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요동총병 이성량과 젊은 시절의 누르하치
양기누와 칭기야누는 16세기 중후엽 해서여진계 세력인 여허의 양대 버일러였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역량을 기반으로 내정과 전쟁 사업, 외교를 통해 하다에게 위세가 밀리던 여허를 급속히 성장시켜 하다에 꿀리지 않는 세력으로 만든 뛰어난 군주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노력 덕에 하다의 완 한이 죽은 뒤에는 그들의 세력인 여허가 여진 세력의 패권 다툼의 최선두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운명에는 종지부가 찍어졌다. 여허의 친명 여진세력인 하다 압박과 명에 대한 무력시위등의 행보가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판단한 요동총병 이성량과 요동순무 이송의 계략 획책으로 말미암아 양기누와 칭기야누 두 사람은 명에 의해 제거당하게 되었다. 살해당한 그 두 사람의 뒤를 이어 나림불루와 부자이가 여허의 버일러가 되었다. 나림불루는 양기누를 계승했으며 부자이는 칭기야누를 계승했다.
이전에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서술한 글에서, 필자는 두 사람이 1584년에 명에 의해 제거당했다고 서술했다. 이는 물론 사실이지만, 단순히 1584년이라고 표현하자면 그들의 사망연대가 상당히 광범위해진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어느 시점에 죽었을까.
무황제실록/만주실록을 비롯한 청의 청태조계 실록은 양기누와 칭기야누의 사망시기를 갑신년(만력 12년)으로 서술했다.1더불어 청나라 시기에 편찬된 기전체 사서인 명사(明史)의 이성량 열전에서는 이성량이 이송과 곽구고와 함께 양기누와 칭기야누를 공시를 근거로 칠 계획을 세운 것이 만력 11년(계미년) 음력 12월로 서술되어 있다. 2후금/청에 의해 편찬된 이상의 사료들을 조합해 보자면 이성량이 양기누와 칭기야누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계획에 들어간 시기가 만력 11년(계미년) 음력 12월이며 실제로 살해당한 시기는 만력 12년(갑신년) 초엽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명측의 기록인 신종실록에는 두 사람이 제거된 시기가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두 사람의 살해에 대한 실제적 기록이 만력 11년 12월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3비록 일자상으로는 12월 27일로서 사실상 해가 넘어가는 시기였으나 무엇이 되었건간에 이 두 사람의 사망 기록은 만력 12년이 아닌 만력 11년에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를 기반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 두사람에 대한 작전 계획도 만력 11년(계미년) 음력 12월에 이루어졌으며 이들에 대한 실제적인 암습 계획 진행 역시도 만력 11년 음력 12월 말에 진행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청태조실록계 실록에 기록된 양기누와 칭기야누의 살해 시기인 갑신년은 오기이며 실제로는 천간지지로 판단할 때에 계미년에 양기누와 칭기야누가 목숨을 잃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청태조계실록에서 양기누와 칭기야누의 사망 시기가 갑신년으로 기록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 오기는 후금/청의 전신인 건주의 여진 세력들이 이 두 사람의 사망연대를 착오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다. 두 사람이 사실상 계미년의 끝자락에 죽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죽었던 해의 착오가 쉬웠던지라 후금/청의 전신이자 당시 여허와 공존하고 있었던 건주의 여진세력들이 이 두 사람의 사망 시기를 갑신년으로 판단했으며, 그 착오가 후금이 건국된 시기, 그리고 후금이 청으로 도약한 시기까지 이어져 실록에서 양기누와 칭기야누의 사망연대가 갑신년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양기누와 칭기야누가 죽은 시기(계미년 12월 말)를 보건대, 명의 요동아문이 명의 영향력이 미치는 광범위한 여진 세력에 양기누와 칭기야누의 참획에 대한 포고를 한 시기, 혹은 건주의 여진 상인들이 양기누와 칭기야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시기는 갑신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으로 여진 세력측에서 양기누와 칭기야누가 죽은 시기에 대해 착오를 하기에 충분한 여건이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건주에서는 이 두 사람의 죽음이 본인들에게 알려진 시기(갑신년)를 기준점으로 잡아 두 사람이 죽은 시기를 판단했고, 이후 건주로부터 이어지는 후금-청에서는 이 두 사람의 사망 연대를 명측의 기록보다는 본인들의 기록을 신뢰함으로서 갑신년으로 판단하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청태조계 실록과의 연계를 제(除)하고 볼 시 명사(明史)에 기록된 양기누와 칭기야누의 살해 시기는 계미년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양기누와 칭기야누를 진북관으로 끌어들인 달만 기술되어 있고 살해한 달은 따로 기술되지 않은 것을 통해 그들이 다음 달 혹은 다음 해로 넘어가지 않은 시점-즉슨 계미년 12월내에 살해당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명사가 명나라의 사료를 적극적으로 인용한 까닭에 같은 국가(청)에 의한 편찬서이나 청태조계 실록과는 다르게도 사건의 시기오류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후금/청의 실록에서는 갑신년에 양기누와 칭기야누가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명의 실록을 보자면 이 두 사람은 계미년 말에 죽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 판단하자면 1584년 2월이 된다.
1.만주실록 제 1장 해서여진 국주 소개
2.명사 권238 이성량 열전
3.명신종실록 만력 11년 음력 12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