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08년 음력 3월, 누르하치는 자신의 장남 추영과 조카 아민에게 지시하여 5천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울라의 이한산성을 공략하게끔 하였다. 이들은 그 지시를 받들어 이한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하였고, 그 결과 최소 1천여명 이상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이한산성을 함락한 뒤 갑옷 3백여벌과 숫자 미상의 노획물, 포로를 획득하였다.
이 이후 추영과 아민은 얼마간 이한산성에 주둔하면서 울라성에서 출격한 울라의 군주 부잔타이와 그의 동맹자인 코르친 우익 수장 웅가다이의 군대와 대치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다가 부잔타이, 웅가다이가 회군한 뒤 상황을 살피다가 안전함이 확인되자 노획물과 포로를 보호하며 건주 주도 허투 알라로 귀환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 때 부잔타이가 이한산성을 구원하러 출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주군과 교전치 않고 그대로 물러난 것은 이미 이한산성이 함락된 마당에 적지 않은 숫자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이한산성을 점거하고 있던 건주군과 싸워보아야 득을 볼 것이 없으며, 더불어 외부에서 누르하치나 슈르가치가 이끄는 건주측의 지원군이 올 것을 경계한 결과로 판단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어째서 부잔타이는 이한산성이 함락된 뒤라서야 출병한 것일까. 이한산성이 함락 되기 전에 부잔타이가 이한산성에 대한 지원을 행했다면, 이한산성을 포위공격하던 추영과 아민은 양측으로부터 포위될 것을 경계하여 물러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한산성이 비교적 빠르게 함락된 것으로 생각된다지만, 이한산성의 위치는 울라의 본토 내에 위치했으며 울라의 도성과 가깝기도 했다.1 고작 도성에서 20여리를 나온 것 만으로도 부잔타이가 추영, 아민과 대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이 점이 증명된다.2
그렇다면 부잔타이는 어째서 도성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한산성을 빠르게 구원치 못한 걸까. 여러 요인을 추정해 볼 수 있겠지만, 필자로서는 당시 부잔타이가 건주군의 공격의도와 출정 규모를 오판하고, 충분한 준비를 갖추기 전까지 출정을 지연하다가 완전한 준비가 갖추어진 뒤라서야 출정한 탓에 이한산성에 대한 구원이 늦어진 것이라는 추정을 고려해본다.
울라는 이미 1년여전에 있었던 오갈암 전투에서 건주군과 교전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못해도 최저 3쳔여명의 병사가 현장에서 전사했으며 후퇴과정에서 더 많은 병사가 손실되었다. 지휘관들 역시도 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 전투 이후 반년여만인 1607년 음력 8~9월에 건주는 해서 여진 세력인 호이파를 병합하였다. 그것은 울라로서는 전에 없던 위협적인 상황이 초래된 것이었다. 건주로부터 대패를 당한 뒤 그 피해를 회복하기도 전에 건주가 호이파를 병합함으로서 건주가 울라 본토에 대해 직접 침공을 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1607년 호이파가 건주에게 병합당할 때부터, 울라는 누르하치에게 항복 요구를 받고 있었다.3 그러한 상황에서 부잔타이는 건주의 요구를 거부한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건주가 호이파를 점령, 흡수하는 동안 울라 역시도 재정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며, 동맹인 코르친 우익 세력까지 있으니만큼 건주가 즉각적인 공격을 가하진 못할 것이라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건주는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인 1608년 음력 3월, 즉슨 호이파 병합으로부터 고작해야 반년 뒤에 울라 본토에 대한 공격을 진행했는데, 그것은 안그래도 궁지에 몰린 부잔타이를 크게 긴장시켰을 것으로 사료된다.
울라에 대한 추영과 아민의 침공은 울라에 대한 항복 요구 이후 이루어진 건주의 대규모 공격이었다. 부잔타이로서는 해당 공격을 울라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장 얼마 전에 건주가 호이파를 병합한 것을 목도했었고, 오갈암 전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던 부잔타이로서는 건주가 호이파를 병합한 뒤 이전에 입은 피해를 아직까지 회복치 못한 자신까지도 병합하려 한다고 여겼을 공산이 있다. 그렇기에 추영과 아민이 데리고 온 공격부대를 전체 원정군이 아닌 선봉군으로 파악하고, 그들이 울라 도성 인근의 이한산성을 공격함에도 후속부대를 경계하여 당장 원호를 나가지 않고 충분한 수의 군대가 모이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잔타이가 동맹 세력인 코르친 우익의 웅가다이와 함께 출전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4 웅가다이가 군대를 이끌고 울라까지 오는데에는 틀림없이 꽤 긴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부잔타이는 그렇게 웅가다이가 자신과 합류하기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합류하자 그때서야 겨우 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이한산성이 함락된 시점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전력을 완비하는 것은 좋았으나 동맹군까지 합류하는 것을 기다리다가 이한산성을 제 때 구원치 못했다는 것이다.
출전할 당시의 부잔타이는 건주의 후속 부대가 도착치 않을 것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한산성이 추영의 공격 얼마 뒤 함락당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며칠 이상은 버틴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볼 때5 그 시간 동안 건주의 후속부대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이번의 공격이 호이파에 대한 병합시도마냥 완전한 공략전은 아닐 것으로 생각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이한산성이 함락되고 건주군이 이한산성을 점거한 이상 추영과 아민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부잔타이에게 있어 득될 것이 없었다. 이한산성에 주둔한 5천의 건주군을 상대하는 것은 동맹을 끌어들였다 하더라도 오갈암 전투의 피해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울라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야전이라면 몰라도 공성전, 특히 산성에 대한 공성전은 대단히 힘든 측면이 존재했다. 더불어서, 비록 아직 직접적으로 나서진 않았다지만 울라에서의 전역 상황의 변화를 감지하고 추영과 아민을 지원하러 올 지도 모를 누르하치의 군대도 경계해야 했다. 그렇기에 부잔타이는 점거당한 이한산성을 공격치 않고 그대로 물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이한산성은 추영과 아민에 의해 함락당했고, 그것은 1년전 오갈암 전투로부터 큰 손실을 입은 울라에게 또 다시 큰 타격이 되었다. 그것은 울라에게 있어서 충분한 압박이 되었고, 결국 부잔타이가 누르하치에게 화의를 청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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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p.82.
2.만주실록 무신년 음력 3월
3.조선왕조실록 선조 40년 음력 9월 19일, 음력 10월 21일
4.만문노당 무신년 음력 3월
5.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년 음력 4월 21일의 비변사의 별단을 보면 이한산성의 공략이 4월까지도 이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맥락의 기술이 보인다. 이를 보건대 이한산성에 대한 공략은 4월까지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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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산성을 포위하는 도중에 전역(戰役)의 상황 변화를 감지한 누르하치가 추영과 아민의 포위를 해제하기 위해 출병한다면 부잔타이는 카이사르의 알레시아 이중 포위전 당시 상황 마냥 이 중으로 포위될 염려가 있음. 전방에는 추영과 아민의 5천 군대, 후방에는 누르하치가 이끌고 온 지원군을 상대해야 될 수 있게 된단 말. 카이사르는 그 상황을 타파하는데에 성공했지만, 문제는 부잔타이는 이한산성 전투로부터 얼마 전에 벌어진 오갈암 전투에서 건주에게 대패를 당한 탓에 만약 누르하치가 진짜로 구원을 위해 나선다면 부잔타이로서는 그대로 망할 수도 있는 상황. 그렇기에 이미 이한산성이 함락된 만큼 더 이상의 싸움을 회피하고 철군한 것으로 보임. 이한산성이 버텨주었다면 빠르게 추영과 아민을 공격해 보는 것을 시도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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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 추영과 아민은 얼마간 이한산성에 주둔하면서 울라성에서 출격한 울라의 군주 부잔타이와 그의 동맹자인 코르친 우익 수장 웅가다이의 군대와 대치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본문중 당시 울라의 버일러(군주, 공) 또는 한(임금)이 부잔타이 | 23.07.21 00:4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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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산성을 포위하는 도중에 전역(戰役)의 상황 변화를 감지한 누르하치가 추영과 아민의 포위를 해제하기 위해 출병한다면 부잔타이는 카이사르의 알레시아 이중 포위전 당시 상황 마냥 이 중으로 포위될 염려가 있음. 전방에는 추영과 아민의 5천 군대, 후방에는 누르하치가 이끌고 온 지원군을 상대해야 될 수 있게 된단 말. 카이사르는 그 상황을 타파하는데에 성공했지만, 문제는 부잔타이는 이한산성 전투로부터 얼마 전에 벌어진 오갈암 전투에서 건주에게 대패를 당한 탓에 만약 누르하치가 진짜로 구원을 위해 나선다면 부잔타이로서는 그대로 망할 수도 있는 상황. 그렇기에 이미 이한산성이 함락된 만큼 더 이상의 싸움을 회피하고 철군한 것으로 보임. 이한산성이 버텨주었다면 빠르게 추영과 아민을 공격해 보는 것을 시도했겠지만 | 23.07.21 00:5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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