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년 중엽, 조선 변경에 '아로'(阿老)1라는 이름을 가진 여진인이 투항해 온다. 아로는 1600년까지 조선의 번호로 존재하면서 조선, 누르하치, 부잔타이의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 외교를 하다가 결국 조선과의 충돌끝에 근거지를 상실하고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귀순한 여진족 추장, 로툰의 아들인 인물이었다.
아로 역시 자신의 부친과 함께 누르하치에게 귀부했는데, 이 때 누르하치는 로툰의 귀부를 환영하는 한편 그의 아들인 아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어 부마로 삼았다고 한다.2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로툰의 귀순을 완전히 인정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배층의 권리를 그대로 유지시켜주겠다는 뜻이었다.3
아로는 누르하치에게 귀부한 뒤 부친과 함께 누르하치의 의지를 대행하여 번호철거 작업에 착수했다. 1602년 아로는 독소와 왕주부락을 공격하여 그들과 치열한 교전끝에 13명의 번호를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1603년에도 역시 위장을 하고 번호 약탈을 시도했다.4
그러나 1605년 아로는 돌연 조선의 회령에 귀순을 해왔다. 아로가 귀순을 한 이유는 부친 로툰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부자간의 싸움끝에 아로는 로툰에게서 벗어나 조선에 몸을 의탁코자 했고 회령부사 심극명은 이를 받아들여 그를 회령에 기거하게 하고 상황에 대한 전갈을 상부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아로의 귀순과 심극명의 허용에 대해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로의 귀순을 생각없이 받아들임으로서 아로의 부친인 로툰이 조선에 보복을 행할 가능성, 그리고 그와 연결된 누르하치가 이 문제에 개입할 가능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아로의 귀순과 거의 동시에 로툰은 자신의 아들의 귀순을 받아들인 조선에 보복을 하려는 목적으로 국경에 들어와 무력시위를 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은 본인을 배신하고 조선에 망명한 것이니 그를 참수하여 달라는 요구를 전했다. 조정에서는 일이 혼란하게 되자 애초에 아로의 귀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 하면서도 이미 문제가 이렇게 된 이상에야 다른 방도를 내어야 한다고 의견을 내었다.
처음에 조정서는 아로를 포박하여 로툰에게 넘겨 그들에게 처결을 맡기는 것을 의논했는데, 이후 북병사 김종득과 함경감사 서성이 '아로를 포박하여 돌려보냈다가 그들이 혹여 부자간의 정이 되살아나 아로를 죽이지 않는다면 아로는 자신을 포박하여 돌려보낸 조선에 큰 원한을 가지게 될 것이다. 차라리 그들의 요청대로 참수하고 시신을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더불어서 아로를 갑자기 포박하여 돌려보낸다면 로툰이 조선이 자신들을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조선을 업신여길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서 일단 로툰 혹은 그의 차남을 불러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아로를 참수하겠다는 통보를 전해두고, 이어서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일을 처치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로툰이 비록 아로를 처형하라고 요구를 해오긴 했으나 막상 처형이 진행된 뒤에는 이를 후회할 수도 있었고 그리 되면 로툰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었기에 일단 '그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을 하겠다'는 뜻만 통지하고서 그들의 태도가 바뀌는지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이는 또한 아로를 통보없이 포박하여 돌려보내거나 참수한 뒤 시신을 돌려보내면 로툰이 조선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여길 것을 염두에 둔 조치이기도 했다.5
아로의 문제에 대한 의논은 5월 29일 무렵 재언급되었다. 이 날 선조는 아로가 누르하치간의 관계를 지적하며, 아무리 로툰측이 먼저 요청을 했다고는 하나 함부로 죽이거나 할 수는 없다는 의견을 냈다. 조정측 역시 아로에 대해 '일단은 죽이지 말것을 기본 전제로 하되, 상대(로툰)이 요청한다면 죽이자'는 의견으로 아로의 문제에 대한 처치를 일부 수정했다. 기존의 입장이 '로툰의 요구대로 처형하겠다는 뜻을 로툰에게 통보하되 통보후 상황을 지켜보자'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기본적으로 아로를 죽이지 않는 것이 전제로 깔린 것이다.
그러나 아로 문제에 대한 조정의 의논은 그대로 의미를 상실했다. 북병사 김종득이 당시 아로의 신병을 관리하고 있던 무산첨사 현즙에게 지시를 내려 본인의 임의소견대로 아로를 처형하게 한 것이다. 현즙은 북병사의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었고 아로는 그렇게 처형되었다.
김종득이 아로를 급작스럽게 처형한 이유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음력 5월 29일 조정에서 있었던 아로에 관한 의논, 즉슨 아로를 일단 살려두자는 의논 내용이 김종득에게 전달된 때가 늦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음력 5월 4일서부터 '로툰이 보는 앞에서 아로를 처형하겠다고 통보를 하고 향후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처결하자'는 의견이 정해졌기에 갑작스러운 처형은 예상되기 힘들었다. 김종득 본인이 아로 처형의 주장자라고 하더라도 이 문제를 본인의 임의로 처결하는 것은 월권에 가까웠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선조38년 음력 7월 4일의 아로 처형에 관한 의논을 살펴보면 '로툰이 이미 아로를 죽게 만들었으므로'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그렇다면 로툰이 아로의 처형을 재차 요구하여 김종득이 자신의 임의대로 처결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파악하고 아로를 처형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정황상 로툰이 재차 아로의 처형을 요구한 것을 뜻한다기 보다는 이전에 아로가 조선으로 망명한 직후 로툰이 조선에 아로의 처형을 요구한 것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더 높기에 속단하기는 힘들다.
김종득은 아로의 처형 직후 급작스럽게 그 허물을 처형실행자인 현즙에게 돌리려 했다. 실록서는 '뒤끝이 좋지 않음을 직감하고'라는 표현으로 김종득이 현즙에게 아로 처형의 책임을 떠넘기려 한 정황을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아로가 처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선 조정으로부터 '음력 5월 29일의 의논', 즉슨 '아로를 일단 살려두라'는 논지의 명령이 전해졌고 그 때문에 김종득이 이미 처형되버린 아로 문제의 책임을 현즙에게 떠넘기려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명령을 송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임의로 처결하고 그 책임을 현즙에게 돌리려 했을 수도 있다.
상황이 어찌 돌아갔건간에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극심히 한심스럽게 여겼고, 얼마 뒤 김종득은 건퇴 전투의 패전 문제의 책임과 함께 아로 사건의 책임을 받고 나국을 받게 되었다.
한편 로툰의 경우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배신한 것을 극히 통스럽게 여겨 아로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긴 했으나, 아로가 처형된 뒤 뒤늦게 이성을 되찾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 것으로 보인다. 비단 부자간의 정때문만이 아니라, 아로의 경우 조선의 정보 파악상 누르하치의 사위이기도 했으므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 문제로 인해 분노한 누르하치에게 책임을 지적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툰은 누르하치에게 군대 4백을 빌려 자신의 군대와 합쳐 조선에 보복전을 하고자 했다. 조선은 이에 대한 첩보를 접하고서는 '로툰이 이미 아로를 죽게 만들었으므로 무단히 노추에게 고할 수 없는 입장이라 원수를 갚겠다고 청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온건하게 대처했다. 누르하치는 '아로는 죄를 지어 처형당했으므로 이런 문제를 통해 (조선과) 서로 싸우는 것은 온당치 않다'면서 로툰의 청을 물리쳤다.6
누르하치는 당시 조선과 충돌하는 것을 여전히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과의 외교관계는 되도록이면 원만히 유지하고자 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제일번국이었으며, 동시에 협의의 여지가 있는 외교대상이었고, 자신의 세력에 어느정도나마 식량을 지원해주는 세력이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과의 관계를 진전시키진 못할 망정 수하인 로툰의 원한 때문에 조선과 충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아로가 자신의 사위(친딸의 남편이건, 혹은 다른 족녀의 남편이건)이기까지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누르하치가 온건한 대응을 함으로서 조선과 로툰, 나아가 누르하치간의 충돌 가능성은 흐지부지되었다. 당시 조선은 부잔타이와 충돌을 하던 상황이었는데, 이 무렵 누르하치까지 개입하게 되었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므로 조선으로서는 천만다행인 상황이었다.
1.여진어 인명은 불명. 아루(Aru)일 가능성이 있다.
2.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4일
3.아로에게 시집을 간 누르하치의 딸이 누구인지는 불확실하다. 아로에 대한 청측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르하치의 딸들에 대한 기록은 다소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누르하치의 딸 중에서도 이름과 모친이 남지 않은 인물들이 존재하여 그 정체를 확실히 파악할 수가 없다. 대표적으로 청의 초품공 양구리에게 시집을 간 누르하치의 딸 역시 정보가 거의 남지 않았다. 한편 아로와 혼인한 여식이 누르하치의 딸이 아니라 무르하치등 누르하치의 형제의 딸, 즉슨 조카딸일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양구리와 혼인한 여성 역시도 상동 가능성이 존재한다.)
4.조선왕조실록 선조 35년 음력 7월 10일, 선조 36년 음력 7월 1일
5.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4일
6.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7월 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