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년 음력 3월 부잔타이의 울라 세력이 조선의 동관을 공격, 함락한 이후 조선의 함경도와 조정에는 비상이 걸렸다. 울라가 조선을 주목표로 삼아 공격을 해오자 변방의 방어가 뚫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졌으며, 동시에 울라에 반격을 가하여 그들이 조선을 더 이상 우습게 여기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
정토 대상으로 꼽힌 것은 건퇴. 울라의 전진 기지로서 종성 밖 120~150여리 지역에 위치한 요새였다. 울라 본토를 공격하기에는 조선군의 원정 역량이나 보급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던 데다가 울라의 전력을 생각해 보자면 당시로서 도저히 울라와의 전면전을 치룰 수 없었기에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조선은 건퇴를 정토함으로서 울라의 원정 보급로를 끊고 그들에게 조선군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본래 건퇴에 대한 정토는 친울라 성향의 여진 부락들을 대규모로 초토한 뒤 시행될 예정이었다. 비변사와 북병사 김종득 모두 이러한 방안을 제시했고, 이러한 계획에 따라 울라에 협조한 이항과 우허 부락이 김종득에 의해 토벌되었다.
그러나 울라군이 조선에 대한 재침을 준비한다는 정보, 울라군의 반울라 성향 번호 급습과 조선군과의 재차 교전, 그리고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의 수효가 고작해야 수백명선으로서 그리 많지 않다는 정보들이 전해짐에 따라 함경도측은 본인들의 자구적인 재량권을 이용해 정토를 시행하기로 했다. 함경감사 서성은 정토의 시행에 관하여 진퇴시기를 적절히 결정하고 추후 치계하겠다는 보고를 올림으로서 정토를 빠른 시일내에 시행할 것을 결의했다.1
1605년 음력 5월 4일, 북병사 김종득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는 3천여명의 조선군이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을 섬멸하기 위해 출정했다. 여기에는 번호 추장 탁두가 이끄는 3백여명의 번호군도 함께 종군하였다. 총원은 3천 3백여명으로서 지금까지 조선에 전해진 건퇴 주둔 울라군의 수효에 관한 정보들을 종합해 살펴보자면2 건퇴를 정토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숫자였다.
3천 3백여명의 조선, 번호군은 음력 5일 무렵 비가 온 통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대기하다가 6일 도강을 하였다. 이 이후 조선군의 본래 계획은 풍계 부락을 거쳐 진군하여 인근 노동이라는 지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대기한 뒤, 7일 새벽녘에 건퇴로 진군하여 동틀녘 건퇴의 삼면을 포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삼면 공격은 일부러 울라군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척 하다가 탁두의 기병대를 이용해 그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섬멸하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울라군이 이 계획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건퇴를 사수하고자 하면 막강한 화기전력을 바탕으로 건퇴를 공성하여 함락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진군 도중 향도인 번호들이 풍계로를 따라 이동하면 적의 매복에 걸릴 수 다는 의견을 내었다. 풍계를 경유하는 길 자체가 워낙에 잘 알려진 길이다보니 매복의 가능성 자체는 타당했고, 그에 따라 번호들이 제시한 대안인 산골 우회로로 진군로를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터졌다. 첫째로, 해당 우회로를 통한 건퇴 진군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으며, 둘째로 해당 진군로에는 수원(水原)이 없어 식수를 보급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행군이었다면 쉬엄쉬엄 진군할 수 있었겠으나 애초에 조선군의 전략 자체가 건퇴에 대한 기습공격을 상정하고 있었기에 조선군은 날이 밝기 전 최대한 빠르게 진군해야했고, 그 탓에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한 상태로 강행군을 하다보니 건퇴 인근에 도달했을 때에는 모든 병사들이 갈증과 피곤함에 지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건퇴 근처에 이른 조선군과 번호군은 건퇴의 상황을 살펴보다가 건퇴에 주둔한 울라군이 요새에서 나와 싸울 기미가 없자 곧장 돌진하여 성 밖의 부락을 분탕하고 약탈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울라군이 노리던 상황이었다.3
울라군은 이미 조선군이 자신들에 대한 정토를 시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조선군의 정토가 준비되고 있던 것은 이미 음력 4월부터 공공연한 사실이었다.4그런 상황에서 건퇴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안일한 판단이었다. 아마도 우회로를 이용해 진군하였기에 조선군이 그 가능성을 간과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울라군은 이미 우회로의 존재 역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조선군의 선봉이 흩어져 약탈을 시작하자, 조선군 전열이 흩어지기를 노리면서 근처에 매복해 있던 울라군 기병대 수백여기가 조선군을 급습했다. 조선군과 조선군에 함께 종군하던 번호들은 그 급습에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조선군은 울라군의 공격에 의해 전열이 붕괴되었고, 이어서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곧 몇 개의 부대로, 그 부대들은 또 다시 몇 개의 소부대로 나뉘어져 다급히 후퇴하였다.
울라군은 도망치는 조선군을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곧 울라군은 우수한 기병전력을 이용하여 조선군을 추격섬멸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도주하다가 죽거나 저항하다가 죽는 이분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추격전은 건퇴로부터 약 2식정(60리) 밖에 해당하는 거리까지 진행되었으며, 조선군이 해당 거리를 도주하는 동안 벌어진 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최악의 상황에서 빛을 발한 것은 우후(虞候) 성우길의 분전이었다. 성우길은 병사들이 도륙당하는 와중 수십여명의 휘하 병사들을 규합하여 후방에서 지연전을 펼치며 울라군의 추격기세를 한꺼풀 꺾었다. 이후 성우길은 목숨을 다해 싸우면서 후퇴하는 아군의 뒤를 엄호했고, 그로서 조선군은 가까스로 출혈강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까스로 퇴각에 성공한 정토군 본군은 음력 5월 8일 김종득의 지휘 아래에서 전열을 수습하고 해산했다. 그러나 많은 수의 군병이 퇴각 과정에서 산산히 흩어졌기 때문에, 본군이 복귀한 뒤에도 패잔병들이 며칠에 걸쳐서 귀환했다.5
건퇴 정토는 실패를 넘어서 완전한 참패로 끝났다. 조선군은 공격대상이었던 울라군의 최소 6배에서 최대 10배에 달하는 전력에 강력한 화기까지 다수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전략적 실책을 범하여 패전했다. 그들은 진군 도중에 체력을 너무 소진했고, 건퇴에 이르러서는 교전준비에 임하기 전에 분탕부터 진행했다. 그런 와중에 매복에 걸려 강력한 기병전력을 지닌 울라군에 의해 진형이 붕괴되어 전투의지를 완전히 상실했고, 결국 수 시간에 걸쳐 도주하며 출혈을 강요당했다. 전투의 전개와 결과는 최악이라고 평가할 만 했다.
해당 전투에서 조선군은 50여급의 수급을 얻었다고 하지만6, 전투의 전개를 보건대 그 수급의 일정 숫자 이상은 울라군을 상대하여 얻은 것이기 보다는 건퇴 요새 근처의 마을을 공격하며 획득한 수급으로 판단된다. 반면 조선군은 확실히 파악된 정군 전사자만 213명이었으며, 그 외에 함께 종군한 화반, 복노, 잡수종인의 전사자는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사자만 이 정도이며 부상자는 그 몇 배가 넘고, 포로가 된 병사들도 다수가 존재했다.7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28일
2.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8일, 4월 16일, 4월 25일등
3.이상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19일, 음력 6월 12일
4.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4월 19일
5.이상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22일, 6월 12일
6.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22일
7.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7월 5일, 부상자의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음력 5월 28일의 수효를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