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후 부터 시작된 여정, 28년 후 다시 내딛는 첫걸음.
<28일 후> 시리즈의 좀비는 설정이 특이하기로 유명하다. 죽은 시체가 괴물이 되는 여타 좀비물과 다르게 해당 시리즈에서의 좀비는 극도의 분노 상태일 뿐, 여전히 살아 숨쉬는 인간임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는 '좀비보다 무서운 인간'이라는 클리셰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며 무의미한 분노로 멸망해버릴 인류의 암울한 비전을 좀비 장르에 성공적으로 합일화 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28일 후>의 스토리는 멸망을 향해 다가가는 인류의 폭력적인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탈출극이다. 그리고 <28주 후>를 무시하고, 제작도 되지않은 28개월 후를 건너뛰어 제작된 <28년 후>는 그 오랜 세월 끝에서야 기존 세상을 부정하고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하며 다시금 세상을 톺아보는 이야기다.
<28일 후>를 본 관객들은 그 오프닝만큼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짐(킬리언 머피)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눈을 떠보니 세상이 멸망했음을 알게된다. 그는 마치 신을 찾기라도 하듯 성당에 들어가고 감염자가 된 신부(神父)를 마주치게 된다. 혼란의 흔적만 남고 황량하고 적막감 드는 런던의 풍경과 갑작스러운 '괴물의 모습을 한 인간들'의 등장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짐에게 어처구니 없고 부정하고픈 미래이다.
반면 <28년 후>의 오프닝 속 어린 지미의 행적은 짐의 행적과 크게 대비된다. 어린 지미(잭 오코넬, 로코 헤인즈(아역))는 좀비 사태의 혼란을 두 눈을 똑똑히 목격하며 친구, 가족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기껏 도망친 성당으로 신부(神父)인 아버지를 찾지만 그는 좀비 사태를 심판의 날로서 받아들이며 환호할 뿐이다. 지하에 숨어 자신의 뿌리와 신앙의 원류가 되어야 될 아버지(들)의 존재를 나지막하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지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불합리하고 잔인한 현실 속 어린 양이다.
비슷한 이름을 지녔지만 서로 대비되는 짐의 미래와 지미의 현재는 역사성에 기반한 시선처럼 보인다. 짐은 그저 갑작스럽게 미래로 납치된 사람에 가깝다. 이 갑작스러운 단절 덕분에 짐의 행동기반은 기존 인간성을 유지하며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쫒게 된다. 하지만 지미는 짐이 경험하지 못한 현재의 불합리한 폭력과 혼란을 여실히 체감하였다. 그리고 결말에서 볼 수있다시피 지미는 불합리한 현재에 큰 영향을 받아 괴이한 인물이 되었다.
이 역사성의 차이는 <28년 후>에서 드러나는 좀비 바이러스에 대한 부정과 단절의 역사를 더욱 깊고 크게 만들어주는 장치이자 형식이다. 인식하지 못하는 긴 시간 사이에 깊어진 단절과 혐오는 무조건적인 부정으로 연결된다. 지미가 본편에서 단절되어 오프닝과 엔딩에서만 등장하는 것도 이런 역사성이 부여한 부정적인 변화를 더욱 크고 인상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수순이다. 지미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좀비 사태 때 본 텔레토비의 모습 마저도 그에게 녹아있으며 모든 요소가 새로운 현재의 지미에게로 이어진다.
본편의 주인공인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의 여정은 짐과 지미의 단절과는 결이 다른 3의 선택지로서 지난 역사를 통한 단절을 벗어나 세상을 다시금 톺아보고자 한다. 좀비와 대치해온 역사를 기반으로 세상에 대한 경계가 삼엄해진 섬과 그 밖의 세계는 스파이크의 부모의 시선에 따라 각자 다른 방향으로 정의 된다. 스파이크의 아버지 제이미(에런 테일러존슨)에 의한 섬 바깥, 본토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극대화 되어있는 공간이 된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부츠>가 삽입되는 장면은 이러한 폭력과 광기로 얼룩진 인류사의 반복을 상기시킨다.
본토에서 제이미는 수많은 경험을 기억하는 믿을 수 있는 베테랑 전사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섬 내부에서 많은 것들을 망각하고자 한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의무와 사랑를 망각하며, 심지어 섬 바깥의 기억들마저 조작한다. 이 거짓말들은 스파이크에게 자신의 세계에 대한 반항과 의구심을 가지게 하여 아버지의 세상(섬)을 벗어나고자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된다.
반면 스파이크의 어머니 아일라(조디 코머)는 섬에서는 기억을 잃어가는 무력한 가족원이지만, 본토에서는 (본인도 잊어버리지만)좀비와 맞서싸우기도 하며 스파이크에게 사랑으로서 사람과 연결되고, 과거와 미래의 역사가 연결되는 순간들을 알려준다.
이 두번의 여정 속에서 관객들은 물과 불을 사이에 두고 점진적으로 깊어져가는 단절과 연결의 이미지들을 마주하게 된다. 세계와의 단절, 본토와의 단절, 죽음과 그리고 가족과의 단절. 안도감을 주던 물길을 통해 서서히 강조되던 단절의 이미지들은 마침내 그의 근원이자 세계가 되어왔던 아버지의 존재를 단절시킨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불안하고 파괴적인 불의 이미지는 어머니를 향한 정화와 순환의 형태로서 스파이크에게 연결된다.
한편으로 스파이크는 감염자 삼손(치 루이스페리)과 에리크(에드빈 뤼딩) 사이의 인물이기도 하다. 본작은 이 세 인물의 관계를 통해 인류 문명의 연대기를 은유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감염자 삼손은 언어 이전의 폭력과 본능만 남은 존재로, 원시 인류의 대리자이다. 감염자들의 형태는 얼핏보기에 끔찍하고 야만적이만 감염자 나름의 체계와 생활 방식이 확립되어 있다. 이에 비해 스파이크의 생활상은 중세 인간상에 가깝다. 부모 세대의 신념과 기억 속에서만 세상을 인식하다가,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과의 괴리감을 깨닫고 방황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에리크는 인류의 야만스러운 과거를 단절시킨 현대 문명의 인간이다. 때문에 현재 상태를 가장 이성적으로 인식하지만 스스로 단절시켜온 황폐한 과거, 즉 감염자와 생존자로서의 미래로 체감 될수록 가장 무기력해지는 인물이다.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희미한 과거를 언급하며 신화적 수사(修辭)를 통해 단절된 역사에 스스로를 덧입히려 하지만, 미련을 가지고 휴대폰을 내던지는 에리크의 모습은 휴대폰에 저장된 기록만이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여기는 듯 하다. 이런 그가 감염자와 인간 사이에 새로운 길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 삼손과 스파이크가 대표하는 감염자와 생존자의 모습은 부정하고픈 인류의 모습이며, 그들의 선택에 공감할 마음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크는 뼈의 사원에 그를 기억하고 추모한다. 무의미하게 파괴당한 파편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듯이 과거에 연결된다. 그렇다면 삼손, 에리크와의 상호 관계 속에서 스파이크가 섬과 본토를 오가는 여정은 단절된 과거를 인식하고 연결하는 과정이자 자아 확립을 위한 투쟁의 길로 정의할 수 있다.
결국 알렉스 가랜드의 각본은 통상적인 좀비 장르의 외피를 넘어, 인류의 지난한 역사와 기억의 정체성에 대한 사유를 직조해낸다. 덕분에 본작은 감각적인 장르적 긴장감 속에서도 공포나 생존 뿐만 아니라, 잊히고 부정된 기억,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남긴 흔적들에 대해 회고하는 내밀한 작품이 되었다.
앞으로 스파이크에게 펼쳐질 이야기들은 멀고 험난하기만 하다. 불길하면서도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고, 아버지와의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인연과 과거는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이제 관객들은 스파이크가 되어 3부작에 거쳐 감염자에 빗댄 인류의 역사를 다시 보게 될것이다. 과연 이 역사들을 톺아보는 과정을 통해 3부작이 어떤 비전을 그려낼지 기대될 따름이다.
장점
- 좀비 장르에 ‘역사’와 ‘기억’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결합
- 스파이크, 삼손, 에리크등 여러 캐릭터들을 통해 인류 문명의 층위를 은유
- 물과 불, 섬과 본토의 대비로 단절과 연결의 테마를 시각적으로 형상화
단점
- 장르적 쾌감(액션, 공포)은 상대적으로 적음
- 후속작을 염두에 둔 전개 덕에 미완의 인상도 존재
호불호
- 긴박한 서사, 통상적인 장르물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중반부 이후 전개에 불호의 여지가 높음
- 에필로그 중 작품 스타일 변화가 강해서 여운이 깨질 수 있음
요약 버전(by Chat gpt)
<28년 후>는 단순한 좀비 영화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단절과 연결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짐'과 '지미', 그리고 '스파이크'의 대비를 통해 시리즈 전체를 꿰뚫는 역사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드러내며,
스파이크가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 섬과 본토를 오가는 여정은 인간성과 기억의 재구성을 그려낸다.
감염자 삼손(원시), 스파이크(중세), 에리크(현대)라는 삼자 구도를 통해
가랜드는 좀비 장르 안에 인류사의 파편들을 녹여내며,
단절된 역사와 기억을 다시 마주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설계한다.
결국 이 영화는 좀비 장르의 외피 속에
“기억과 망각, 과거와 미래 사이의 성장기”라는 깊은 사유를 담아낸 작품이다.
1페이지 정도 분량 생각했는데
쓰다보니 생각보다 더 길어졌네
장르적인 부분이 적어서 호불호 갈리는건 이해하는데
일단 나온 건 업계 최상위 퀄리티라서
비중이 아쉬울지언정 결과물에 대해서는 대만족하는 중
사실 영화 자체 보다도
영화관들이 상영 첫날부터 만원 특가 상영을 하길래
영화가 인하에 대한 어떤 실험처럼 보이기도 해서
좀 흥미롭게 흥행을 지켜봤는데
30만명 정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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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인류의 거기 너무 크다 | 25.07.03 09:03 | | |