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다이샨은 오갈암 전투의 승전과 봌도의 참살로 구영 바투르 칭호를 얻었다.
봌도는 울라의 군주 부잔타이의 숙부였던 인물이다. 그는 1607년 건주의 슈르가치, 추영, 다이샨이 누르하치의 지시를 받고 3천여명의 군병을 이끌고 피오 호톤을 비롯하여 울라에게 압박을 받고 있던 조선 변경의 번호들을 허투 알라로 호송하기 위해 움직이자 이들을 막고자 한 부잔타이의 지시를 받고 출정했다.
출정한 봌도는 건주군의 복귀로를 막은 뒤 섬멸코자 했다. 당시 봌도가 이끌고 출전한 군병의 수는 기록상에서 약 1만여명으로 서술되는데, 이것이 후금의 기록인 탓에 다소의 과장이 존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곤 하더라도 당시 봌도가 상당한 대군을 이끌고 움직였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계획은 그럴 듯 했지만, 봌도는 1607년 음력 3월 17~18일1, 혹은 음력 3월 19~20일2에 벌어진 오갈암 전투에서 결국 건주군에 의해 처참히 패배했다. 전투 현장에서만 3천여명의 울라군이 전사했으며, 봌도는 해당 전투에서 다이샨에게 직접 참살당하면서 다이샨의 첫 대규모 전투 출전의 제물이 되었다. 이 전투로 인해 울라의 대번호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대조선 영향력 역시도 후퇴했다. 반면에 건주는 이 승리를 통해 번호에 대한 영향력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었으며 대조선 영향력 역시도 신장시켰다.
이 전투에서 봌도가 전사한 당시의 상황과 울라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전에 필자는 건주군과 울라군간의 교전이 아직 완전히 결판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이샨이 울라군을 붕괴시키기 위해 울라군의 최고 지휘관인 봌도를 공격하여 죽였고 그로 인해 울라군의 패색이 짙어졌으며 끝내 붕괴했다는 논지로 서술한 바가 있다. 이는 당시의 전황과 건주군의 투입규모 및 병종을 생각해 보자면 타당성을 지닌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소수의 건주군이 다수의 울라군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결과에 의존하여 사건을 해석했다는 시선을 받을 여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사료상에 존재하는 해당 전투에 대한 기술을 보자면, 봌도는 건주와 울라군간의 혼전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 즉슨 울라군의 진형이 붕괴되지 않고 아직 건주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울라군이 붕괴된 뒤 건주군에 의해 추가적인 피해를 입는 상황에서 다이샨에게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만문노당상에서 봌도가 죽은 상황은 따로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음력 3월 20일에 두 아들(추영, 다이샨)이 1천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울라군을) 공격하여 군대의 수장인 봌도 버일러 부자(父子)를 죽였다는 서술과4 다이샨이 그 봌도 버일러를 말 위에서 잡아서 베어 죽였다는 서술5이 존재하여, 전투 중에 봌도가 다이샨과 맞붙었고 그 결과 잡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실록을 보자면 봌도의 죽음의 시기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서술이 존재한다. 만문본 만주실록을 살펴보자면 봌도는 추영과 다이샨이 각 5백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에 위치한 울라의 군대를 '공격하고' 베고 '처치할 때'에 봌도가 다이샨에 의해 참살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6그런데 여기서 '공격하고(gidafi)'와 '처치할 때(gamara de)'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 '공격'은 '격파'나 '무찌름'으로, '처치'는 '처리', '처분'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해당 기술을 '공격하고 처치할 때'로 보자면 혼전 양상이 벌어지는 시기에 봌도가 죽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지만 '격파하고 처리할 때'로 해석하면 이미 울라군의 진형이 붕괴되어 승세가 기운 와중에 봌도가 다이샨에 의해 죽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봌도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슈르가치의 추격전 참여에 대하여, 만주실록은 슈르가치가 '두 버일러(추영, 다이샨)가 적을 공격하고 베고 처치할 때에('juwe beile bata be gidafi sacime gamara de') 비로소 추격에 나섰다고 기술하고 있다. 해당 기술은 봌도가 다이샨에게 참살당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술과 일치한다. 그런데 한문본 무황제실록과 대조해 살펴보자면 해당 문구는 건주군이 붕괴된 울라군을 추격섬멸하는 상황을 나타낸다.7 즉 '두 버일러가 적을 공격하고 베고 처치할 때'라는 문구에서 '베고 처치할 때'는 추격섬멸 과정에 대한 서술이며, 따라서 해당 기술에 대한 해석은 '두 버일러가 적을 격파하고 베고 처리할 때에'가 보다 매끄러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석을 앞서의 봌도가 죽었을 당시에 대한 서술에 대입해 본다면 봌도가 죽은 것은 추격섬멸이 이루어지던 상황, 즉슨 울라군의 패색이 짙어지고 건주군에게 승세가 기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다이샨이 봌도를 죽임으로서 전황이 기운 것이 아니라 이미 건주군에게 승세가 기운 상황에서 봌도가 다이샨에게 죽었고 그로서 울라군의 역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실록을 기반으로 생각해 보자면 봌도는 이전에 필자가 '후금 건국사'의 오갈암 전투 수정 이전 버젼에서 서술했던 것과는 달리, 이미 울라군의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죽었을 공산이 있다. 이것을 사실로 본다면 건주군과 추영, 다이샨은 봌도를 죽임으로서 승기를 잡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봌도까지 죽이는 결과를 얻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서, 비록 전투가 일어난 오갈암 전투와 근접한 시기에 작성된 사료는 아니나 청사고의 다이샨 열전 역시도 봌도의 죽음의 대해 봌도가 울라군이 패해갈 때 다이샨의 추격을 받아 살해당했다고 기술되어 있다.8이 기술과 실록의 기술이 맞닿아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봌도의 경우 혼전이 진행되던 와중에, 혹은 양측간에 승패가 아직 완벽히 기울지 않은 시점에 다이샨에게 죽었다기 보다는 패색이 짙어진 시기에 전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
1.조선 기록
2.후금 기록
3.만문노당 정미년 음력 3월 20일, juwe juse emu minggan cooha be gaifi gidafi coohai ejen bokdo beilei ama jui be gemu waha
4.만문노당 상동, tere coohai ejen bokdo beile be morin i dele jafafi sacime waha
5.만주실록 정미년, ulai cooha be uthai gidafi sacime gamara de(중략)jafafi sacime waha
6.무황제실록 정미년, 時追殺敗兵之際,黍兒哈奇貝勒原率五百兵落後立於山下,至是方驅兵前進,又被大山所阻,及繞山面來,未得掩殺大敵
7.청사고 권 216, 다이샨 열전. 代善見烏喇兵營山上,分兵緣山奮擊,烏喇兵敗竄,代善馳逐博克多,自馬上左手攫其胄斬之
---
댓글로 의견이나 다른 견해 환영

(IP보기클릭)223.39.***.***
(IP보기클릭)222.237.***.***
(IP보기클릭)11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