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요즘은 거 조공이니 책봉이니가 안 먹힌다매? 코쟁이들은 어떻게 저렇게 노냐?"
19세기, 청나라는 서구 열강에게 쥐어터지면서 차츰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 중화질서 - 가 아닌 서구식의 국제질서를 배워나간다.
그러면서 청나라는 종래의 중화질서를 서구식의 국제질서로 전환하고자 했다. 사실 중화질서의 전제와 개념 자체가 서구식과는 달랐기에, 이거 때문에 중국이 손해 본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중화질서는 국가 간에 위계를 두고, 제후국들이 중국을 최고 왕초로 인정하고 엎드리는 대신에 중국은 각 제후국의 실제 통치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조공이 존재하긴 했지만, 서구 국가처럼 아예 피식민국에 영사관이나 총독부 같은 행정기관을 세우고 직접적으로/본격적으로 착취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랬기에 중화질서가 성립했고, 조선이나 베트남 등이 "ㅇㅇ 우리는 중국 너네가 우리 보스인거 인정함" 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당시 서구식 국제질서처럼 제국 - 종속국(식민지) 관계로 전환한다? 중국의 주변국들이라고 마냥 중국에게 간 쓸개 다 내주는 호구도 아니었고, 그들 역시 동시기에 서구식 국제질서가 뭔지 배워가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야! 내가 이 지역(동아시아) 짱임! 내 똘마니들은 감히 내앞에서 딴짓하지 말고! 딴 놈들은 간섭하지 마라!"고 어필하고 싶어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은 자신이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열강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원래 자기 제후국이었던 애들에게 집적거리기 시작하는데....문제가 있었다.
"야! 우리 착한 열강답게 사이좋게 중국을 나눠먹자!"
정작 중국 자기 자신도 서구 열강에게는 식민화 당하는 개-호구였던 것이다.
청나라: 야, 베트남아
베트남(당시 응우옌 왕조): 왜 형?
청나라: 너네 우리 속국인데 왜 우리 허락 없이 프랑스랑 조약(1874년 2차 사이공 조약)맺음? 요즘 이 형이 좀 꿀린다고 내가 우습냐?
베트남: 아니 우리도 우리 좋아서 맺은 게 아닌데 뭐래;; 우리도 쳐맞고 맺은 거거든? 그리고 언제부터 형이 우리가 외교 맺는 거까지 이래라 저래라 했어?
청나라: 이제부터 할거야. 이제 내 허락 없이 따른 애들이랑 맘대로 놀지 마!
베트남: (아니 이게 식민지 취급이랑 다른게 뭐야;;)그럼 형이 와서 이 깡패 코쟁이들이랑 해보든가
청나라: ㅋㅋㅋㅋㅋ 좋다 알았다 기다려라. 야 프랑스! 내 허락 없는 베트남과의 조약은 무효다!
프랑스(당시 러시아와 함께 대영제국 다음으로 강한 1티어급 열강) : 뭐 시1발? 해볼래?
청나라: (꺠갱) 아니...그니까....말로 하자고...내가 너네가 베트남 보호국 만드는 거 '허락'한다고...(1882년)
베트남: 시1발!? 형!?
청나라(서태후): 야 베트남이 어떤 나라냐! 쟤네 조선이랑 같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똘마...아, 아니 제후국이야! 저길 뺏길 순 없다! 가랏 이홍장!(청불전쟁, 1885년)
(자기 군이 피해 입는 게 싫었던 군벌 이홍장의 엄청난 삽질과 프랑스의 치사하고 뻔뻔한 - 존나 비열한 - 작전 후...실의에 빠진 중국의 집으로 비디오테이프가 배달된다)
프랑스: 후후후....너의 사랑스러운 베트남쨩은 이제 나만의 것이 되었다고?
청나라: 시1발...이게 다 우리가 약해서 그래...우리도 열강이 되어야 해..! 그래! 양무운동(청나라의 근대화 운동. 청나라의 체제는 그대로 두고 서양의 무기외 기술을 대량 도입한다)을 하자!
이 엄청난 NTR의 충격에 청나라는 수치로 몸을 떨며, 하루라도 빨리 다른 제후국을 확실히 자기 나와바리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즈음 조선에게 청이 개입할 핑계가 터진다. 임오군란이 터진 것이다(사실 좀 더 정확히 선후관계를 말하자면 임오군란이 청불전쟁보다 조금 먼저다. 1882년. 이후 갑신정변이 발샌한 이유 중 하나가 청불전쟁으로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 반절이 빠져나간 것이다).
민비: 지금 천한 민초 반역도당들이 조선왕조를 뒤집어 엎게 생겼으니 좀 도와주쇼. 큰형님 국가가 보고만 있을 거요?
청나라: 캬 당연히 도와줘야지! 조선이 어떤 나라냐! 우리 일등 속방 아니냐!
민비: (속방....?)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무력 행사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지위("봤냐! 이 지역에서는 내가 질서 잡는 왕초다!")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고, 또 동시에 전통적인 중국-조선 간 조공관계를 제국 - 종속국 관계로 만들 단초를 마련한다.
청나라: 야 조선아. 너네 우리 속방이지?
조선: 우리 자주독립국인데. 일본이랑 맺은 강화도 조약에도 그렇게 써놓음.
청나라: 개소리 하지마라. 너네 수백년 전부터 이양선 올떄마다 "우리는 중국 속국이라 너네들이랑 외교통상 못해염" 이랬잖아! 어디서 밑장뻄?
조선: 아니 그건 우리한테 걔네가 해코지 할까봐 핑계 댄거지!
청나라: 뒤1질래? 어쨌든 인정한 거잖아! 자, 싸인해라.
여기서 중국은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다. 이 조약의 첫머리에는 "조선은 오래 전부터 중국의 제후국이다",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다"임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확실히 하였다. 또한, 이 조약에는 조선 땅에 대한 중국의 간섭 (치외법권, 영사재판권, 청나라의 행정기구 설치, 청나라 상인의 조선 땅 거주 등)이 들어가 있어, 차후에 중국이 조선을 완전히 '식민화' 할 토대가 마련되었다. 내용을 좀 더 보면......
우선 전문에서 대놓고 중국의 속방을 우대한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제1조는 조선의 국왕과 중국의 북양대신을 동급으로 놓고 있다. 그리고 제2조는 너무할 정도의 치외법권 조항이다. 다른 국가와의 치외법권 조항의 경우 상대국에서의 규정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대놓고 자국 상인과 조선 상인의 차별 대우를 언급하고 있다.즉 조선을 완전히 청나라의 속국으로 취급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조선은 중국의 일부가 되나 싶었는데...여기서 변수가 있었다.
일본: 시1발...조선이 중국에게 먹히면 안돼...우리가 먹을 만한 나라는 쟤들뿐이란 말야...
당시 일본은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열강으로 불리기엔 많이 부족했고, 근대화로 인한 식량 문제, 서구 열강들의 무시와 불평등 조약 등에 시달리고 있었다(강화도 조약도 그렇고, 이쯤 되면 알겠지만 중국과 일본은 자신들이 서양에게서 배운 불평등 조약 바로 그것을 조선에게 강요한 것이다. 인간은 항상 나쁜 것부터 먼저 배운다).
말하자면, 일본은 아직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슷한 '근대화 중인 국가 A' 정도의 입장에 있었다(물론, 그들 중에서 유독 특출난 성과를 보이고는 있었다만, 아직 일본이 열강으로 거듭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같이 '털리는 입장'에 서느냐, 아니면 '문턱을 넘고 비상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열쇠는 바로 조선에 있었다.
서구와 같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려면 식민지가 있어야 했고(자원의 조달,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한 재원 확보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야, 식민지도 없는 국가가 어딜 열강이랑 맞먹으려 하냐?"란 분위기가 분명 있었다. 즉,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식민지는 필수였다), 강한 군사력을 증명해야 했다(당연히 서구 열강은 아시아 국가도 못 이기는 군사력을 가진 나라를 동등한 열강으로 인정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에 장거리 군사력 투사 능력도 없던 일본이 먹을 만한 유일한 주변국은 조선 정도였고, 또한 쓰러뜨려야 할 만한 주변국 또한 중국뿐이었다.
문제는, 당시 중국은 일본에게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상기 언급된 양무운동을 통해 중국은 열강의 무기들을 대거 도입했고, 그 무기들은 수량으로나 질로나 일본군에 꿀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선 구역을 담당한 북양 군벌 해군의 경우 주력 전투함들은 일본 쪽이 더 컸지만, 기함은 중국이 괴물 같은 것 2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안되겠다...조선의 급진 개화 지식인들을 이용해 정변을 사주하자! 조선의 지식인들아! 저 고루한 수구꼴통 중국에게 당하기만 할것이냐! 갑신정변!
청나라: 응 삼일천하. 원숭이들아 니네 섬으로 안꺼져?
일본: 아ㅅㅂ...야 중국아 우리 얘기좀 하자.
청나라: ㅋㅋㅋㅋㅋ 프랑스야 세계구급 열강이라 우리가 꺠졌지만 섬나라 야만인인 너네들은 다르지~
일본이 몰래 도운 갑신정변마저도 강려-크한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일본이 빤쓰까지 벗어주며 중국이랑 톈진 조약을 맺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래인 우리가 볼 때야 일본이 저력을 숨기고 있던 것이지, 당대인들 입장에서는 일본인 자신들이 보기에도 청나라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 그렇게 잠깐 동안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고, 조선은 잠시 한숨 돌린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중 하나가 '근대 제국'으로 발돋움고 '열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는 반드시 조선을 가져야 했고, 이것은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 밖에는 딱히 먹을 곳이 없는 일본이 더더욱 절박했다. 결국, 청일전쟁이 터진다.
일본: 끼요오옷!
이 과정에서 일본은 수많은 잔학행위, 당대인들 보기에도 비신사적 행동을 했고, 부족한 보급, 부족한 인력, 현지인(=조선인)의 반발 등에 시달렸지만, 그들에게는 행운이 따랐다(평양 전투를 보면 일본이 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전투였다).
청나라(북양 군벌): 히익 왜 총이 안쏴지는 거야? 아 몰라 이홍장께서도 다른 군벌 애들에게 우리 밀리면 안되니 최대한 군사력 보존하랬어. 야, 군대 빼.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본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은 무장을 갖춘 청나라군은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다. 나중에 이걸 주제로 글을 또 쓰겠지만, 결론만 말하면 청나라가 진 이유는 장비, 즉 하드웨어 떄문이 아니라 제도, 즉 소프트웨어의 문제였다. 군벌 체제라는 파벌주의와 안전지향적 태도, 부정부패와 비리로 인한 엉터리 보급(포탄에 화약 대신 황토를 넣기도 했다!) 등. 참고로 자기 직속 군대를 너무 애지중지 아끼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례는 수십년 후 중국 국민당군도 반복한다(...)
물론 청나라든 일본이든 조선 입장에서는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누가 이기든 미래는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청나라-일본 간 세력 균형이 무너지자,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새로운 세력 균형을 만들어 그 안에서 생존을 도모해보고자 했으나, 조선에 대한 일본의 얀데레적 집착은 그 러시아(.., 그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 당대 초강대국)에게도 달려들게 만들 정도였으니...(물론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 중이던 영국이 일본의 뒷배를 봐주지 않았다면 상황은 좀 달라졌을 것이다).
* 물론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먹는 데에는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명실공히 세계 최강급 열강으로 인정받던 프랑스와 달리, 일본은 러일전쟁 이전까지 좀 2류 열강 취급을 받아서, 청일전쟁, 시모노세키조약,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러일전쟁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서구와 대등한 열강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상의 역사는 제국주의 시대의 국제정세가 단순히 '침략하는 제국주의 열강 VS 불쌍한 비서구 전통 국가'의 단순한 이항 대립 구도로 설명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힘의 상대적인 강약에 따라, 힘이 센 자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힘이 약한 자에 대해서는 식민화 혹은 흡수하려 하는 '공격과 방어가 연동되는' 연속적인 구도로 파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즉, 이 시대 비서구 국가들은 서구 열강들에게 침탈을 당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자기들보다 약한 다른 민족(내부에 있든 외부에 있든)을 침탈하려 했다. 그리고 또 그 민족도 강대국의 침탈을 방어하면서 자기보다 약한 민족에게 그러고.... 국익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심지어,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데, 일본에게 털리는 와중의 대한제국도 간도를 자국 영역으로 편입하고 개발하려 한 역사 때문이다. 그 과정이 제국의 '식민지 만들기'와 유사하다는 주장이 있다. 결국, 당시에 '제국'이 되려면 식민지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당시 시대 사람들(적어도 개화 지식인들)은 그것을 별로 잘못되었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허버트 스펜서가 제창한 '사회 진화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사회에는 마치 1세대 포켓몬처럼 일직선적인 진화 경로가 있으며, 진화한 것이 그 전 단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고, 진화의 방향은 하나, 곧 단선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파이리고 서구 국가들은 리자몽이다(적어도 동아시아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반면, 당대 서구인들 자신은 자기들은 리자몽이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은 꼬렛이라고 여겼다. 즉 애초에 리자몽이 못되거나, 좀 강해지더라도 한계가 있을 놈들이란 얘기다)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 이 시기의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의 전통 복장을 미개의 상징, 서구식 정장을 개회의 상징으로 보았다)
대략 1910년대까지,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서구를 배우고 하루라도 빠르게 근대화를 하자고 주장하는 논지들의 거의 열에 아홉은 이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적어도 그 변종인 것이었다. 서구 국가들의 '문명화'의 환상이 처참하게 무너져내리고 '근대'의 참혹한 민낯이 드러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당대 동아시아 개회파 계열 지식인들의 글에는 '우리들(자기 나라)이 얼마나 열등하고 미개한지', '저들(서구)는 얼마나 모든 면에서 우월한지' '그래서 얼마나 우리가 저들을 친절하게 받아들이고, 모방하고, 배워야 하는지'의 표현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나온다. 후쿠자와 유키치, 량치차오, 김옥균, 박영효 등등....
(19세기 후반 정립된 세계 열강. 일본이 보인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사실 서구인들과 대등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당대에는 가장 바람직한 길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길은 실패하여 지배당하는 길뿐이라고 여겨졌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저들처럼 남을 정복하고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경쟁, 우승열패의 사고방식이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강해져서 남을 지배하고, 약하면 죽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의 워너비였고, 그들처럼 '단일 민족'을 구성하고(다른 소수민족을 탄압해서라도.), '식민지'를 만들고,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백인 코쟁이들과도 맞설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민족을 탄압하건, 강제 동화를 시키건, 주변국을 침탈하는 것이건 말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였으나 후일 친일파가 된 박영효)
이렇게 보면, 당시에 아시아 각국의 급진 개화 지식인들이 서구나 서구화 된 국가(조선의 경우는 일본)에 대해 대책없는, 심지어 사대주의에 가까운 우호적 태도를 보인 것도 이해가 가며, 그들이 나중에 친일파 등 '매국노'화 된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들 보기에 조선은 결국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것이고, 패배한 이상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인 근대화를 위해 더 우월한 남에게 잡아먹혀 없어지는 것이 당연했던 셈이다.
비서구 국가들은 단순히 서구 열강에게 침탈당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모방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의 논리가 그들 스스로도 정당화 되었다.
'식민국' 내지는 '피침탈국'의 지위를 벗어나 남을 호령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고 싶어하는 나라가 일본뿐만이 아니었던 것이고, 이것은 사회 진화론으로 정당화된 셈이다.
p.s: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이는 아시아에서 현재진행형이다.
p.s2: 약간 상관없는 얘기를 더 하자면, 그러한 제국주의화의 과정에서 일본이나 중국이나 주변국을 '야만적이고 미개' 하게 묘사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자신들의 정복과 지배가 정당화 되기 때문. 예를 들어 일본은 조선인을 야만하고 미개한 이들로 묘사하기 위해 애썼다. 중국의 경우는 좀 나았는데, 이건 중국이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미 전통적인 중화적 위계질서가 있었기 떄문에 제후국의 백성들을 '아랫것들'로 규정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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