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여기서는 누르하치가 부잔타이를 죽였다는 스토리적 각색이 이루어졌다.
부잔타이는 울라의 군주 만타이의 동생이었다. 1593년 음력 9월, 건주에 대한 대규모 연합 공격전이었던 9개 부족의 전투에 형인 만타이를 대신하여 울라군을 이끌고 참전하였으나 해당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대패, 이후 포로로 생포되어 당시 건주의 거점이었던 퍼 알라에 억류되었다. 그러다가 1596년 7월 부잔타이를 통해 울라와의 제휴관계를 만들 목적을 품은 누르하치에 의해 석방되었고, 당시 부족민들에게 살해당한 만타이를 대신하여 울라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
부잔타이는 울라의 국제를 정비하고 외부적인 원정을 진행하며 울라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1605~6년이 그의 전성기였으며 동시에 울라의 중흥기의 최고점이었다. 이 때 울라는 조선을 상대로 변경우위를 점유한 채 녹봉 명목의 세폐를 받았고, 번호들을 흡수해가며 강력한 세력을 구가하던 누르하치를 상대로 경쟁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올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1607년 건주와의 실제적인 충돌이 발생하자마자, 오갈암 전투에서 그의 숙부 봌도의 1만여 원정군이 누르하치가 파견한 추영, 다이샨, 슈르가치에게 패배하면서 울라의 중흥기는 끝났다. 이후 부잔타이는 어떻게든 울라의 역량을 회복시키고 다시 세력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누르하치'라는 그림자를 넘을 수 없었으며, 1613년의 패배로 자신의 나라를 빼앗기고 여허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부잔타이는 자신의 나라를 통치할 당시 스스로 '한 han'을 자처했다. '한'은 여진에서 '임금'을 뜻한다. 누르하치 역시 '건주의 한'이었으며 후금을 건국한 뒤에는 '후금의 한'이었다. 누르하치 이전의 여진 세계의 패자였던 하다의 군주 '완' 역시도 한을 자처했다.
부잔타이가 언제 어떻게 한을 자처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나 언급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훈은 본인의 저서와 기고문에서 건퇴 전투 이후, 즉슨 1605년 무렵에 부잔타이가 한을 칭하였다는 견해를 보인 바 있다.11605년은 부잔타이가 군사,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며 울라의 중흥을 이루어내던 시기였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건퇴 전투에서 조선군의 대대적인 역습을 고작 수백의 기병으로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부잔타이의 자신감은 충천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을 자처했다고 본 이훈의 견해는 타당성이 존재한다.
다만 이 시기에 부잔타이가 한을 자처했다는 것을 확실히 명시하는 사료문은 여전히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 다소 아쉬운 점이다.
한편 구만주당에는 다소 흥미로운 기술이 존재한다. 1613년 누르하치가 울라를 멸망시킬 당시에 대한 서술에서 '여러 대를 이어 한으로 살아온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문장이 기술되어 있다.2이는 만문노당에도 거의 그대로 서술되어 있다.
구만주당은 후금, 청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후금, 청의 사료이지만 동시에 당시 여진 세계의 생리를 파악하는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료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료에서 울라의 군주가 '한'을 자처해 온 것이 '여러 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왔다면, 이훈의 견해와는 상반되게도 울라의 군주가 '한'으로 자처해 온 것이 의외로 부잔타이 이전, 요컨대 만타이나 그 전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례일 수도 있다.
사실 울라의 경우 과거 여진 세계에 존재했던 강력한 세력인 훌룬의 적통을 자처하는 세력이기도 하였다. 훌룬 내부에서 발생한 동란으로 말미암아 훌룬의 체제가 붕괴되고 이후 훌룬의 명목상 군주였던 구터이 주얀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 뒤, 구터이 주얀의 후손인 부얀이 울라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울라는 자신들이 훌룬의 계승세력으로서 여진 세계의 맹주였으며 후일 조상들처럼 맹주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자부심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에 따라 이미 부잔타이 이전부터 '한'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있다.3
실제로 언제부터 울라의 군주들이 스스로를 '한'으로 자처했는지는 완벽히 확실한 근거가 없으므로 이에 대한 유추는 다소 조심스럽다. 다만 필자는 이훈의 추정대로 부잔타이가 자신의 대부터 압도적인 성공을 기반으로 한을 자처했을 가능성, 그리고 그 이전부터 훌룬의 계승을 표방하며 '한'을 자처했을 가능성, 이 두 경우의 가능성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만약 후자의 가능성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필자가 이전에 작성했던 글에 서술된 부잔타의 한칭에 관한 기술, 그리고 누르하치가 1605년 당시 조선에 대해 외교문서를 보내면서 스스로를 '국왕'이라고 표방한 이유에 관한 유추등은 최신의 이론을 받아들여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1.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018, p.81.
2.구만주당 계해년 음력 1월
3.한편 장정수의 경우 '울라'세력이 훌룬을 계승하여 스스로 계속 '훌룬'을 자처했다고 판단했다. 장정수, 宣祖代 末 朝鮮의 對明 ‘虜情’ 보고와 그 여파,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51, 2019, 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