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587년 퍼 알라로 거점을 옮긴 누르하치는 그 뒤에 거의 곧장 아르타이를 죽이고 그의 산채를 빼앗았다. 그로부터 2달여 뒤에는 자신의 휘하 장수 어이두를 시켜 바르다를 함락함으로서 다시 한 번 세력 규모 신장을 이루어냈다. 누르하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바르다를 함락한 어이두를 극찬하며 그에게 바투루 라는 칭호를 내림으로서 치하했다.
한편 누르하치는 바르다 함락 뒤에는 '자하이'라는 암반이 통치하고 있던 '둥'성을 직접 공략하여 그 곳을 정복했다. 그러나 '둥'성 역시 1586년에 함락했던 '토모호'와 마찬가지로 직접 무력을 써서 함락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문본 만주실록의 1587년 음력 8월 기사에는 자하이를 항복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문사료인 청태조고황제실록에도 역시 자하이를 항복시키고 돌아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누르하치는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 둥성에 압력을 가했고 그것을 통해 굳이 직접적인 무력행사를 하지 않고 자하이를 굴복시킨 것으로 보인다.
둥성까지 함락하여 자신의 세를 크게 불린 누르하치는 1588년 음력 4월까지는 다소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이 무렵에 누르하치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이때쯤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복속되지 않은 건주내 세력인 동고부와 그 곳의 암반 호호리에게 귀순을 종용하는 서신을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1
그러던 누르하치는 음력 4월 무렵에 자신과 한 차례 충돌했었던 해서여진계 세력 '하다'로부터 정략결혼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하다의 버일러 다이샨2이 자신의 여동생인 아민 저저를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내어 누르하치와 연대를 꾀하려 한 것인데 그것은 당시 다이샨이 외부 동맹이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얼마전까지 다이샨은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캉구루와 멍거불루등 자신의 하다 계승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던 자신의 숙부들과 대립했고 외부적으로는 숙부들과 연대한 '여허', '울라'등의 다른 해서여진 세력들에게 압박당하고 있었다.
외세의 압박과 숙부들과의 갈등 문제는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이 자신을 지원하고 여허를 공격해준 덕에 겨우겨우 봉합되었으나, 여허와 울라등은 내심 여전히 자신의 하다 계승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던 데다 하다의 국력도 전성기 시절에 비해 무척이나 쪼그라진 상태였기에 다이샨의 입지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이 상황에서 다이샨은 이성량 말고도 또 다른 우군을 얻어야 했다. 그 대상중 가장 유효한 것은 바로 새롭게 떠오르는 강자 누르하치였고 그렇기에 누르하치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내고자 한 것이었다.
누르하치 역시 다이샨과의 정략혼 동맹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지난 1583년 음력 8월에 있었던 충돌과 이후 이어진 일족내의 친하다파 숙청으로 인해 하다와 서먹서먹한 사이였던 누르하치는 이번 기회에 다이샨과 정략혼 동맹을 맺어 하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자신의 대외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1588년 음력 4월 아민 저저를 자신의 부인중 한 명으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이 때 하다에서 건주로 시집가던 아민 저저를 호위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동고부의 족장 호호리였다.
호호리의 통치 세력인 동고부는 누르하치의 일족인 닝구타 버일러 세력과 악연으로 엮여 있었다. 그의 부친 얼기 와르카의 수상쩍은 죽음과 그로 인해 촉발된 동고부와 닝구타 버일러 세력간의 전쟁은 동고부와 닝구타 버일러 세력간 관계를 최악의 상태까지 떨어트려 놓았다.3 거의 3대에 걸친 원한에 호호리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가문의 원한에 목을 메기보다는 대세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로 말미암아 호호리는 다이샨 휘하의 하다군 대신에 아민 저저를 호위, 누르하치에게 데려다 주고서는 누르하치에게 귀부 의사를 밝혔다. 나아가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 휘하의 세력과 그 인민들 역시 온전히 귀부시킬 것을 맹세했다.
누르하치는 일전에 호호리에게 이전의 원한은 잊고 자신과 함께 할 것을 설득하는 뜻을 전했었는데 이렇게 그가 직접 와서 귀부 의사를 밝히자 그를 크게 환대했다. 누르하치는 호호리에게 일등 대신의 직함을 곧바로 주었으며 나아가 자신의 첫째딸인 눈저와 혼인시켜 그를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여 호호리는 '동고부의 사위'라는 뜻의 동고 어푸(donggo efu) 라고 불리게 되었다.4
호호리는 그로서 누르하치의 막하에 들어가 그의 심복이 되었다. 그것은 후일 후금, 나아가 청나라의 개국공신이 되는 이가 자신이 평생토록 충성을 바치는 이에게 처음으로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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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청사고 권 225 호호리 열전. 날짜는 확실치 않으나 호호리의 귀순 시기를 생각해 보자면 아마 이때쯤에 귀순을 종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2.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과는 동명이인. 완 한의 손자이자 후르한(누르하치의 휘하 장수 후르한과는 동명이인)의 아들이며 당시 하다의 적법한 계승권자였다.
3.동고부와 닝구타 버일러 세력간의 원한관계에 대해서는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2220943
4.후일에는 누르하치의 사위들이 워낙 많이 늘어난 탓에 장녀와 결혼한 호호리는 특히 대어푸(amba efu, 대부마) 라고 불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