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일반 대중들에게는 후금(aisin gurun)의 건국군주이자 청나라(daicing gurun)의 개국시조로 칭해지는 누르하치와 후금의 국명을 청나라로 바꾸고 '황제의 존호'를 받아 청의 실질적인 최초의 황제가 된 홍타이지의 임금으로서의 명칭이 흔히 '칸'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더불어 후금 역시도 '칸국'등으로 칭해지는 경향이 있다.
작품 남한산성이 '칸'이라는 표기를 사용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영화건 소설이건간에 작품내에서 홍타이지는 꾸준히 '(청나라의) 칸'으로 호칭된다. 등장하는 조선인들 모두가 홍타이지를 '칸'으로 칭하며 드물게 홍타이지를 앞에 둔 상황이거나 서신을 보낼 때에 황제라는 존칭을 썼다.
그렇다면 실제로 후금과 청의 군주 호칭이 칸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하고 싶다.
실상 칸(khan), 나아가서 카안(qaɤan)은 당시 몽골에서 쓰이던 임금 호칭이었다. 그런데 후금은 몽골 세력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여진 세력을 기반으로 한 국가였다. 16~17세기 당시 여진 세력들의 임금에 대한 표현단어는 본인들의 말로 구 여진어상 하간(hagan)1, 만주어상 한(han)이었으며 그렇기에 후금 역시 본인들의 임금을 한(han)이라고 칭했다.
'칸'과 '한'은 어근과 의미는 같으나 기반언어 및 문자상의 차이로 발음과 표기가 다른 경우다. 그러나 어근과 의미가 같다고 하여 '여진 국가'였던 후금의 임금을 '한'이 아니라 몽골식의 '칸'이라고 표기 혹은 발음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태도이다. 후금의 공식적 언어는 엄연히 여진어-만주어였으며 몽골어는 곁가지에 가까웠다. 문자 역시 만주문이 기반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나라의 임금을 굳이 몽골식으로 부를 이유는 없다. 그런 행위는 자칫 오해 및 곡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야 이렇다지만 후금, 청과 공존했던 조선의 사람들은 다를 수도 있다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은 후금, 청초 시기 그들의 임금을 어떻게 칭했을까? 남한산성에 나오듯이 '칸'이라고 칭했을까?
조선에서는 후금의 임금을 표기할 때에 한자 한(汗)을 써서 표기했다. 이 한(汗)이라는 표기는 한자문화권에서 몽골의 칸을 지칭할 때와 여진의 한을 지칭할 때에 모두 쓰인 표기인데 둘의 어근이 같기에 혼용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조선에서도 결과적으로 후금의 임금을 '한'이라고 표기 및 호칭했음을 알 수 있다.
후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세력인 몽골계 세력들은 어땠을까? 몽골은 본인들의 언어대로 후금의 임금을 '칸(khan) 혹은 그로부터 파생되거나 발전된 단어로 호칭하고 표기했다. 칸과 한의 어근과 의미가 같기 때문에 굳이 여진-만주어와 문자를 차용하지 않고 본인들의 언어와 문자로 '칸' 혹은 '카안'이라고 호칭-표기한 것이다. 예컨대1629년 3월의 칙유 서한의 몽문판에서 홍타이지는 세첸 카안(sečen qaɤan)으로 지칭되었다. 예시로 든 해당 칙유는 후금이 몽골 세력인 코르친에 보내는 것이었으나 몽골이 홍타이지를 '세첸 카안'으로 칭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인이 가능하다.2
유의할 점은 '후금의 임금' 그리고 '청나라의 임금'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칸'이 부적절하다는 것이지 홍타이지가 '칸'(혹은 카안) 아니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홍타이지는 1636년 본인의 영향력 아래에 속하게 된 몽골 세력의 버일러들로부터 존호를 받을 때에 오오드 우르시역치 더어드 어르덤트 나이람닼 복다 세첸 카안(Aɤuda öröšiyegči degedü erdem-tü nayiramdaqu boɤda sečen Qaɤan), 줄여서 복다 세첸 카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몽골 대칸의 적법한 계승권자'로서 인정을 받은 것인데, 이런 것까지 따지자면 홍타이지는 엄연히 '칸-카안'이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홍타이지 이후의 청나라 황제들 역시도 모두 몽골 대칸을 계승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의 대칸' 직위를 '청의 한/황제'가 소유한 것이지 후금ㅡ청의 군주명칭 자체가 '칸'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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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코우이치 요시이케의 여진문자담의/ 이고르 데 라케빌츠와 볼커 리바츠키의 알타이 문자학 소개 참조
2.세첸은 만주어의 '수러', 즉 총명하다와 맥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