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 中, 누르하치 사후의 패륵회의)
성대중이 지은 청성잡기에는 여러 야사적 성격을 띈 일화들이 기술되어 있다. 그 수량이 매우 방대한데, 그중에는 뜻밖에도 후금의 암바 버일러로서 누르하치의 차남이었던 다이샨에 관한 이야기 역시도 기술되어 있다.
청성잡기에서 다이샨은 귀영개(貴永介)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귀영가(貴盈哥)등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다이샨의 칭호중 하나였던 구영 바투르(guyeng baturu)를 한자화하여 조선식으로 음역한 것이다. 또한 청성잡기에는 다이샨이 누르하치의 맏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 장남이었던 추영이 숙청당한 결과 후금 성립 이후 다이샨이 암바 버일러로서 장남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조선이 다이샨을 장남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일부 기사에서 다이샨을 장자로 서술한 바가 드러난다.1
본격적으로 청성잡기를 살펴보자면, 여기서 다이샨은 누르하치가 죽은 뒤 자신의 동생 홍타이지에게 왕위를 양보했다고 한다. 본래 다이샨이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즉위했어야 하나 홍타이지의 호방함을 두려워하였기에 그에게 왕좌를 넘긴 것이라 한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한위에 즉위한 뒤 다이샨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서글퍼 하며 이후 조선으로 망명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에 온 다이샨의 대우는 몹시 처량했다고 한다. 단지 하잘 것 없는 포로로 대우를 받아 굶주리고 곤궁한 처지에 직면하였으며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딸까지 무반 박륵의 첩으로 내주어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통을 겪던 와중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양부사 윤계를 죽이고 조선에 내려온 홍타이지에게 다시 귀부하였고 이후 청으로 돌아가 후하게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다이샨의 망명과 그에 대한 홀대, 그로 인한 다이샨의 윤계 살해와 청에 대한 재귀부 이야기를 통하여 청성잡기의 해당 성언은 다이샨이 기껏 조선에 망명해 왔음에도 그를 후하게 대우하는 동시에 그를 이용해 후금 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은 당시의 조정을 비판한다. 기술되기를
[가령 우리나라가 귀영개 대하기를 가의가 삼표오이로 오랑캐를 회유하였던 계책처럼 하여 그의 충심을 받아들이고, 병자호란 초기에 그에게 북쪽 지역의 군사를 주어 곧바로 만주로 쳐들어가게 해서 후당 용민의 계책처럼 하였다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군대를 돌려서 스스로를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진기한 보배가 제 발로 왔는데도 쓸 줄을 몰랐으니 애석하도다.]2
라고 하였다.
다이샨의 망명과 관련한 이러한 이상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당연하게도 사실이 아니며 야사에 불과하다. 누르하치 사후 다음 한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이샨이 홍타이지의 추대에 앞장선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조선에 망명한 적은 없다. 그에 따라 조선으로부터 홀대를 받은 적 역시 없다.
홍타이지는 한에 즉위한 이후 권력이 분산된 형국에 놓여 있었고, 그 권력은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에게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홍타이지는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고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아민과 망굴타이는 권력에서 배제되었고 다이샨 역시도 공치체제를 포기하고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권력 상당수를 내려놔야 했다. 즉, 그는 홍타이지와 대등한 입장에서 아래의 입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것이 다이샨이 완전히 몰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민이 완전히 몰락한 것, 망굴타이가 정치적 권력이 꺾이고 사후 자신의 계통이 완전히 망가진 것에 비하여 다이샨은 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많은 것들을 지켰다. 그것은 다이샨 본인의 처세, 다이샨과 그 아들들의 국내의 견고한 입지, 홍타이지 본인의 판단등에 따른 것이었다.
홍타이지가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홍타이지와 다이샨간의 관계가 위험한 순간에 이르렀던 때가 없진 않았다. 특히 1635년에 있었던 다이샨에 대한 처벌 단행 시도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홍타이지와 다이샨의 관계는 깨지지 않았다. 병자년 홍타이지가 다이칭 구룬의 황제로 거듭난 이후 다이샨은 호쇼이 도롱고 아훈 친왕(hošoi doronggo ahūn cin wang)으로 봉해지면서 청 국내 의전 서열 2위의 자리를 지켰다. 명예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힘 역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홍타이지에게 도전하거나 홍타이지에게 키워진 다른 친왕들을 압도하는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는 모두의 존중을 받는 자리에서 존중을 받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샨은 오히려 급사한 동생 홍타이지보다 더 오랜 시간 생존했다. 그는 청이 입관을 한 뒤까지도 생존하여 북경에서 사망했다. 홍타이지는 결코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렸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이샨은 단 한 번도 조선에 정치적 망명을 한 적이 없고 자신의 딸을 조선의 무인에게 첩으로 바친 적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후금의 버일러, 그리고 청의 친왕으로 존재했다.
아마도 다이샨이 대외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성향인 것이 후대로 갈수록 변질되어 이러한 유형의 야사를 만들었고, 그러한 야사가 병자호란에 대한 아쉬움을 환기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1.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1년 음력 12월 17일
2.청성잡기 권3 성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