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6년 음력 1월, 누르하치는 자신의 속하 암반이자 후르하 출신의 암반 보.지리에게 동해 여진 세거 지역으로 복귀하여 그 곳의 동해 여진 세거 세력들을 회유, 후금에 복종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동시에 그들이 후금에 복종치 않으려 한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복종케 하라는 지시 역시도 첨부했다. 보.지리는 처음에는 그 지시를 받들어 주변의 세력들을 복속시켜 나가는 동시에 항복한 암반들을 선행 복귀부대와 함께 허투 알라로 보내어 누르하치를 알현케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지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주변의 후르하 및 사할리얀계 세력들이 보.지리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도록 종용하는 동시에 그를 후금에 저항하는 동해 여진계 반란 연합의 맹주로 추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보.지리와 함께 파견된 후금의 상인 30여명과 후금에 항복한 뒤 보.지리를 돕기 위해 재차 파견된 후르하계 암반 및 구추 40여명중 대부분에 해당하는 61명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참변으로부터 가까스로 도주한 생존자들에 의해 보.지리의 반란 소식이 알려지자 누르하치는 격분하여 안피양구 숑코로 바투루와 후르한 다르한 히야를 주장으로 하여 2천여명의 진압군을 파병,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두 사람은 1616년 하반기에 걸쳐 반란을 진압한 뒤 11월에 허투 알라로 귀환했다. 이것으로 사실상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여기서 보.지리는 잡히지 않았다.이후 1617년에도 군대를 투입하긴 했으나 역시 보.지리는 잡지 못했다. 보.지리는 1618년서야 자발적으로 항복해 왔고, 누르하치는 스스로 항복해 온 이상 보.지리를 용서하여 그를 재기용하기로 했다. 보.지리는 이후 다시 후굼의 관료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상의 기록은 구만주당과 만문노당의 병진년(1616년)~무오년(1618년)에 걸친 2년간의 기록에 그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록에서는 이러한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기 힘들다. 이는 누르하치가 보.지리를 상기의 목적으로 동해 여진 지역에 파견하고 주변에 대한 복속 작업을 진행한 것, 항복한 후르하계 암반들이 누르하치에게 자신들의 가족들을 설득하겠다고 말하여 재차 보.지리에게 보내진 것, 보.지리가 주변의 이반 세력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과 함께하던 후금 상인 및 친후금 동해 여진 암반들을 살해한 것이 모두 실록상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안피양구와 후르한의 동해 여진 원정 역시도 '반란 진압'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정으로 묘사되고1, 이후 1618년에 동해 여진 암반들이 허투 알라로 소집될 때에 보지리가 그들을 따라왔다는 이야기 역시도 삭제되는 등2, 보.지리의 반란에 얽힌 이야기들은 실록상에서 모두 삭제되거나 개변되었다. 그리하여 실록만으로 이 당시 이루어졌던 안피양구, 후르한의 동해 여진 원정을 살핀다면 당시의 후금의 동해 여진 원정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실록에서는 보지리가 일으켰던 반란에 관한 흔적 자체를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실록에서 보.지리가 일으켰던 반란에 관한 이야기가 대거 삭제, 개변되어 보.지리가 반란을 일으킨 사실 자체가 실록상에서 드러나지 않게 되었을까. 후금의 관료로 복귀한 보.지리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배려 차원의 조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이 사태가 누르하치에 대한 여진 세력의 이반이었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무황제실록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태조 누르하치에 대한 실록 중에서는, 고황제실록의 누르하치에 대한 미화성이 가장 강하다. 고황제실록은 화려한 서술구조를 바탕으로 실록의 주인공인 누르하치를 칭송하고 있으며, 여러 기록들 역시 누르하치에게 유리하게 개변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고황제실록보다는 기록의 미화가 적은 무황제실록과 만주실록 역시도 서술하기에 꺼림직한 기록이 일정부분 삭제된 바가 존재한다. 예컨대 누르하치가 동생 슈르가치를 숙청한 사실은 모든 실록상에서 삭제되었다. 슈르가치는 오갈암 전투 이후 실록상에서 아무 일도 겪지 않고 그저 1613년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누르하치의 장남 추영의 저주옥사와 그로 말미암은 위리안치, 처형 역시도 실록상에서 삭제되었다.
위와 같은 식으로 후금/청의 실록에서는 실록에 서술하기 꺼림직한 기록들을 다소 삭제하였다. 이렇게 보자면 실록에 기록 되지 않은 보.지리가 반란을 일으킨 사실 역시도 후금/청의 입장에서 '기록하기 꺼림직한 일'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누르하치가 투항한 보.지리를 용서하고 다시 등용한 것이야 미담으로 볼 수 있으나, 문제는 그 이전에 후르하, 사할리얀계 동해 여진 세력들이 '감히' 너그럽고 공명정대한 군주 누르하치에게 반항심과 대적할 마음을 품고 누르하치가 보낸 보.지리를 회유, 보지리가 그에 따라 누르하치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은 남기기에 그리 좋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는 자칫 누르하치가 부덕하여 동해 여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거나, 혹은 누르하치가 가혹하여 동해 여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석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실록상에서 반란에 관한 기록을 아예 지워버리고, 안피양구와 후르한의 동해 여진 원정 역시 '반란 진압'목적의 출병이 아니라 보통의 동해 여진 원정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필자 개인의 추정이며, 다른 부수적인 이유가 존재할 수도 있다.
실록에서는 반란에 관한 기록이 삭제되었으나, 노당과 원당에는 보.지리의 반란에 관한 기록이 명백히 남아있으므로 현대에서는 1616년 당시 보.지리가 누르하치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었고 후금이 그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
1.만주실록 병진년 음력 7월 19일
2.만주실록 무오년 음력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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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달님께서 보.지를 필터링 해 주신 덕분에 저는 역사글을 이렇게 쓰게 되었읍니다. 감사합니다.
불쌍하면 추천이나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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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허접보.지는 왜 저런 사탕발림에 넘어간거임? | 23.11.01 00:1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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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년여간 건주/후금과 누르하치에게 충성을 바쳐왔고, 누르하치로부터 섭섭치 않게 대우를 받아온 ㅂㅈ리가 동해 여진 세력의 후금에 대한 반란에 동참한 이유는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치 않다. 다만 그의 반란 이유에 관하여서는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하나는 위협이었다. ㅂㅈ리는 동해 여진에 대한 회유와 복속을 병행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에 걸맞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주변의 모든 동해 여진계 세력을 한꺼번에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연합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거의 곧장 그들이 자신에게 반란을 종용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후금에 지원 요청을 보내도 과연 후금군이 지원을 오기까지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ㅂㅈ리의 운신의 폭은 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후르하계 암반들과 사할리얀 세력의 '반란 종용'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는 후금 수뇌부의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조치에 내심의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이다. ㅂㅈ리는 혼자서 파견된 것이 아니라 30명의 상인과 함께 파견되었다.2 해당 상인들은 동해 여진에서 가죽을 거래하기 위해 파견된 이들이었는데, 사실 말이 상인이라곤 하지만 후금의 수뇌부, 누르하치의 지시와 결부되어서 ㅂㅈ리와 함께 움직인 이들이었다. 요컨대 상인파견의 목적에는 분명 가죽거래도 있었겠으나 ㅂㅈ리에 대한 감시 역시 포함되어 '있을 수' 있었다. 그들의 파견의 실제 목적이 어떠했건간에, 그들은 ㅂㅈ리에게 있어 감시자로 보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얼마 지나지 않아 ㅂㅈ리는 후금에 항복한 후르하계 암반들과 그 시졸 40여명까지 떠안게 되었다.3 그들은 본래 ㅂㅈ리가 허투 알라로 보낸 항복자들이었는데, 누르하치는 이들이 본인들의 가족들을 설득하여 후금에 귀부시키겠다고 건의하자 그들을 다시 ㅂㅈ리에게로 돌려보낸 것이었다. 그 중에는 회유를 통해 ㅂㅈ리에게 항복한 인물도 있었겠지만 무력을 통해 복속된 이도 분명 존재했다.4 그런 이들이 ㅂㅈ리와 사이가 좋을 리는 만무했다. 게다가 항복한 인물들이라고 해도 그 항복이 '강압적인 압박'에 의한 항복이었다면 그들 역시도 ㅂㅈ리에게 탐탁찮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들이 자신과 함께 움직이게 된 상황은 ㅂㅈ리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상황이 ㅂㅈ리의 후금 수뇌부 나아가 누르하치에 대한 불만으로 비화되었으며, 결국 ㅂㅈ리가 반란에 참여하게끔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외의 이유가 ㅂㅈ리에게 영향을 끼쳤을 수 있으나, 필자는 위와 같은 가능성이 ㅂㅈ리가 급작스럽게 후금에 반기를 든 이유에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건, 그렇게 ㅂㅈ리는 결국 누르하치와 후금에 대한 반란을 결심했다. 1616년 음력 5월의 일이었다. 예전에 썼던 보.지리의 난 관련글에 써둠 | 23.11.01 00:18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