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라를 멸망하고 울라성 누각에 올라 선 누르하치. 부잔타이는 그것을 보고 도주하며,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이 그런 그를 추격하고 있다.
삽화 출처 : 만주실록
부잔타이는 여진국가 울라의 군주였던 인물이다. 그는 울라의 마지막 군주로서 울라의 중흥기를 이끌었지만 동시에 누르하치에게 패하여 자신의 나라를 잃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생전에 스스로를 한(han, 임금)으로 칭했다는 사실 자체는 확정적이지만 그가 정확히 언제부터 스스로를 한으로 호칭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이훈 교수1는 부잔타이가 조선을 상대로 한 동관 전투와 건퇴 전투의 승전을 기점으로 한을 자처했다는 견해를 보인 바 있다.2 이와는 다른 견해로, 부잔타이 이전대부터 울라의 군주들이 대대로 한의 칭호를 사용해왔고 부잔타이는 그것을 이어받았을 뿐이라는 추정 역시도 존재한다. 1613년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2차 울라 침공전 당시에 대한 만문노당과 구만주당의 기술을 살펴보자면 부잔타이 이전 대부터 대대로 한의 칭호가 내려왔다는 기술이 보이는데, 이를 근거로 부잔타이 이전부터 울라의 군주들이 '한'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오고 있었다는 추론을 하는 것이다.3
이상의 논지를 통하자면 부잔타이의 한으로서의 즉위에 관하여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살펴진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형 만타이를 계승하여 울라의 군주가 된 뒤 얼마간 버일러로서 스스로를 칭해오다가 일정 시기를 기점으로 한을 자처했을 가능성, 또 하나는 자신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대를 이어서 한으로서의 호칭을 써온 선대 군주들 따라 즉위초 서부터 한을 자처했을 가능성이다.4
그런데 이들과는 다른 새로운 견해를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흔히 외왕내제(外王內帝)라고 칭해질 수 있는 이중 체제 혹은 그 파생형이나 유사형에 해당하는 체제가 동양의 전근대 국가 일부서 엿보이는 가운데, 울라 역시도 이러한 체제를 답습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정이다.
요컨대 울라의 군주들, 그리고 그 마지막 군주에 해당하는 부잔타이가 대외적으로는 본인들의 세력의 역량수준을 생각하여 타 세력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울라의 군주위를 버일러로 호칭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훌룬의 적통 계승자라는 명분을 기반으로 군주위를 한(han)으로서 호칭하되 군주의 의미를 담은 버일러를 일상적으로 혼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부잔타이가 힘과 명분을 기반으로 외부적으로도 한을 자처하며 명칭을 일원화 하였다는 견해이다. 이는 이상에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각각 일부 수용하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부잔타이는 후금, 청의 청태조계실록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버일러라고 칭해진다. 이는 부잔타이의 위상을 깎아내기 위한 후금/청의 기술 기조라고 할 수 있다.5그러나 실제로 부잔타이가 버일러로 단 한 번도 불리지 않았었고 만문노당의 기술처럼 '대대로 이어져온 한의 호칭'을 일관되게 씀으로서 본인의 형 만타이를 계승한 직후부터 울라가 멸망할 때까지 그 어떤 상황에서건 '한'으로 불렸느냐면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잔타이를 버일러로서 서술한 후금, 청의 실록이 부잔타이에 대한 폄훼기조가 있었음을 염두에 두더라도, 부잔타이의 후손들의 보관 문서나 울라와 통교했던 조선의 기록에서도 역시 부잔타이가 버일러로서 호칭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부잔타이는 생전에 흔히 '하스후 버일러'라고 호칭되었다고 보여진다. '울라의 하스후 버일러의 후손의 문서'는 말그대로 부잔타이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문서로서 그 명칭서부터 부잔타이를 '하스후 버일러'라고 호칭하고 있다.6 하스후 버일러라는 호칭은 부잔타이를 한으로 서술했던 만문노당에도 기록이 남은 호칭으로서 이를 보건대 부잔타이의 생전 별칭으로 유명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하질이(何叱耳)7, 하고이(夏古伊)8, 아질이(阿叱耳)9 또는 하추(何酋)10등 역시 모두 부잔타이를 지칭하는 호칭이다. 여기서 지칭되는 하질이~아질이등은 모두 하스후 버일러를 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질이, 하고이, 아질이등의 별칭은 '버일러' 호칭에 선행하여 붙어 '버일러'를 꾸며주는 단어인 '하스후'를 음역화한 것이다.11 비록 버일러를 의미하는 단어는 기술에서 탈락하였으나 이를 통해 부잔타이가 조선에 스스로를 '하스후 버일러'라고 소개하거나 부잔타이의 수하들이 그를 '하스후 버일러'라고 소개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보건대 부잔타이는 어느 시점까지 스스로를 '하스후 버일러'라고 자칭하고, 더불어 대외적으로 버일러를 칭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임금을 뜻하는 한을 쓰기도 했지만 버일러 역시도 일상적으로 혼용했던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내부의 공식행사와 같은 자리에서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한의 호칭을 필히 사용하면서 울라 군주로서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버일러보다 급이 높은 한으로서의 호칭을 내, 외부적으로 모두 내세우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만약 이 추론을 실제로 가정한다면 그 시점은 아마도 이훈이 제기했던, 1605년의 '큰 성공', 즉슨 동관 전투와 건퇴 전투 이후 시점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강력한 힘을 기반으로 군사적인 성공을 얻은 부잔타이가 그로서 자신감을 가져 한의 칭호를 거리낌 없이 쓰기 시작했다는 시각이다. 혹은 울라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가 아니라 1608년 이한산성 공방전 및 건주와의 화약 이후의 시기 역시도 거론될 수 있는데, 이는 점차 흔들리는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한의 호칭을 공식화 했을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12
이러한 추론은 부잔타이가 본인의 대에 한을 자처했다는 추론과 만문노당에 기술된 '울라의 군주들이 한의 직함을 대대로 사용'해왔다는 서술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울라의 군주들이 내부적으로는 한을 자처하면서도 동시에 버일러를 혼용하고 외부적으로는 버일러를 공식호칭으로 써왔다면, 그러다가 부잔타이대에 이르러 한을 내외적인 공식 호칭으로 삼았다면 울라의 군주가 '대대로 한으로서 살아온' 것도 사실이고 부잔타이가 본인의 대에 한을 자처한 것도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이 추론은 그저 한 가지 견해일 뿐이나, 부잔타이의 한으로서의 호칭 사용 시기와 버일러로서의 호칭 사용에 관한 여러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염두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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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하 연구자분들에 대한 직함 생략
2.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81쪽. 이훈의 견해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부잔타이의 칭한 시기에 관하여 1605년이 아닌 1608년 이후로 추정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후술.
3.만문노당 계축년 음력 1월
4.이상은 이전의 후금사 시리즈에서 부잔타이와 관련한 부분에서 필요한 부분을 약술
5.장정수, 宣祖代 末 朝鮮의 對明 ‘虜情’ 보고와 그 여파,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51, 2019, 67쪽.
6.이훈, 앞의 책, 2018, 69쪽.
7.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8월 29일
8.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8월 4일
9.조선왕조실록 선조 38는 음력 9월 28일
10.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5월 9일등
11.하스후 버일러의 뜻은 추후 다른 글에서 서술.
12.이에 대해서는 추후 서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