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07년 누르하치는 음력 3월에 조선 변경에서 벌어진 울라 세력과의 오갈암 전투와 관련하여 명나라로부터 조사 및 선유를 받았다.
누르하치는 1607년 당시 요동아문과 미묘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1606년 무렵부터 본격화된 누르하치와 요동아문간 대립은 누르하치의 조공의 정지와 경계의 명확한 설정 요구등으로 이어졌고, 당시 요동아문은 그러한 누르하치를 어떻게든 명조에 순응케 하려고 설득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아문에서는 조선의 선유 요청을 받았기 때문에 일단 누르하치에 대한 선유를 진행한 것인데, 누르하치는 이 선유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며 본인은 부잔타이를 상대하여 오히려 조선을 도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더불어 누르하치는 역으로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관속하 번호들을 쇄환해 달라는 요청까지 했는데, 이는 명나라에 요청한 것이긴 했지만 실상 조선을 겨냥한 것에 가까웠다.1
이로부터 얼마 뒤 누르하치는 또 다시 명나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것은 조선이 누르하치의 해명에 대해 반박을 하고 이의를 제기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은 6월 초중엽 무렵 진강유격부에 재차 자문을 보냈고 이후 누르하치의 명나라의 선유에 대한 해명을 내포한 요동아문의 자문을 당해 음력 6월 15일에 수신한 뒤, 거의 그 즉시 누르하치의 해명에 대한 반박과 이의제기를 내포한 자문을 다시 요동아문에 발송했다. 그 자문의 주요 골자는 누르하치는 조선을 위하여 울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 누르하치의 의도는 번호들을 흡수하고 본인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함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2
6월달에 있었던 조선의 자문으로 말미암은 자신에 대한 재차 조사에 파견된 요동아문 소속 중군 최길회에게, 누르하치는 조선의 백성들이 자신이 울라를 격파한 것에 대해 사은한 점을 강조하며 자신이 조선을 도운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고 재차 해명했다. 동시에 부잔타이와 조선의 충돌 이유는 번호의 관속보다도 조선이 부잔타이의 장수(만도리)를 죽인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조선-울라-건주가 얽힌 갈등을 오직 번호관속권을 두고 벌어진 문제로 치부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조선과 울라간 최초 갈등에서 조선에 책임이 일정부분 있음을 피력했다.3
누르하치의 해명을 끝으로 사실상 오갈암 전투에 관련한 명나라의 조사는 끝이 났다. 이후 조선이 누르하치의 해명에 대해 재반박과 해명의 자문을 보내고, 이로 말미암아 조즙이 다시 누르하치를 선유하긴 했으나 요동아문의 선유는 이제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요동아문은 이 시점에서 누르하치에게 선유를 뛰어넘는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가할 힘도 없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그런 요동아문의 무력한 상황을 더욱 활용하기 시작했다.
1.사대문궤 권48, 만력 35년 5월 24일.
2.이상은 장정수, 앞의 논문(1편 참조) pp.104~105의 요약문을 참고했다.
3.사대문궤 권 48 만력 35년 음력 7월 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