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광해 - 왕이 된 남자
후금의 기록상에서는 누르하치가 1618년부터 명나라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정황과 타 국가의 기록상 1617년 무렵에 이미 명나라에 대한 전쟁을 결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기반으로 살펴보건대 누르하치의 명나라에 대한 전쟁을 위한 다방면적인 외교 행보는 1617년 후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1
그 대상은 크게 몽골계 세력들과 조선으로 양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몽골계 세력의 경우 당시 몽골의 상황상 다시 여러 세력으로 세분화된다. 칼카 5부, 차하르, 코르친등이 누르하치가 포섭을 행한 세력들로 유추된다. 이중 코르친의 경우 정기적 내조 관계에 따라 허투 알라를 방문한 밍간의 오남 바트마를 통해 포섭을 행하려 한 것으로 유추되는데, 이들은 누르하치의 요청을 받고서는 명나라와의 전쟁에 휩쓸릴 것을 염려, 그와의 거리를 일시적으로 벌린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칼카 5부나 차하르 같은 대상들의 경우 누르하치의 제안을 수락하여 그의 군사 작전에 협조를 결심한 것으로 판단된다. 1618년에 존재한 누르하치의 무순 침공과 동시에 몽골계 세력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군대를 움직인 것을 보자면 이들은 확실히 누르하치의 작전 계획을 알고 있었고, 그에 협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누르하치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거나 후금군과 군대를 합쳐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누르하치의 군사적 행동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군대를 내어 명나라를 위협, 혹은 약탈하려 했던 것 정도로 판단되지만, 전체적인 파세를 보건대 그들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 만으로도 누르하치는 협조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2 이들은 최소한 누르하치의 명나라 공격이 존재하는 시기에 함께 군대를 움직이는 동시에 그것을 본인들의 경제/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누르하치는 몽골계 세력에만 자신의 전쟁에 대한 협조를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에 대해서도 협조를 요구했다.
누르하치는 1617년 음력 12월 무렵 조선에 직접적인 외교 서한을 발송했다. 해당 문서는 지난 음력 3월에 발송되었던 녹봉수령지 변경 요구에 관한 서한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유배중이던 문희현에게 보내졌다.3 해당 서한은 이전에 발송된 서한과는 차원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전에 발송한 서한이 녹봉수령지를 회령에서 만포로 옮기는 정도의 내용이어서 조선 조정이 후금의 변화된 태도에 어느 정도 긴장을 머금고 차인을 파견하여 상황을 정탐하려는 정도의 내용이었다면, 이번(12월)에 발송된 서신이 담고 있던 내용은 '명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서신의 전문은 확인되지 않으나, 기록을 보건대 해당 서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를 '남조'(南朝)라 지칭하고 있었다. 또한 명나라가 지금껏 건주/후금, 그리고 자신에게 저지른 잘못을 열거하며 명나라의 업보를 질타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4여기서 명나라가 저지른 잘못이란 땅을 빼앗고 자신(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을 죽인 사례등으로 나타나는데5, 이들은 모두 누르하치가 후일 후금의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선언한 칠대한(七大恨, nadan amba koro)에 포함되는 이야기들이었다. 비록 기록상에서 확실히 명시되진 않으나 이를 보건대 조선에 보내진 해당 서신에는 칠대한 혹은 칠대한의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가 실려 있었을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해당 서신은 이러한 명의 후금에 대한 '죄'를 열거하며 장차 명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후금의 공식 입장이 쓰여 있었다.
또한 서신에는 명나라가 조선을 기만하고 해치려 한다는 이야기6, 조위총의 사례에 관한 이야기 역시 실려 있었다.7 조위총은 고려 무신정권 초기 시기 서경유수로서 이의방, 정중부 무신집권 체제의 고려 중앙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었는데, 반란 도중 서언을 금나라에 사절로 보내어 금나라와 연대, 귀부코자 했다. 하지만 금나라의 당시 황제였던 세종 완안오록은 고려와의 외교 관계와 국제 판세를 고려하여 조위총의 요청을 거부했다.8
이 사례의 인용과 더불어 명나라가 조선을 기만하고 해치려 한다는 이야기를 서신에 수록한 것은 금-송 사이에서의 고려의 외교 구도를 현대(17세기)로 끌어와 후금과 명의 사이에서 명의 편을 들지 말고 중립을 지키라는 의사를 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과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조선에게 중립을 요구한 것은 곧 자신의 전쟁에 협조를 요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중립은 그 자체만으로도 후금의 계획에 협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신이 발송되고, 머지 않아 조정에 올려지자 조선 조정은 큰 충격에 휩쌓였다. 비변사에서는 사안이 사안인만큼 명 조정에 직접 주달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니 급한대로 우선 요동아문에 후금의 서신 발송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9그리고 이어서 광해군의 의도에 의해 북경에도 주문을 올리는 것이 결정되었다. 명 조정에 대한 주본 상주가 시일이 오래걸린다고 하더라도 요동아문에 대한 자문과 함께 연동하여 진행하면 그 문제점은 희석되고, 또 주문 자체가 요동아문에 자문을 보내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수신자인 문희현을 심문하여 자세한 정황을 탐문하는 것이 먼저라고 여겼고 그 탓에 문희현을 먼저 심문한 뒤 요동아문과 북경에 후금의 서신과 관련한 서한/보고를 올리기로 했다.10
문희현에 대한 조사는 오랜 시간을 소모했다. 최소한 2월까지도 문희현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던 실정이었다. 결국 덕택에 2월 중후엽까지 자문과 주본이 발송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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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7년 음력 2월에 있었던 엉거더르와의 정략혼은 제외한다
2.예외적으로 칼카 5부의 바유트의 경우 누르하치와 함께 움직였다. 다만 이는 엉거더르가 누르하치의 조카사위였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3.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3월 5일
4.비변사등록 광해군 9년 음력 12월 무일
5.비변사등록 이상과 동일,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3월 5일
6.비변사등록 앞과 동일
7.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3월 5일
8.고려사 권100 열전 권제13 제신 조위총, 고려사절요 권12 명종 5년 10월
9.비변사등록 위와 동일
10.비변사등록 광해군 10년 음력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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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만세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인재 노아합적! 한번 쯤 찾아볼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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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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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우리 도와라 이러면 반발할 거 뻔하니까 중립 지키면서 허튼 짓 하지말라고 돌려말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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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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