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5년 음력 7월, 누르하치가 두 번째로 조선인들을 쇄환하고 조선측에 통교와 국경 문제에 대한 협의를 제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위원에서 누르하치 관하 여진인 수십명이 조선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들은 채삼을 위해 국경을 넘어 조선 영토에 들어간 여진인들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그나마 이전까지는 미적지근한 수준이었던 조선과 건주간 양국관계가 일순간 얼어붙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이 문제에 대해 도강한 여진인들 중 생존자와 죽은 이의 가족들에게 처벌을 내렸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조선의 이러한 살상 대응에는 군사적으로 대응코자 했다. 조선인들을 쇄환하는 성의를 보이고 외교적 통교를 제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자신 관하의 여진인들이 대량으로 살해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무력 행위를 취하려 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이 사건 이후로 군대에 출병을 준비시켰는데, 물론 조선의 조치에 대한 보복과 항의의 성격을 가진 출병 준비였다. 그런데 이 때 누르하치가 진심으로 조선을 공격하고자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 무력시위를 하고자 한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사료에 의하면 누르하치의 세력내에서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1 누르하치 역시 이후 이루어진 조선, 명측과의 협의에서 본인이 직접 '원수를 갚으려 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2
그러나 '보복전'을 정말로 실현하려 했는지는 미지수다. 누르하치는 외교적 감각이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그 감각을 기반으로 하여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있던 인물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전 세대의 다른 대다수의 여진 군주들과는 달리 교역과 충돌을 병행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충성일변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당장 당시에만 해도 슈르가치와 마삼비를 명나라에 입조시켜 조공을 바치고 있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명나라의 제일번국 위치에 있으며 심지어 임진왜란의 진행 탓에 명군 역시도 주둔하고 있던 조선을 자신의 의지 하에 실제로 공격했으리라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누르하치가 직접 발언한 것은 아니나 누르하치 휘하의 건주인들의 사료상 발언에서 누르하치와 건주의 당시(왜란중) 조선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여기서 해당 건주인은 '조선은 상국(명나라)와 동심 합력하고 있다. 왜적의 변 때문에 지금까지 병마를 조달하여 잇따라 구제하고 있으므로 결코 조선과는 원수를 맺어서는 안된다.'고 발언했다.3
해당 발언서 건주측은 왜란에 대해 명나라가 조선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을 조선과 척을 져서는 안되는 이유로 꼽고 있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정유재란기 당시 건주가 실제적으로 조선과의 충돌을 꺼려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해당 발언은 위원 사건 이후에 있었던 발언으로서, 위원 사건 이후 명이 조선을 적극적으로 도운 사례를 인지하고 조선과의 충돌을 꺼리는 것이라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발언상에서 위원의 사례보다는 왜란기에 명이 조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핵심논거로 제시하였으므로 건주는 위원 사건과는 관계없이 당시의 조선과의 충돌 자체를 꺼려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뭣보다도 누르하치의 출병 준비 정보가 실제로 파악된 데에는 누르하치 휘하 장수가 일부러 명측에 정보를 전달한 탓이 컸다. 해당 장수는 일부러 명나라 측에 누르하치의 출병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명측의 협수부총병 마동이 상황을 파악, 조선측에 자문을 전달함으로서 조선측 역시 사실을 알았다.4해당 장수가 누르하치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이런 정황을 볼 때 아마도 누르하치는 실제로 조선에 대해 불만을 품어 무력 시위를 준비했으나, 그러는 한 편으로 자신의 군사적 보복 시도에 관한 정보들을 일부러 노출시켜 조선과 명측이 자신에게 먼저 접촉, 선유해오며 외교적 물꼬를 트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한다. 즉,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외교적 관계 수립을 위해 위원 사건을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누르하치가 출병을 준비하면서 어떤 실제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건간에, 그가 실제로 출병을 준비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한편 이 당시 조선에서도 역시 누르하치가 위원 사건을 빌미로 군사적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이에 대한 조치로 조선측은 명나라의 유격 호대수와 협수부총병 마동, 포정사 우참의 양호등에게 조선-건주간 문제에 개입하여 건주를 선유해달라고 요청하였다.5 건주가 명나라를 섬기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장 효과적인 외교 방책으로 명나라의 힘을 빌리려 한 것이다.
조선의 요청을 받은 호대수, 마동, 양호는 모두 조선의 요청에 따라 본인들의 권한과 역량하에서 최대한 노력했다. 호대수의 경우 차인 여희원을 파견하여 건주와 실무접촉을 하게 했으며6 마동은 건주의 출병 정황을 파악하여 조선에 알려주었다.7 양호 역시도 출병 정황을 포착, 이후 건주측을 선유하였다.8 이런 와중에 조선은 누르하치가 실제로 -그 의도가 어떻건 간에-군대를 준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고 마동에게는 재차 선유를 부탁했으며 여희원의 실무접촉 역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차관 여희원은 만포에 도착한 뒤 건주측에 자신이 실무자로 왔음을 알렸다. 누르하치는 그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이내 본인 휘하의 마신9, 동양재를 파견하여 여희원과 접촉케 했다. 마신과 동양재는 여희원과 접촉한 뒤 건주의 입장을 설명했으나 여희원은 조선의 입장을 들어 그들의 논거를 제압했다. 마신과 동양재등은 해당 대화에서 결국 여희원에게 저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으며, 여희원의 요구를 대부분 수락하였다.10
이후 여희원은 10월 18일 본인의 가정 양대조와 조선측의 통역 하세국등 11명을 누르하치의 거점인 퍼 알라로 들여보내어 누르하치와 직접 접촉케 했다.11누르하치는 그들을 환영하고 잘 대우했으며, 그들이 돌아갈 쯤에 '이번에 강을 넘은 월경채삼인들의 생존자 및 죽은 이들의 가족들에 대해 처벌을 했다. 향후 조선을 침범한 여진인들이 있다면 사살치 말고 쇄환해주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본인 선에서 처벌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또한 강을 넘어온 월경 조선인들 역시 자신들이 붙잡아 송환하면 조선 역시 이들에게 형을 집행해야 할 것이라고도 말하였다. 그것은 누르하치가 지금껏 조선에 요구하던 월경 문제의 협의 사안을 자신에게 선유하러 온 이들에게 꺼내어 놓은 것이다.
이후 누르하치는 조선의 통사 하세국에게 이번에 특별히 방문자들을 위해 소까지 잡아 공궤한 것은 전적으로 그대(하세국) 때문이라고 했다. 아마도 조선의 통사가 위원 사건의 해결을 위해 방문한 것을 무척 긍정적으로 여기는 동시에, 조선과의 통교를 공식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는 양대조와 하세국이 귀환할 때 하세국에게 자신의 서신을 넘겨주었다. 해당 서신은 조선을 향한 것은 아니었고 여희원을 파견한 유격 호대수를 향한 것이었다. 서신을 건넨 누르하치는 본인 휘하 외교실무자인 마신, 동양재등에게 그들을 따라가 외교임무를 수행케 했다. 마신, 동양재의 외교임무란 물론 조선과의 공식적 통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퍼 알라를 떠난 그들은 11월 2일에 만포에 도착하여 차관 여희원과 만포첨사 유염을 만났다. 이후 마신과 동양재는 유염에게 향후 조선과 건주간에 일이 있으면 문서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자는 뜻을 전했다. 그것은 즉슨 정식의 통교 관계를 구축하자는 뜻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염은 그에 대해 그와 같은 통교는 명나라에서 금지하는 것이므로 향후에도 서신을 통한 왕래는 불가능하다고 전하였다.12 결국 마신과 동양재는 공식적 통교 수립에 또다시 실패했으나, 최소한 조선과의 관계가 원점으로 복구되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갔다.13
해당 사건은 여희원의 1차 선유로 흔히 지칭된다. 이로 말미암아 건주와 조선간의 관계는 다소나마 회복되었으나, 해당 문제는 여전히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조선측 역시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지 않았다.
특히 이 시기 조선측은 위원 사건의 문제 말고도 지난 음력 7월에 누르하치가 보내온 서신에 대한 회답 문제 역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비록 유염이 건주측에 문서 통교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전했으나 조선 조정은 최소한 한 차례는 제대로 회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유염보다 상위에 있던 실무자인 평안병사 변응규 역시 이를 인지하여 조정에 본인의 의견을 송부했다.
회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직접적이고도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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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0월 6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1월 20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2월 6일
2.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2월 29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3월 17일
3.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4월 2일
4.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0월 7일
5.호대수가 조선의 요청을 받고 차관 여희원을 파견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9월 17일에 최초로 확인된다. 조선 조정이 요동도사에 대해 자문을 이미 보낸 것은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8월 13일에 확인된다. 마동이 조선측에 1차로 자문을 보낸 것은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0월 7일에, 조선이 마동에게 선유를 요청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2월 6일에 수록되어 있다.
6.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9월 17일
7.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0월 7일, 그러나 실제 자문은 10월 6일에 도착했다.
8.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1월 15일, 이문등록 만력 23년(1595년) 음력 11월 9일
9.당시 건주의 최고 외교실무자인 마삼비의 아들. 당시 마삼비는 조공을 위해 명나라에 들어가 있던 상황이었기에 마신이 대신 나왔다.
10.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2월 5일
11.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12월 6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11월 20일에는 8월 18일날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다.
12.그러나 이 시기 조선 조정은 문서 회답을 무조건 거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들은 누르하치가 지속적으로 문서 통교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최소한 한 번은 문서를 통해 제대로 회답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음력 7월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2차 조선인 쇄환 시기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 시기에도 역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유염의 대처는 현장실무자의 임의대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조선 정부의 '정식 통교'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지속 불가능' 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누르하치에게 발송코자 하는 문서 자체에도 지속적인 서신 왕래가 불가함을 명기코자 했다.
13.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1월 2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