴입니다. 왕요는 왕식렴과 손을 잡고 왕위를 노리고 있었는데, 왕규가 박술희를 제거하게 손을 썼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혜종이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왕요는 빠르게 움직입니다.
일단 조정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다음 왕위를 확정지은 다음, 이에 반발한 왕규의 반란시도를 왕식렴의 군사를 이용해서 빠르게 제압, 왕규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이렇게 고려 극초기 왕실상태는 혼돈과 카오스다 그지 깽깽이들아! 상태였습니다...만
아직 한 명 더 남았습니다.
광종 얘기는 담에 이어서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