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여진계 세력인 호이파의 군주 바인다리는 대략 1607년 혹은 그에 근접한 시기 무렵 자신을 배신하고 반기를 들려 한 호이파 내부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건주의 누르하치에게 호이파 내부의 자신의 친위 세력 암반(대신)들의 자식을 누르하치에게 볼모로 맡기는 대신 원군을 요청하여 그들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이파와 건주간의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러한 상황을 본 또 다른 해서여진 세력인 여허는 호이파가 건주와 연대하여 울라, 그리고 자신들에 적대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외교적 이간책을 써서 바인다리가 건주로부터 그가 맡긴 볼모들을 돌려받고 건주로부터 떨어지게끔 했다. 그 매개체로 쓰인 것은 당시 여허가 망명자로 받아들이고 있던 반 바인다리파 호이파 왕족들이었다.
바인다리는 여허의 의도대로 움직였으나 여허는 오히려 외교적 계책을 잘 활용하여 바인다리에게 망명자를 넘기긴 커녕 오히려 바인다리로부터 그의 자식을 인질로 받았다. 본인들이 기존부터 데리고 있던 호이파의 망명자들을 바인다리에게 양도치 않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러한 상황에 바인다리는 여허에게 자신이 속아넘었음을 파악하고 다시 '표면적으로' 친건주 행보를 보여 건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여허로부터 자신이 인질로 넘긴 자식을 돌려받고자 했다.
이 때 바인다리는 누르하치에게 의지하겠다면서 누르하치의 우위를 인정하고 그의 사위가 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는 당시 누르하치가 자신의 거병동지인 창슈의 집안과 체결코자 했던 혼인을 뒤로 물리고 누르하치가 창슈의 집안에 보내고자 했던 딸을 자신과 약혼시킴으로서 정략혼 관계를 맺자고 제안했다. 누르하치는 이를 받아들였고 결국 누르하치의 가문과 창슈의 가문간 정략혼은 철회되었다.
이 때 만문노당과 구만주당상에 누르하치가 자신의 자식/딸을 창슈에게 주려고 했다는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해당 기술 부분을 기반으로 하여 누르하치가 창슈에게 자신의 딸을 후처로 시집보내어 창슈를 자신의 사위로 맞이하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후처로 어린 딸아이를 시집보내어 정략혼을 맺는 것은 당시로서 꽤 흔한 일이었다. 당장 누르하치 본인부터가 그러한 정략혼을 통해 만타이의 딸이자 부잔타이의 조카딸인 아바하이를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부인으로 맞이했었으며, 홍타이지의 모친인 몽고저저 역시도 비슷하게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기술에만 집중치 않고 좀 더 확장하여 생각해 보자면 누르하치가 창슈에게 딸을 주었다는 것은 창슈에게 (아내로) 준 것이 아니라 창슈에게 (며느리로) 주고 그와의 인척관계를 구축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위의 기술 이후 누르하치가 '사돈연을 맺은 자식(sadulaha jui)'1을 호이파의 바인다리에게 주겠다 하여 (창슈와의) 사돈 관계를 파기했다는 기술이 사료상에 존재한다.2
여기서 사돈 관계가 언급됨으로서 누르하치가 창슈에게 딸을 주려했다는 것이 곧 창슈에게 시집을 보내려 한 것이 아니라 창슈와는 사돈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며 실제로는 그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려 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실록을 보면 더욱 자세한 기술이 살펴져서, 만문노당을 통해서 예상된 누르하치의 딸의 혼인대상자가 명확해진다. 고황제실록에서는 창슈의 언급이 생략되지만 한문본 무황제실록이나 만문본 만주실록등을 살펴보자면 창슈의 '아들'이 언급되며 누르하치가 그 창슈의 아들에게 본디 딸을 시집보내고자 했다는 것이 언급된다.3이러한 검증을 통해 누르하치가 창슈에게 주려한 딸은 창슈에게 처로 주려 한 것이 아니라 며느리로 주려 했으며 실제적으로는 장인-사위 관계가 아닌 사돈관계를 맺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누르하치가 창슈와의 사돈관계를 도모한 까닭은, 거병동지이나 자신보다는 자신의 동생인 슈르가치와의 관계가 더 깊던 창슈를 슈르가치로부터 떼어내고 자신과 연결시켜 자신의 세력은 강화하는 한 편 슈르가치의 세력은 고립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1607년 음력 3월의 오갈암 전투 당시에는 창슈를 슈르가치로부터 떼어내려는 시도가 실패했지만 창슈와의 관계 도모는 여전히 유효한 방안이었고 그렇기에 사돈을 맺어 그와의 관계를 도모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그러나 마침 바인다리가 창슈의 아들과 혼인할 예정이었던 딸을 요청하자 정치/외교적 사세를 고려하여 일단 바인다리의 제안을 받는 것이 좀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누르하치가 해당 약혼을 파기했다고 살펴진다.
그러나 바인다리와 누르하치의 딸이 혼인하는 일은 없었다. 이전에 서술했듯, 바인다리는 누르하치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누르하치의 딸과의 혼인을 미루다가 여허로부터 인질을 돌려받고 자력방위를 위한 충분한 힘이 쌓였다는 판단이 들어섰을 때에 누르하치의 자신의 딸과의 혼인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이는 건주의 호이파에 대한 공격 명분이 되었고 얼마 뒤 호이파는 위의 명분과 대 울라 압박 전략의 완성을 위해 호이파를 병합하거나 영향력 아래 둘 필요로 인해 건주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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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adulaha jui 에 대해서는 직역하여 사돈을 맺은 자식으로 해석하나 의역을 하여 연을 맺은 자식이나 (사돈 집안과) 약혼시킨 자식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만문노당 정미년 음력 9월
3.태조무황제실록 정미년 음력 9월, 乞將汗女先許常書之子者,賜我為婚, 만주실록 동년 동월 sini cangšui jui de bumbi sehe sargan jui be minde ga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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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리도 한 부락의 암반급의 아들이긴 했음. 누르하치의 친구인 랑주의 아들이었는데 자세한 거는 이거 참조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2550480 | 23.07.23 21:2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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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07.23 21:26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