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정충신)
조선 조정에서 추가로 발급하는 직첩은 모두 정 3품 절충장군에 해당하는 직첩이었다.1본래 부잔타이에게 지급된 직첩은 첨지중추부사의 직첩으로서 절충장군과 동급이었기에, 조정에서는 부잔타이에게 지급하는 직첩을 한 단계 올려 가선대부의 직첩을 함께 내리기로 했다. 해당 직첩의 지급 방식에 관하여서는 본래 조금씩 분급하면서 울라측이 조선의 의도에 따르게 하고자 하는 전략을 시행하기로 했으나, 한꺼번에 지급하는 방안 역시도 제시되었다.2
또한 조선 조정에서는 울라에 대한 직첩 지급에 번호 규례를 적용하였다. 1605년 음력 11월 신임 북병사 이시언은 종성부사 유비에게 울라측 사신들에게 번호 규례에 따라 녹봉과 의건을 결정한다고 전하게 했으며3, 이듬해 5월에는 '그들이 이미 직첩을 받았으니 구호와 같다'는 발언이 비변사에 의해 나왔다.4이는 조선이 울라와 실질적으로는 강화, 화친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울라간 관계를 인위적으로 윤색하고자 하는 의도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장정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로는 힘에 밀린 화친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번호에게 사용해온 규례를 훌룬(울라)과의 관계에 적용하여 이를 정당화했다.'.5
한편 100여장의 직첩 발급이 결정됨에 따라 직첩에 상응하여 지급되는 녹봉의 양 역시도 논의되었다. 본래 정 3품 당상관으로서 절충장군과 동급인 첨지중추부사의 직첩에 수반되는 녹봉의 양은 면포 40필이었다.6그러나 국가의 재정상황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과 울라는 양자간 협상에 따라 녹봉의 양을 재조정했다.
울라의 경우 부잔타이 몫의 직첩 50장에 각 40필의 면포를, 그리고 그 휘하 장수들에게 분급될 예정인 직첩 50장에 각 20필의 면포를 적용하여 총 3000필의 면포를 요구했다. 조선측은 이를 재조정하여 '왜란 이후 번호에게는 직첩당 20필을 지급키로 했다'는 논리를 내세워 일괄적으로 모든 직첩에 20필을 적용, 총 2천필을 녹봉으로 지급코자 했다.
양자간 의견충돌 과정에서 직첩의 지급을 맡은 조선측 실무담당자 정충신이 이번 녹봉지급이 부잔타이의 향후 태도를 결정지을 중대한 사안이라고 지적하였고, 북병사 이시언과 함경감사 이시발 역시 정충신의 논조에 동조하였다. 상황이 그리되자 비변사 역시도 이에 동의했다. 비변사는 20동(1천필)의 면포를 가지고 욕심이 한정없는 도적들과 따질 수는 없다면서 부잔타이의 요구대로 3천필의 면포를 지급키로 하였으며, 대신 부잔타이는 직첩에 상응하는 포로들을 송환했다.7
그것으로 조선과 울라간의 강화협약과 번호규례에 기반한 교역관계가 구축되었다. 이는 조선의 지속적인 패배로 인해 관철된 협약이었으나 조선은 이를 기미책으로 포장하여 체면치레를 하였고, 부잔타이의 경우 외양상으로 조선에 '번호 취급'을 받는 꼴이 되어 승리를 하고서도 을의 위치처럼 보이는 외교 형태를 구축하게 되었으나 그의 목적인 '강화'와 '교역'은 모두 성립되었기 때문에 구태여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조선이 울라의 직첩 요구를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인 이유는 동관의 패전과 뒤이은 건퇴의 패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울라가 명나라와 번신관계를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은 누르하치가 1600년 무렵 본인들에게 직첩을 요구했을 때에는 누르하치가 명으로부터 이미 용호장군에 봉해졌다는 사실을 들어 직첩 요구를 거부했다. 이미 명의 번신인 누르하치에게 조선이 자구적으로 직첩을 지급하면 자칫 잘못했다가는 명으로부터 외교적 시비를 걸릴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라는 명과 어떤 번신관계도 구축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직첩 지급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다.
조선은 이렇게 울라와의 전쟁을 시작점으로 하여 그들과 협상을 진행하고 1606년부터 본격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울라 자체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1613년 울라를 병합한 것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였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8월 25일 기사3
2.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8월 25일, 26일, 29일
3.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11월 17일
4.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5월 9일
5.장정수,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 교섭과 ‘藩胡規例’, 명청사연구 54, 명청사학회, 2020, p.191.
6.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10월 26일
7.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 음력 5월 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