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먹는 하마’인 전기차, 데이터센터, 인공지능(AI), AI 반도체 등 최첨단 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줄 알았던 석유·가스의 몸값을 높여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기업이 사용하는 모든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글로벌 캠페인인 RE100과 탄소 중립 등에 대한 논의는 쑥 들어간 분위기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부터 끄려는 태세다. 엑손모빌은 보고서에서 “2050년에도 세계 에너지의 절반은 석유와 가스”라고 밝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녹색 성장’, ‘탈탄소’ 바람에 유가 하락까지 겹치면서 석유·가스 기업들의 앞날은 암담했다. 머지않아 석유 시장이 절정을 찍고 꺾이는 이른바 ‘피크 오일(Peak Oil)’이 도래할 것이란 전망도 잇따랐다.
하지만 빅오일들은 조용히 금고를 채우며 앞날을 대비했다. 그리고 세계를 에너지 위기로 몰아넣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들의 곳간을 확 늘렸다. 세계 6대 석유·가스 기업이 2022~2023년 거둔 수익은 770조원에 이른다.
탈원전·탈석탄을 내세우며 재생에너지 중심의 정책을 펼쳐온 독일 정부도 지난 2월 160억유로(약 23조6000억원) 규모 보조금을 투입해 가스발전소 15~20기(10GW)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원전 가동을 모두 중단하고, 석탄발전소도 퇴출에 나선 상황에서 재생에너지만으로 당장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맞추지 못하자 내놓은 자구책이다.
미국에서는 텍사스주가 지난 2월 1.2GW 규모 가스발전소 건설 계획을 발표한 것을 비롯해 조지아·노스캐롤라이나·버지니아 등의 전력 업체들이 앞으로 15년 동안 가스발전소 수십 개를 건설할 계획을 밝혔다.
구전난에 석유·가스 기업의 가치가 올라가면서 숨죽이고 있던 업계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셰브론 CEO 마이크 워스는 지난 6일 미국 매체 CNBC와의 인터뷰에서 “데이터센터는 (태양광발전이 안 되는) 일몰 후에도 멈출 수 없다”며 “믿을 수 있는 천연가스로 돌아오게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천연가스의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도 했다.
사우리아라비아의 아람코 CEO 아민 나세르는 그동안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지난 3월 에너지 콘퍼런스 세라위크에 참석한 나세르 CEO는 “석유·가스를 퇴출해야 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며 “현실적으로 전력 수요를 바라보라”고 일갈했다. 대런 우즈 엑손모빌 CEO는 지난해 11월 열린 한 행사에서 “거대 석유 기업을 악당으로 만들고 화석연료 공급을 제한하는 건 개발도상국 수백만 명을 빈곤에 빠뜨릴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