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 中, 탘시와 기오창가를 언급하는 이성량과 그 말을 듣고 있는 누르하치. 고일권 작품)
누르하치는 닝구타 연맹에 소속된 기오창가의 아들 탘시와 히타라 씨족의 어머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중에서 어머치의 경우 건주여진에서 상당히 이름이 높았으면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었던 아구(왕고)의 딸이자 후일 아구의 뒤를 이어 명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한 아타이의 동생이었다. 둘 사이에서는 누르하치를 비롯하여 세 명의 자식이 더 태어났는데 슈르가치, 야르가치, 아지가 푸진의 세 명이었다.1
어머치는 누르하치가 10세 였던 때에 사망했다. 1568년의 일이었다. 이 이후 탘시의 정처가 된 것은 하다나라 씨족의 컨저였다. 그녀는 하다의 군주였던 완 한의 친족 여식인 동시에 양녀였다. 완 한이 탘시에게 그녀를 시집보낸 까닭은 닝구타 버일러 연맹 세력에 대한 하다의 영향력을 강화하여 그들을 통제하고 나아가 그들을 기반으로 건주에 대한 하다의 영향력을 확대, 세력역량과 입지를 신장시키기 위함이었다.
기술에 의하면 컨저가 탘시에게 시집을 온 이후부터 그녀는 탘시의 장남인 누르하치를 노골적으로 견제하며 학대했다고 한다. 컨저가 누르하치를 학대한 이유에 대하여 이전에 필자는 그녀가 탘시의 유력 계승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누르하치를 견제함으로서 자신과 탘시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했으리라 추정했다.2그리고 탘시가 그러한 컨저의 누르하치 견제를 묵인하고 본인 역시도 누르하치에 대해 쌀쌀맞은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 하다 왕가와 결부된 그녀의 영향력을 신경썼기 때문으로 판단했다.
후처로 들어온 컨저의, 자신의 남편의 세력에 대한 계승 가능성이 높은, 피가 이어지지 않은 의붓아들(누르하치)에 대한 이러한 행동은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컨저가 누르하치에 대해 노골적으로 학대하고 견제한 것에 대하여서, 과연 그녀의 학대 이유가 본인과 향후 본인에게서 태어날 아들(바야라)의 친정 및 닝구타 버일러 연맹 세력내에서의 입지만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그녀의 매몰찬 대우에 또 다른 이유가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요컨대 컨저의 누르하치에 대한 압박은 이상에서 추론된 이유와 더불어 또 다른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하여 누르하치의 소년/청소년 시기와 그 시기가 일부 겹치는 아구(왕고)의 반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구의 반란은 어머치의 부친인 아구가 명나라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1574년 1차적으로 토벌되고 1575년에 재차 명에 대해 도전했으나 실패, 이후 컨저의 양부인 완 한에 의해 명나라에 의해 넘겨져 처형됨으로서 종식된 사건을 지칭한다.3
아구가 1574년 명나라의 수비 배승조의 자신과 자신의 세력에 대한 폭거 및 협정위반으로 말미암아 반란을 일으킨 뒤 명나라에서는 하다와 아구 세력간의 연계를 의심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심은 명확한 실증적 근거는 존재치 않았다. 실제로 아구와 하다간에는 긴밀한 연결관계가 존재하긴 했으나, 배승조의 살해 문제는 완 한의 음모같은 것이 아니라 아구의 독자적 행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당시 하다의 영향력이 급격히 늘어난 것에 주목하고 있었고 자칫 이 문제로 인해 하다가 아구와 연계, 명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 것을 의심하여 하다 세력에게 반(反) 아구 행동을 압박했다.
대표적인 친명세력 여진군주였던 완 한이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아구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그였다. 대명관계와 아구와의 관계중 완 한이 택한 것은 대명관계였다. 완 한은 아구의 반란 당시 아구에게 표면적으로 협조하거나 지원치 않았고 오히려 배승조 피살 사건의 일부 책임자들을 잡아 명측에 넘기거나 1575년에는 자신에게 몸을 의탁코자 한 아구를 포박하여 명나라에 넘기기까지 했다.4
이러한 태도를 보이던 완 한의 의지에 컨저 역시도 영향을 받아, 그로 말미암아 탘시의 곁에서 누르하치를 떼어내기 위해 힘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은 완전히 가능성 없는 추론은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누르하치의 모친이 바로 아구의 소생이었으니만큼 누르하치는 혈연적으로 아구의 외손자였다. 그러한 누르하치의 존재는 당시의 아구의 반란과 관련한 갈등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완 한으로서는 그런 아구의 피가 섞인 누르하치를 닝구타 버일러 연맹, 그리고 자신의 양녀가 혼인을 한 인물인 탘시로부터 배제하여 명의 이목을 닝구타 버일러 연맹쪽으로 향하지 않게 함으로서 딸의 안전과 자신의 산하영향 세력인 닝구타 버일러 동맹의 안전을 도모하는 한편 명나라에 반기를 든 아구가 닝구타 버일러 연맹에 뿌려놓은 혈족 영향력을 걷어내고 그 빈자리를 자신의 핏줄로 채우려 했을 공산이 있다.
완 한은 그러한 뜻을 시집을 간 컨저에게 전하거나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컨저로 하여금 누르하치를 견제, 배제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친명세력인 하다와 혼인관계로 이어져 있던 누르하치의 부친 탘시, 탘시의 부친(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가로서는 이러한 컨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다와 완 한의 의지에 의한 아구 혈족 배제 의견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시기상 컨저의 누르하치에 대한 견제 및 학대는 이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기에, 컨저의 누르하치에 대한 학대가 단순히 아구의 반란으로 인한 것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필자가 상기에서 언급했듯이 만약 아구의 반란이 컨저의 누르하치에 대한 학대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도 컨저의 누르하치에 대한 학대는 복합적인 요소로 작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요소중 보다 근본적인 요소는 컨저 본인의 자신의 소생 입지 확보였고, 학대의 조력적 요소-즉슨 컨저의 누르하치 학대가 보다 노골적으로 변하게 된 계기는 아구(왕고)의 명나라에 대한 반란과 그 아구와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던 누르하치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한다. 요컨대 컨저는 본래부터 누르하치를 배제하려 했으나, 아구의 반란 이후 그러한 기조가 더욱 강화된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물론 컨저에게 완 한의 의지나 뜻이 전해졌고 컨저가 그것을 따랐다는 추정 자체가 지나친 추론일 수도 있다. 컨저의 누르하치 학대는 단순히 본인과 본인 소생의 아들을 위했을 뿐이거나 혹은 정말 단순한 개인적 이유였을 수도 있다. 다만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가정이라는 것이다.
한편 '아구의 반란'이라는 사건이 소년 누르하치의 배제와 관계되었다고 고려해 본다면 탘시가 누르하치를 배제하는 컨저의 의견에 동의한 이유 역시 강력한 씨족 친정을 등에 업은 컨저의 간언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음만을 고려하기보다는, 실제로 누르하치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이익적으로 작용하여 그를 배제하려 했을 가능성 역시 더불어 고려해 볼 만 하다. 이 경우 누르하치에 대한 차별에 지속적으로 누르하치를 학대해오고 그를 배제코자 한 컨저의 영향이 크긴 했으나 탘시 역시도 누르하치의 배제에 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구의 반란은 건주 전체는 물론 요동 변경의 큰 축을 진동시킬 만한 거대한 사변이었고, 그렇기에 탘시와 그 부친인 기오창가로서도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아구에 협조하는 스탠스를 취하거나 혹은 명에 협조 혹은 최소한 중립을 지키는 스탠스 두 가지를 고려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사료되는데, 이미 고인(故人)이 된 자신의 첫 번째 부인(그리고 며느리)과의 인연을 놓지 않고서 아구에게 협조하는 것은 명과 하다 모두를 적으로 돌릴만한 행동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구의 피를 이은 자식/손주인 누르하치는 탘시와 기오창가로서는 본인들이 친(親)아구파로 보일 만한 위협요소로서 작용하는, 일종의 모난 돌과도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하기에, 컨저의 누르하치 배제에 관한 간언을 아구가 반란을 일으킨 1574년서부터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에 불과한 영역이지만 누르하치에 대한 부친의 차별이 단순히 컨저의 간언때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여진 판세와 관련하여 탘시 스스로도 누르하치를 차별하고자 했다는 견해는 확실히 조금은 일리가 있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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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주실록 제1장 기미년 이전 행록, 선행전례 인적구성 참조
2.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780/read/52234185?search_type=subject_content&search_key=%EC%96%B4%EB%A8%B8%EC%B9%98 참조
3.아구의 반란에 대해서는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2144203 와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2145083 참조
4.청사고 권 222 왕고 열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